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114화 (114/304)

114화 기연 가로채기 (4)

‘뭐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비틀린 계약서라니.

이름부터 일단 정상적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생이 잘못된 계약서를 지칭하는 것 같다.

‘설마.’

원작에 나왔던 내용은 아니지만 강후가 글을 쓰면서 한 번은 생각했던 콘셉트와 흡사하기는 했다.

대성전이 성좌와 계약자를 이어주는 과정에서 내용 표기를 잘못해 계약자가 ‘죽은’ 경우다.

하지만 디테일하게 비틀린 계약서라는 이름을 걸고 설정을 짰던 적은 없었다.

내용을 봤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 있기에, 저런 네이밍이 붙은 걸까. 분명 사연이 있겠지.

“정석적인 성좌와 계약자 사이의 계약서인데……. 대성전의 성인(聖印)이 찍혀 있기도 하고.”

문제가 없어 보였다.

물론 헌터는 성좌와 계약을 맺을 때, 이런 계약서에 직접 서명을 하지는 않는다.

즉, 이 계약서는 대성전과 성좌 사이에 오가는 계약서다.

대성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성좌들의 세계에도 인간과 같은 이런 계약서는 존재했다.

다만 아까 들어갔던 미지의 공간에서 들은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성전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릇된 공간을 소멸시킨다고 했지.’

계약서에 확실히 문제가 있다.

강후가 내용을 좀 더 꼼꼼하게 훑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않은 곳에 문제가 있었다.

바로 빈칸이었다.

계약서의 일반적인 양식이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빈칸.

바로 거기에 큰 문제가 있었다.

【특약】

【본 계약서의 주인이자 작성자인 성좌 (   )는 계약자 (   )와의 계약을 영구히 유지할 수 있으며.

계약자에게 주 성좌 자리를 공고히 유지할 수 있다. 이는 계약자의 동의가 이루어진 사항이다.

본 계약서는 내용을 확인한 시점으로부터 1일 내에 모든 작성을 완료하여야 한다.】

“이거……. 이름을 적으면 되는 거잖아. 성좌가 누구와 계약을 했던지 상관없는 거야. 계약자를 내 이름으로 적어버리면.”

순간 등골을 타고 소름이 끼쳤다. 왜 비틀린 계약서라는 이름이 붙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의 빛을 봐서는 안 되는 계약서인 것이다.

아마도 대성전의 실수로 유실된 계약서이거나 과거의 양식일 것이다. 지금은 폐기된 양식일 수도.

사실 다른 헌터의 손에 들어갔다면, 큰 문제가 안 됐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면 성좌의 이름을 정확하게 적어넣어야 계약의 효력이 발휘될 텐데.

일반 헌터는 자신과 계약하거나 혹은 후원한 성좌 외에는 이름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후원한 성좌 하나와 계약을 맺는다고 해도 그것이 아주 극적인 효과를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좌를 빼앗을 수 있어.”

강후라면 얘기가 다르다.

상대의 성좌가 얼마나 있고, 어떤 이름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스캔 능력이 있다.

누구의 성좌든지 강탈이 가능하다.

그뿐만 아니라 계약서 효력 덕분에 주 성좌, 그러니까 메인 성좌로 편입할 수 있다.

기존에 차원 강탈자가 메인 성좌로 있는 것과는 별개로 공존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고민에 쓸 수 있는 시간은 하루 남짓. 강후는 일단 누구의 성좌를 빼앗을지는 계산을 끝냈다.

‘장시환.’

무조건 그여야 한다.

열세 개의 별의 리더이자 이 세계의 거대한 흑막이고, 동시에 주인공 버프의 결정체이기에.

장시환의 힘을 여기서 한 번 빼줘야, 성장 동력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다.

일단 계약으로 빼앗아 올 후보로 추린 성좌가 둘이 있는데, 조금 더 고민하기로 했다.

조금 늦게 성좌를 빼앗아 온다고 해서 손해를 보는 것도 아니니까.

‘확실하게 한 방 먹일 수 있어. 치명타로. 단순 보상 같은 기연보다 의미가 크다.’

의미 있는 기연이었다.

장시환의 능력을 빼앗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만큼 강후에게는 플러스가 된다.

능력 총량의 2배만큼이 확 좁혀지는 것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되겠어.”

강후가 오늘 내로 말도 안 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될 장시환을 떠올리며 웃었다.

