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기연 가로채기 (3)
장시환이었다.
아주 잠깐 놀랐지만, 강후는 이 상황의 의미를 바로 깨달았다.
‘이 새끼. 길드원들은 전면전에 투입해 놓고, 자기는 슬쩍 던전에 와서 꿀 빨고 있었던 건가.’
무표정한 얼굴 뒤로 숨긴 강후의 경멸 어린 시선이 장시환에게로 향했다.
장시환은 수준급, 아니 그런 말로도 수식이 부족할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흑마법사다.
흑마법계와 더불어 공간계 스킬도 특화된 다중 능력자이기도 하다.
암살자 직업군 하나로만 특정되지 않는 강후와 결이 비슷한 셈이다.
그의 실력이면 던전 입구 근처에 배치되어 있던 헌터 전원의 정신을 제어하는 것도 쉬웠을 터다.
그러니 던전에 들어갔는지조차 모르게 들어왔겠지. 아마 지키던 헌터들의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강후가 유청화에게도 그랬듯이, 불쑥 들어올 수 있는 정신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했다.
딱히 장시환의 시도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법이다.
변수는 방심할 때, 생각지 않은 곳에서 갑자기 발생한다. 만고불변의 진리다.
강후가 속내와 달리, 차분히 정돈된 어조로 장시환에게 말했다.
“반갑군요.”
“던전에 잘 들어오셨네요. 다들 들어오려다가 돌아가던데. 누군가 막지 않던가요?”
장시환의 말은 즉, 입구에 정화 길드의 보초도 세워 놨는데 어떻게 속이고 들어왔냐는 뜻이었다.
“들어온 지도 모르게 들어오니, 당연히 막는 사람도 없더군요.”
“오호? 그렇군요. 일단 긴장은 푸시고. 그쪽을 추궁하려고 물어보는 게 아니니까요.”
장시환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편 그는 전망대, 그러니까 강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공태수와 관련해 현장의 CCTV를 전수조사하던 중, 건물 옥상으로 움직인 헌터를 찾아냈었다.
바로 강후였다.
여전히 장시환은 강후의 이름을 모른다.
대신 전망대에서 유독 특별했던 첫 만남을 기억하기에 장소를 기억하는 것이다.
CCTV 속에서 강후는 분명 공태수의 버스가 움직이던 동선 그대로 건물 위에서 움직였다.
물론 그것 하나로 강후가 공태수의 왼팔을 잘랐다고 특정할 수는 없었다.
당시에 공태수를 노리던 용병은 ‘불꽃놀이’로 인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스터 K의 말에 따르면, 공태수를 공격한 인물에 대해 장시환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했었지.’
강후는 장시환과 자연스럽게 시선을 마주친 가운데, 나름대로 생각을 다듬고 있었다.
장시환이 자신이 공태수를 공격했던 현장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면…….
분명 어딘가에서 들켰을 가능성이 크다.
공태수를 공격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어도, 주변에서 얼굴 한 번쯤은 잡혔을 것이다.
장시환은 영악하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할 수도 있고, 모르는 척 슬쩍 물어보려고 할 수도 있다.
이 빌어먹을 세계의 ‘신강후’로 거듭나기 전까지 애정을 가지고서 조형했던 인물이 장시환이다.
원작의 주인공 아닌가.
그렇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이 녀석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고, 그래서 똑똑한 놈이다.
강후가 말했다.
“네. 틈새시장을 노리고 들어왔습니다.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하니까요.”
“저도 그 생각을 했어요. 공식적으로는 어디에도 소속된 던전이 아니잖아요?”
“아직까지는 그렇죠.”
아직까지는, 이 대답에는 곧 정화 길드의 소유가 될 것이라는 속뜻이 담겨 있었다.
강후의 간접적인 인정이 마음에 들었는지, 살짝 경직되어 있던 장시환의 얼굴이 풀어졌다.
붉은빛이 부쩍 감도는 장시환의 눈빛이 부드러움을 빙자한 날카로움으로 전신을 훑는다.
‘우연이 겹치면, 그때는 없었던 관심도 생기기 마련.’
전망대, 그리고 오늘 던전.
장시환과 우연스러운 만남이 벌써 두 번이나 일어났다.
거기에 공태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정보를 직접 챙겼던 것을 생각하면.
