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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107화 (107/304)

107화 마스터 K (3)

* * *

시작부터 깊은 대화가 오가지는 않았다.

다만 강후와 K는 무언의 눈빛을 계속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냈다.

누가 말을 꺼낸 것은 아니지만, 정유리가 자리를 비운 이후 둘만의 대화를 나누자는 교감이었다.

K의 지시로 문형서가 직접 만들어온 것은 포르티스 티(Tea)였다.

포르티스는 아주 약한 각성 효과가 있는 식물인데, 특정한 던전에서만 채취가 가능했다.

사실 각성 효과보다는 두려움을 없애 주는 효과가 좋아, 그쪽 용도로 썼다.

초면의 만남에 강후가 긴장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린, K의 배려였다.

“참 고맙게 생각하네. 자네 덕분에 우리 유리가 방황을 마치게 됐으니 말이야.”

“선택은 유리가 했죠. 저는 작은 실타래 하나 정도만 늘어뜨려 줬을 뿐입니다.”

“그 실타래를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늘어뜨렸는데, 이 녀석이 원체 잡지를 않더라고.”

“할아버지! 그건……. 그때는 모든 것이 두려웠을 때라 그랬어요. 사람을 믿을 수 없었달까?”

“안다, 알아. 그래서 내가 다시 선규 청년에게 고마워하는 것 아니냐. 정말 고마워서 그래.”

“그건 맞아요.”

K의 말로, 정유리가 힘들어하면서 고통스러워했을 시기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그렇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는지도 모르고, 알아도 대수롭지 않아 한다.

하지만 피해자는 늘, 매 순간을 고통 속에서 산다. 스스로 극복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한.

강후가 정유리에게 연민과 동정의 감정을 좀 더 느끼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순수한 영혼이 채관형이라는 쓰레기 같은 놈에게 더럽혀졌던 것이니까.

이후에 자잘한 덕담과 일상 얘기가 10분 정도 오갔다.

주제가 정유리에 대한 것이라서 강후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정리하자면 정유리의 순수함과 열정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래서 앞으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할머니의 존재에 대해서 들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이야기의 흐름이 그쪽으로 가진 않았다.

그리고.

“유리야.”

“네, 할아버지.”

“선규 청년과 얘기를 좀 하고 싶은데 말이야. 잠깐 자리를 비워줄 수 있겠니?”

“아, 그럴까요?”

정유리는 강후와 할아버지의 대화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강후가 이곳에 온 이유가 물품 구매 같은 비즈니스 차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겸사겸사 정유리가 자신의 은인을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어쨌든 목적은 명확했다.

“창고에 가서 상태 좋은 솔라키움, 매드 솔라키움 위주로 한 번 더 살펴주고.”

“그럴게요! 형서랑 같이 가 봐도 되죠? 혼자 있으면 심심해서 얘기 좀 하면서 하려고요.”

“네가 오지 말라고 해도 따라갈 게다. 사실 나보다 너에게 더 충성하는 녀석이잖냐.”

“에이, 그건 아니에요.”

“네가 그놈 마음을 알긴 알어?”

“할아버지 바라기잖아요?”

“어쨌든 특등품으로 미리 좀 골라보거라. 세척도 가능하면 해 두고 말이야.”

“네, 알았어요! 오빠, 할아버지랑 잘 얘기해!”

“응.”

말이 끝나자마자 정유리가 자리를 비웠다.

방음벽과 문으로 시공된 이 공간은 소리가 확실히 밖으로 새지 않는 안전성이 있었다.

잠깐의 적막이 흐르고.

살짝 말랐던 입안을 달콤한 향기의 포르티스 티로 적시고 난 다음.

K가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던 강후에게 말문을 열었다.

“자네.”

“네.”

“정말 외롭고 고독한 운명을 추구하는군. 힘들지 않나? 쉬운 길이 아닐 텐데.”

순간 뜨끔했지만, 강후는 옅은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지금 K가 건넨 말은 콜드 리딩일 수 있다. 누구에게 말해도 들어맞을 수 있는 얘기다.

강후가 맞받아쳤다.

“마스터 K께서도 종종 외롭다는 생각도 드시고, 특히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보실 듯합니다.”

“하하. 방금 내가 한 말이 콜드 리딩일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군. 너무 뻔한 받아치기 아닌가?”

“근심 어린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래. 생각은 자네의 자유지. 어쨌든 나는 느낄 수 있어. 자네는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야.”

그에게 뭔가 보이는 걸까?

보일 수도 있다.

일전에 죽였던 해결사도 마나의 흐름만으로 자신을 쫓아왔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능력은 반드시 영적인 개념의 힘이 포함된다. 그리고 영적인 힘에는 통찰력도 들어간다.