놈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인다는 생각이 들어서인지, 평소에 잘 올라가지 않던 입꼬리도 올라갔다.

대성전의 계약서는 절대 저항할 수 없는 강제력을 가지고 있다.

비틀린 계약서라고 한들, 계약은 성립될 터. 물론 혼란스러워진 질서의 수습은 대성전의 몫이다.

* * *

그 시각.

전세혁은 보안이 최대치로 강화되어있는 안전 부스 안에서 한 남자와 통화하고 있었다.

바로 이현석.

군벌 ‘심연’의 대장이자, 자신의 죽마고우였다.

- 박동재 씨에 대한 정보를 얻었어. 예전에 내부자를 심어둔 게 이번에 빛을 발하는군.

“동재가 어디에 있는 거지?”

- 까쉬마르 길드의 기반이 모스크바 쪽이니까 그쪽이 아닐까 싶었는데, 완전히 헛발이었어.

“설마?”

- 응. 국내에 있어. 까쉬마르에서 관리하는 인질이 워낙 많다 보니, 외국 인질은 안 데려온 거야.

“이 빌어먹을 새끼들…….”

전세혁이 이를 갈았다.

까쉬마르 길드에 박동재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돈을 송금할 때만 해도.

그쪽의 협상자는 박동재가 모스크바 외곽의 별장에 안전하게 잘 있다고 했다.

실제로 별장의 사진을 보여 주기도 했고, 박동재처럼 보이는 인물의 뒷모습을 찍어주기도 했다.

실제 영상통화도 이뤄졌었기에 의심할 여지 없이, 모스크바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국내라니.

등잔 밑이 어두웠다.

전세혁이 물었다.

“위치는?”

- 오쇼 용병단 관할에 있어. 전종두가 죽고 나서 잔당들이 돈줄로 쓰려고 하는 모양이야.

“재건 자금 같은 건가?”

- 그렇겠지. 박동재 씨처럼 인질로 잡아놓고, 목숨값을 주기적으로 받으면 장사가 제법 되잖아.

“위치 정보도 알 수 있을까?”

- 일단 장소를 포함해서 확인된 정보는 전부 전달 가능해. 하지만 공개적인 지원은 어려워.

“괜찮아. 여기까지 알아봐 준 것만으로도 너한테 정말 많은 신세를 졌어. 오히려 너무 고맙지.”

- 주변 구조를 보니, 실력 좋은 암살자가 필요하겠던데. 정공법으로는 절대 못 들어간다.

“그 정도야?”

- 아직 남아 있는 오쇼 용병단 놈들에게는 인질들이 최후의 보루잖아. 경계가 매우 삼엄해.

“실력 좋은 암살자라…….”

이현석이 의도한 것도, 누군가 그 사람을 생각하라고 한 것도 아니지만.

전세혁은 그 순간, 너무 선명하게 한 사람의 얼굴만이 떠올라 스스로도 좀 당혹스러웠다.

실력 좋은 암살자라는 수식어와 연계해서 떠오른 얼굴이 바로 강후였던 것이다.

일단 여기서부터는 자신의 몫이다.

박동재를 구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무모해선 안 된다. 그럴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전세혁의 눈빛이 깊어졌다.

강후라면 가능할까?

아니, 그것보다 과연 강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당연히 맨입으로는 어려울 것이기에 어떤 제안으로 시작해야 할지, 생각이 복잡해졌다.

* * *

오산역에서 더 이상 볼 일이 없었던 강후는 저녁 무렵에 수원역으로 올라와 있었다.

그리고 수원역 인근에 모던 바에서 늘 그랬듯이 솔라키움 버스트를 마시고 있었다.

무뚝뚝한 남자 바텐더가 만들어준 칵테일. 예상외로 내공이 느껴지는 맛이다.

‘모든 상황을 고려해도, 이 두 성좌가 가장 베스트. 둘 중에 하나를 빼앗으면 되겠는데.’

이제 마무리 단계였다.

장시환이 계약한 성좌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강후였다.

스캔을 통해 알게 된 것도 있지만, ‘원작자’ 고유의 지식이 머릿속에 생생하기 때문이다.

강후는 메모지에 적어 둔 두 성좌의 내용을 다시 살폈다.

【순흑의 구도자 : 암흑기를 다루는 과정에서 몸과 정신이 폭주하지 않도록 완벽하게 중재한다.】

【역행자 : 성좌 계약 하나를 희생해 몸과 정신의 모든 상태를 회복한다. 희생 성좌는 소멸한다.】

두 성좌 모두 대성전에서 서열 25위 안에 들어가는 성좌들이다.