장시환과 자신의 접점은 합쳐서 세 번이 생긴 셈이다. 이 정도가 되면 기억에는 확실히 각인된다.
【압도적인 힘이군.】
【제대로 된 호적수가, 정면에 있는 저 계약자의 뒤에 자리하고 있다. 쉽지 않겠다.】
【대성전도 참 좁은걸.】
차원 강탈자, 대재앙 – 어둠, 황야의 전략가가 각자 장시환에게서 느낀 바를 말했다.
좀처럼 감탄하는 말을 하지 않는 그들이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드실래요?”
장시환이 주머니에서 꺼낸 에너지바 하나를 강후에게 내밀었다.
원작에서도 장시환이 수시로 먹던, 최애 간식이 에너지바였는데 당연히 챙겨서 들어온 모양.
‘여기에 달고나 라떼까지 조합해서 먹으면, 장시환의 행복 간식 조합이지.’
선명한 기억이다.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타인이 바로 장시환 아니던가?
“사양 않겠습니다.”
에너지바를 건네받은 강후가 바로 포장을 뜯어서는 우물우물 씹어 넘겼다.
맛은 정말 좋다.
“저랑 비슷하시네요.”
“네?”
“맛없게 드시는 거.”
장시환이 웃었다.
피차 서로의 모습을 보니, 깨작깨작 맛없게 먹는 게 맞기는 했다.
표정만 보고 있으면 살기 위해서 억지로 먹고 있나 싶을 정도로 굳은 표정이다.
확실히 장시환은 성격파탄자 수준인 채관형, 신태석과는 다르게 매너가 있었다.
당연히 원작에서 공들여 만들어진 성격이기도 하다.
서글서글하고 착하며, 주변인들을 잘 챙기고. 아울러 곤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싶어하는.
전형적인 히어로 캐릭터의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엔딩에서 다 작살을 내놨지만 말이다.
엔딩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와 이 모습을 해석한다면, 완벽하게 위장된 가식으로 볼 수도 있다.
웃는 얼굴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본인만 알겠지.
남은 에너지바 반쪽을 마저 먹는 동안에 장시환이 화제를 돌렸다. 다소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오산 토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무 생각 없습니다. 저 같은 떠돌이에게는 남 얘기니까.”
“어디가 이겨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신가요?”
“이기는 길드가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지는 길드에 정의 따위는 사치죠.”
그 말에 순간, 장시환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강후도 인지한 변화였다.
꽤 흥미로운 대답이었던 모양이다. 보통 장시환의 앞에서는 원론적인 얘기들을 많이 할 테니까.
이를테면 정화 길드가 곧 정의니, 정화 길드의 승전을 기원한다거나 하는…… 개소리.
강후는 무조건적 찬양이 아닌, 힘의 논리에 따라 좌우되는 현실을 직시하고 언급했을 뿐이다.
“우문현답이네요.”
짝짝짝.
장시환이 감탄했는지 박수를 쳤다. 듣고 싶었던 대답인 걸까. 아니면 빈정이 상한 걸까.
어쨌든 그렇게 장시환과의 짧은 만남과 간식 시간은 끝이 났다.
불청객 취급을 받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싶었던 것과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장시환은 강후와 반대인 서쪽 루트로 방향을 잡았다.
오늘 그에게 기연이 찾아갈 운명은 아니었던 모양.
강후는 그렇게 다시, 동쪽 루트로 이동을 시작했다.
장시환과 던전 내부에서 마주친 이상, 조금이라도 빨리 기연을 손에 넣고 싶었다.
* * *
던전 공략이 주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강후는 이동하면서 걸리적거리는 몬스터만 처리했다.
그래도 경험치가 알짜인 몬스터들이라 그런지, 제법 성장이 쏠쏠했다.
강후가 생각한 지점에 도착했을 때, 딱 레벨 101을 달성할 수 있었다.
중간에 잔뜩 똥폼을 잡으며 도끼를 연신 휘두르던 고블린 미들 보스도 하나 잡는 데 성공했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하찮은 녀석이었는데, 명색이 미들 보스라서 스킬 하나를 얻었다.
【괴식】
【스킬 숙련도 : Lv. Max】
【상한 것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스킬입니다.】
“이것도 스킬이라고……. 그래. 상한 것을 맛있게 먹는 것도 능력이지. 정상적으로는 안 되니까.”
