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면접 (1)
* * *
작금의 제약사는 의미가 변질된 곳이 많았다.
헌터를 대상으로 한 약물과 약제가 비싸게 팔리다 보니, 이쪽으로 연구 역량이 쏠리는 상황.
특히 마약류, 각성류로 불리는 것들은 가격이 워낙에 고가라 상업적인 가치가 높았다.
그래서 일부 제약사는 아예 국제적인 범죄 조직으로부터 연구비를 받고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전동 제약은 그런 제약사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고 해도 될 정도다.
게다가 제약사들 간에도 경쟁이 치열하고, 내부 기밀 탈취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용병 시장에 들어오는 의뢰도 활성화되어 있었다.
다른 제약사의 연구소나 핵심 원료 공급 창고를 공격하거나, 파괴하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이다.
강후는 조만간 이예린이나 김수경으로부터 관련 의뢰가 들어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뢰 보수만 두둑하게 챙겨준다면, 거절할 이유는 없다.
어차피 몇몇 ‘선량한’ 제약사를 제외하면 다 한 통 속이니까.
어쨌든 서울에 도착한 강후는 정유리와는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아울러 마스터 K와의 자리를 만들어 준 그녀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감사의 말 대신.
다음에 서해안을 따라 드라이브나 가자는 말로 에둘러 데이트 신청을 했다.
시간만 맞으면, 그녀와 잠깐 바람을 쐬는 것 정도는 귀찮은 일도 아니었다.
지하철을 타고 삼성역으로 이동한 강후가 정화 제5빌딩으로 움직였다.
열차에서 내리니, 스크린도어부터 시작해서 계단까지.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 정화 길드에 관련된 광고가 나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길드 차원에서 송출하고 있는 길드 홍보, 활약 영상이 있었고.
일부는 정화 길드의 간부에 대한 ‘팬’들의 축하 혹은 응원 광고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곧 생일을 앞둔 채관형에 대한 팬들의 축하 광고였다.
【채관형. 당신이 태어나서 우리 곁에 있음에 감사해. 언제나 함께 있어 줘. 사랑해.】
【채관형이 세상에 내려온 날에 하늘에서는 첫눈이 내렸다. 이젠 우리가 첫눈이 될 시간이다.】
“…….”
잔인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을 봐도 비위 하나 안 상하는 강후가 문장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팬덤의 팬심에서 보면, 진심이 담긴 멘트이기는 하지만.
채관형이라는 인물의 본질을 아는 입장에서는 걱정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장담할 수 있다.
채관형은 자신의 팬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벌레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다.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운명론에 몰입해 있다.
그 운명론에서 헌터가 아닌 존재들은 전부 신이 만든 ‘쓰레기’다. 숨 쉬는 것도 아까운 존재.
눈이 어질어질해지는 광고의 향연을 지나, 출구로 나오니 여기도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수백의 사람들이 오산역 일대에 거점을 두고 있는 길드, 바스타드와 평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정화 길드의 오산 토벌을 응원하며, 열렬한 지지의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었다.
‘나중에 장시환의 대적자가 된다면, 저 사람들의 비난과 저주도 내게로 향하겠지.’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평화와 안정의 도시 서울.
이곳이 강후에게는 아주 거대한 죽음의 늪처럼 느껴졌다.
정화 길드를 추종하고 맹신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상낙원이 따로 없는 도시지만.
그 반대편에 위치한 사람에게는 언제 탄압의 광풍이 불어닥칠지 모르는 죽음의 도시였다.
장시환이 죽이라고 하면, 친구든, 가족이든 얼마든지 죽일 만한 광기가 서울에는 있었다.
‘멋있긴 하네.’
강후가 길거리에서 계속 스쳐 지나가는 정화 길드원들의 제복을 보며 감탄했다.
유명 디자이너의 손길이 닿아서 그런지, 작은 마감처리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서 정화 길드의 제복은 명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평복을 입을 일이 있어도, 제복을 챙겨입게 되는 것이다. 그 자체가 커리어고 명예이기에.
최근에 위성 길드에서 대거 인원을 충원한 정화 길드다.