‘순흑의 구도자를 가져오면, 장시환이 암흑기를 다루는 과정이 매우 불안정해질 테고.’

순흑의 구도자가 원작에서 괜히 사기 성좌라고 불린 것이 아니다.

암흑기를 다룸에 있어서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한 폭주의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했기 때문이다.

즉, 바꿔 말하면 장시환에게 저 성좌가 없어질 경우, 흑마법사로서의 완성도도 상당히 깎인다.

‘역행자를 가져오면, 녀석이 믿는 구석이 사라지지.’

역행자도 나쁘지 않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전술을 많이 썼던 것이 역행자 성좌 덕분이었다.

여차하면 다 죽어가던 몸도 살릴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어서다. 일종의 생명 보험인 셈이다.

최종 결정 직전 단계.

강후가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비틀린 계약서 같은 뜻밖의 기연을 또 손에 넣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심판의 지옥에서 가로채려고 하는 기연도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쪽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신중하게 무게를 저울질하던 강후가 결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역행자는 대안이 있어.’

역행자를 포기하기로 했다.

일단 지금의 강후로서는 역행자 성좌의 덕을 볼 일이 적었다.

회복하기 위해서는 후원 성좌가 아닌 계약 성좌를 희생해야만 효과가 발동되는데.

지금의 강후에게는 메인 성좌가 차원 강탈자밖에 없기 때문이다.

황야의 전략가가 조만간 추가된다고 해도 겨우 둘이다.

그중에 누구도 쉽게 희생할 수 있는 성좌가 없었다. 하나하나가 소중했다.

즉, 장시환에게 빼앗아 와도 즉각 도움 될 것이 없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야 하는 것이다.

순흑의 구도자는 다르다.

암흑기 스킬을 본격적으로 쓰게 되면, 그때의 가장 큰 걱정거리가 즉시 사라지게 된다.

불안정성 0%.

순흑의 구도자는 암흑기에 있어 완벽한 통제를 가능하게 해 준다. 변수를 모두 차단한다.

순흑의 구도자가 없으면 암흑기를 다루는 것이 깨지기 쉬운 유리컵을 다루는 느낌으로 바뀐다.

순흑의 구도자가 있으면 떨어져도 걱정 없는 플라스틱 컵을 들고 있는 것과 같다. 대하는 자세가 달라진다.

‘재밌겠어.’

강후는 곧 메인 성좌 하나를 눈 뜨고 잃을 장시환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가 비틀린 계약서를 쓸 생각이었다.

대성전이 폐기하지 못한 계약서인 만큼, 그들은 이것을 문제삼을 수 없을 것이다.

* * *

그날 밤.

【계약자 ‘장시환’과 성좌 ‘순흑의 구도자’와의 계약이 소멸되었습니다.】

【성좌 ‘순흑의 구도자’와의 계약은 공인을 받은 후속 계약에 따라, 새 계약자에게 인도됩니다.】

【해당 계약은 대성전의 공인을 받은 정식 계약서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X발, 뭔데. 지금 뭐 하는 건데? 이게 뭐냐고? 아니, 이게 뭐냐고……!”

장시환은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황당한 일을 체험하고 있었다.

메인 성좌, 순흑의 구도자를 눈 뜨고 빼앗긴 것이다. 심지어 누구에게 빼앗겼는지도 모르게.

그에게 있어서 순흑의 구도자는 흑마법사로서의 정체성은 물론, 파괴력을 증폭해 주는 성좌였다.

아울러 언제 폭주할지 알 수 없는 암흑기를 통제하고 불안정한 정신을 바로잡아 주던 성좌였다.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암흑기의 불안정성이 증폭되기 시작합니다. 1분에 1의 암흑기가 자연 유실됩니다.】

“X발……!”

갑작스레 벌어진 엄청난 손실.

장시환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으로 검은 기운을 쏟아내며 폭주했다.

와장창! 까칭!

순식간에 펜트하우스 외벽 유리들이 남김없이 깨져 나갔다.

이성을 잃어버린 장시환의 분노가 만들어 낸 여파였다.

“말도 안 되는…….”

장시환의 입술과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순흑의 구도자만 믿고, 암흑기를 다루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준비도 해 오지 않은 자신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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