강후가 고블린 미들 보스에게서 얻은 괴식 스킬을 보며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스킬 목록에 추가될 자격이 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한 음식은 먹는 게 문제가 아니다. 먹고 나서 탈이 나는 게 문제지.
어쨌든 목표 지점에 도착한 강후가 부지런히 주변을 살폈다.
【산봉우리는 마치 가위바위보에서 엄지와 검지로 이용해서 가위를 만든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장시환이 뭔가 특이한 현상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 산봉우리 근처의 가시덤불에서였다.
평소 같았으면 갈 일이 없는 곳이지만, 그날은 참으로 운수 좋은 날이었다.】
생생하게 떠오르는 원작 속 내용이 눈에 보이는 현장의 모습과 일치했다.
이동은 금방이었다.
가시덤불이 있는 위치가 걸어서는 이동이 어려운, 살짝 낭떠러지 같은 곳에 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돌부리나 틈새를 붙잡고 버틸 근력은 충분하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사삭. 사사삭.
단검을 이용해서 가시덤불을 천천히 걷어내자, 투명한 상태로 이글거리는 공간이 보였다.
산이라는 콘셉트를 배경으로 두고 있는 던전과 전혀 다른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장시환이 노란 돌을 집었었지.’
안에 들어가면.
무지개색 돌이 사방에 흩어져서 둥둥 떠다니고 있다. 우주의 무중력 공간이다.
원작의 장시환은 이곳을 정확히 알지 못했고, 당황한 와중에 가까운 돌을 ‘대충’ 집었다.
그게 노란색 돌이었다.
하지만 무지개색으로 구성된 마석 등급에 익숙한 강후에게는 돌의 의미가 달리 보였다.
실제로 빨간색 마석이 가장 비싼 만큼, 이곳에서도 빨간색 돌이 가장 가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인지 가장 멀리 있다.
‘어떤 돌을 집든, 무조건 큰 도움이 될 것은 명확해.’
기연을 위해 설계된 공간.
어떤 것을 잡아도 이득이 되도록 만들어져 있다.
다만 강후가 기억하는 것은 노란색 돌에 연관된 기연뿐이다.
나머지는 아마도 무의식의 구현일 것이다. 그것이 어떤 무의식일지는 직접 까봐야 안다.
“후.”
심호흡을 하고.
몸의 긴장을 바짝 끌어올린 강후가 망설임 없이 바로 투명한 공간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역시.’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우주 한가운데였다.
사방에 수많은 별과 은하가 보이고, 특이하게 생긴 성운이 보이고, 짙은 어둠이 보인다.
원작의 장시환은 여기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만큼 시간을 잃었다.
【대성전의 질서는 반드시 유지되어야 한다. 그릇된 공간을 신속하게 소멸시키겠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누가 말했는지 중요하진 않지만, 내용은 중요하다.
강후가 빨간 돌을 목표로 전력 질주했다. 발 디딜 곳 없는 허공이지만 그래도 달렸다.
도약과 가속을 포함해서 쓸 수 있는 스킬은 전부 끌어다가 썼다. 그만큼 빨간 돌은 멀었다.
…….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우주의 침묵 속에 공간이 빠르게 없어져 갔다.
모든 것이 일그러지며,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아슬아슬했다.
무너지는 공간의 속도와 강후가 빨간 돌을 향해 달려가는 속도가 거의 비슷했다.
돌을 잡지 못하면, 기껏 장시환의 기연을 가로채러 들어와선 헛수고만 하게 될 수도 있다.
‘조금만 더.’
이를 악물었다.
무너지는 속도보다는 빨라야 한다. 더, 더, 조금만 더. 뼈가 으스러질 듯한 고통도 버티며 움직였다.
그리고.
타악!
강후의 손이 빨간 돌을 움켜쥠과 동시에.
“……!”
공간의 붕괴에 휘말렸다.
그 순간, 어느새인가 원래 있던 가시덤불 앞으로 돌아와 있었다. 손에 꽉 쥔 돌과 함께.
이내 돌은 한 줌의 재로 변하더니, 방금까지 없던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냈다.
그것은 한 장의 종이였다.
무언가가 잔뜩 적힌, 지금껏 본 적 없는 내용을 빽빽하게 써넣은 특이한 종이.
【비틀린 계약서】
용도를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계약서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