보통 새로 가입한 지방의 길드원들은 서울의 정화 빌딩 투어를 꼭 시켜주는 만큼…….
한서연도 어딘가에 있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녀대로 알아서 잘 생활할 것이다.
* * *
정화 제5빌딩 근처.
외부 용병들의 면접일이라서 그런지 빌딩 근처에서부터 이미 사람이 몰리고 있었다.
출신이 출신이다 보니, 상당히 거칠어 보이는 다양한 인간군상이 존재했다.
딱 봐도 나 용병이오, 하고 티를 내는 외모도 많았다. 훈장처럼 보이는 상처는 덤이고.
그때.
퍼억!
민머리의 헌터가 강후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툭의 개념이 아니라, 작정하고 친 느낌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이런 곳에서는 괜히 센 척한답시고, 쓸데없는 짓거리로 힘자랑하는 놈이 있으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민머리 녀석은 초면의 강후를 보자마자 바로 선을 넘어버렸다.
호리호리한 체형이 거구인 자신에 비해 작아, 만만해 보였기 때문일까?
“왜 치냐?”
“내가 할 말을 해 주는 건가?”
“새끼야, 묻잖아. 왜 쳤냐고.”
민머리의 급발진에 가까운 시비에 강후가 견장을 슬쩍 보니, 해영 길드 소속이었다.
정화 길드와 상호 교류 파트너십을 체결한 덕분인지, 정화 길드 빽이라도 생긴 줄 아는 모양.
물론 해영 길드 자체가 구성원에 대한 평이 안 좋긴 했다. 잘난 맛에 사는 놈들이라서.
강후가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뭘 하고 싶은 거야. 사과를 받고 싶은 거냐?”
“사과해라. 당장.”
“미안. 그럼 간다.”
분명 사과는 했지만, 당연히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나쁠 표정까지 섞어가며 사과를 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서는 강후의 모습에 민머리가 더 잴 것도 없이 주먹을 뻗었다.
퍼억!
민머리의 주먹이 강후의 뒤통수에 작렬했다.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 타격음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사아악! 사각!
자신의 뒤에서 뭔가 날카로운 것에 베이는 소리가 나더니, 몸 전체가 시원해졌기 때문이다.
“꺄아아악!”
“뭐, 뭐야, 쟤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던 행인들이 갑자기 팬티 바람이 된 민머리를 보고 비명을 질렀다.
민머리가 무슨 일인가 싶어 보니, 자신의 주먹이 꽂힌 것은 강후가 아닌 분신이었다.
강후는 민머리의 주먹이 닿기 전에 분신술을 쓰면서, 바로 몸을 돌려 횡이동을 쓴 덕분에 자연스럽게 민머리의 뒤를 잡을 수 있었다.
“한 번만 더 시비 걸면, 그때는 알몸이야. 처신 잘해.”
강후가 민머리의 기분이 상하기 딱 좋게, 조소 어린 시선으로 그를 보고는 뒤돌아섰다.
하지만 이미 모욕을 당한 민머리가 여기서 물러설 리 없었다.
“좆 까, 새끼야!”
다시 날아든 주먹.
파앙!
이번에는 그림자 걸음이었다.
민머리를 농락하듯이 다섯 개의 그림자가 들락날락하기를 반복하더니.
당황한 민머리의 시선이 앞쪽으로 쏠리자, 강후가 그의 후방에 있던 그림자로 이동했다.
그리고.
사악! 사아악!
아주 섬세하고도 깔끔한 단검의 움직임 속에서 민머리는…….
투욱.
“꺄아아악!”
“변태다, 변태야!”
“뭐야, 저거밖에 안 돼?”
“달려 있긴 한 거야?”
완벽한 나체가 되었다.
비명 속에 또렷하게 섞여 들어오는 능욕은 덤이었다.
찰칵찰칵!
이어지는 카메라 플래시 세례까지. 민머리의 흑역사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생겼다.
정작 그 상황을 만든 강후는 이미 현장을 떠나고 난 후였다. 은신과 함께 소리소문없이.
* * *
그 시각.
“뭘 그렇게 재밌게 봐?”
“빌딩 입구 근처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너무 간단하게 상황을 매듭짓고 가 버려서 말이야.”
“누군데 그래?”
“얼굴이 왜 낯이 익나 했더니, 오늘 우리가 면접을 볼 헌터더라고.”
“누군데?”
“정선규. 서류에 적어 낸 스킬 조합이 특이해서 관심을 가졌었던 그 헌터 말이야.”
“아, 그 암살자?”
“응.”
올해로 40대 후반에 접어든 동갑내기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갑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인이었다. 그리고 오늘 강후의 면접을 담당할 사람이기도 했고.
이름은 공유석과 고주희.
길드 내 서열은 16위, 17위이며 각각 체술계와 마법계였다.
레벨은 425로 누가 연인 아니랄까 봐 똑같았다.
“어땠는데?”
“분신술, 횡이동 연계가 뛰어나네. 게다가 그림자 걸음이라는 스킬도 상당히 흥미롭고 말이야.”
“그, 그림자 위치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는 그 스킬 말이야?”
“응. 스킬북 데이터베이스를 뒤져봤는데, 그림자 걸음이라는 스킬은 없던데…….”
“뭐, 데이터베이스에 모든 정보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자기가 흥미를 느낄 정도면, 실력은 있는 모양이네.”
“응,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깔끔해. 암살자의 최우선 덕목이기도 하잖아. 깔끔함.”
“기대되는데?”
공유석과 고주희의 눈빛이 마침 들고 있던 서류철, 그 중단에 있는 강후의 얼굴에 멈췄다.
서류 면접 단계에서 두 사람 모두 호기심을 느껴, 따로 붉은 별표까지 해 둔 파일이었다.
관심 인물이 왔다.
그를 담당할 심사관은 바로 자신들이었다. 임박한 만남에 두 사람의 가슴이 두근댔다.
* * *
복도의 끝에 있는 면접장을 시작점으로 쭉 놓여 있는 의자에는 헌터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헌터가 이렇게 많을까 싶을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었다.
강후는 그중, 자신의 이름이 적힌 의자를 찾아 앉았다.
어떤 식으로 순서 배치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자리이니 오래 기다릴 것 같진 않았다.
다만 시간이 흐르며, 면접장 밖의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강후의 앞으로 스무 명의 헌터가 들어갔는데, 전부 다 불합격 처리를 받고 나온 것이다.
만약 공략팀에 합류 가능 판정이 나왔으면, 내부에 별도로 마련된 방에 들어가야 했다.
안에서 1회성의 공략팀 계약 절차와 세부 안내가 이어지므로, 시간이 상당히 소요됐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긴 기다림 없이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의심할 여지 없는 탈락이었다.
‘영웅을 모집한다더니, 그 영웅도 가려 받는 모양이군.’
강후가 코웃음을 쳤다.
정화 길드이기에 눈이 높을 수는 있다. 성에 안 차는 용병이 많을 수도 있겠지.
깐깐한 검증을 통과할 자신감은 충분히 있었다. 단, 어디까지 보여 줄지의 문제였다.
“정선규 씨?”
“네.”
“들어오세요.”
안내원을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강후가 알아볼 수 있는 얼굴 둘이 정면에 보였다.
공유석, 고주희.
원작에서 의도를 갖고 만든 중년 캐릭터였다.
중년의 사랑을 멋지고 느낌 있게 연출하고자 만든 커플이었는데, 다른 내용을 쓰다가 공기화가 되어 버렸다.
내심 에필로그를 쓸 때 미안했던 커플 중에 하나였는데, 이렇게 직접 보게 됐다.
말이 중년이고 40대 후반이지, 직접 보면 둘 다 30대 중반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는 동안이었다.
“정선규 씨? 조금 더 앞으로 오세요. 얼굴 확인을 한 번 더 해 봐야 해서요.”
그때, 오똑하게 솟은 콧날에 포인트처럼 있는 점이 인상적인 고주희가 말문을 열었다.
강후가 두 걸음 정도 앞으로 가자, 고주희가 서류와 강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