그가 뭔가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해서, 그에게 솔직히 모든 것을 말해 줄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천기누설이다.

말 한마디가 타임 라인을 극단적으로 비틀어버리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특별하게 살고 싶긴 합니다.”

“자네 같은 사람은 끝이 명확하지. 영웅 아니면 악당. 어때, 너무 단순한가?”

“아뇨. 다만 뒤가 구린 영웅보다는 차라리 당당한 악당이 낫겠다는 생각은 합니다.”

“그래. 내가 너무 뜬구름 잡는 식으로 얘기를 했군. 어쨌든 아까부터 그 말을 꼭 해 주고 싶었어.”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K가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았는지는 사실 그렇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을 어찌 보든, 어떻게 평가했든, 살아가는 방향과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테니까.

다만 그에 대한 호기심은 깊어졌다. 과연 그는 헌터로서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는 걸까.

확실한 것은 그는 철저하게 힘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수많은 성좌 정보가 이를 증명한다.

“난 자네가 나를 보자고 한 이유를 알 것 같은데. 먼저 말하겠나, 아니면 내가 짚이는 바를 말해 줄까?”

“들려주시겠습니까?”

“유리 말대로 먼저 말을 잘 안 하는 친구로군. 좋아, 내가 느낀 바를 말해 주지. 자네는 몸에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어.”

“…….”

이것도 콜드 리딩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후에 이어진 K의 손동작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는 양팔을 펼쳐서는.

자신을 중심으로 기운이 모여드는 듯한 흐름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선을 그리면서 말이다.

“미시적으로 보면 절대로 티가 나지 않지만. 거시적으로 보면 어렴풋이 살필 수가 있어.”

“어떤 게 보이십니까?”

“자네, 마나에 대한 반응이 비정상적이군. 이 정도의 흐름이면 마나 걱정은 없겠는데.”

K는 정확히 자신의 본질을 짚었다.

물론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라는 병증 자체까지 진단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강후 본인이나 알 수 있는 부분이고, 오늘 초면인 그로서는 정말 깊게 꿰뚫어 본 것이다.

강후가 살짝 입을 우물거리다가 말자, K가 힘 주어 근거를 덧붙였다.

“솔라키움, 매드 솔라키움을 유독 찾는 이유는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서겠지. 다만 임시방편이고.”

이쯤이면 다 본 것이 맞다.

강후도 더 숨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후련해지는 구석도 있었다.

그에게 구구절절 자신의 상태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는 이미 판단을 마친 듯하다.

“인정하겠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고견을 듣고 싶어서 직접 찾아오고자 했습니다.”

“용건은 자네에게 있는데, 어째 애가 타서 먼저 입을 나불거리는 것은 내가 된 듯하군.”

“쉽게 이해시킬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습니다. 믿지 않을 수도 있고.”

“내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으면 말을 아낄 생각도 있었다는 얘기군.”

“그렇습니다. 관련된 비용은 얼마든지 아끼지 않고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바로 말하지.”

“예.”

“나도 정답은 몰라. 하지만 유사한 병증을 연구한 적은 있지.”

“어떤 병증입니까?”

“3년 전이었나 그럴 거야. 본명을 밝힐 순 없으니, 헌터 A라고 하지. 버프 스킬에 대한 과반응증이 문제였어.”

“버프를 받으면 몸이 버티지를 못하는 겁니까?”

“맞아. 그때 정말 많은 연구를 했었고, 심지어 해외 연구자와도 연계를 했었지.”

“혹시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미하이 반쿠. 루마니아의 연구자지. 자네는 말해 줘도 모를 거야. 이쪽에 관심이 없으면 들을 수도 없는 이름이라.”

K의 예상과 달리, 강후는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연구는 어땠습니까?”

“쉽게 말해 돈지랄이었어. 단순 가설, 아니 망상 같은 생각도 전부 실험을 해 봤거든.”

“진전은?”

“있었지. 내가 세운 가설 중에 하나가 맞았어. 균형 맞추기. 말은 쉽지만, 실현하기는 어려운 작업이었지.”

귀가 솔깃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 접근을 했던 걸까. 강후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K가 쇼파를 탁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서 끊는다고?

“……?”

“자, 일단 거래부터 하겠나?”

역시 그는 타고난 장사꾼이다.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절단 신공을 당해버렸다.

영악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K의 장삿속이었다.

* * *

K의 설계(?)대로 솔라키움 거래가 진행됐다.

일반 솔라키움은 28개를 가지고 있었기에 추가로 더 구매하진 않았다.

대신 개당 1억 원씩 하는 매드 솔라키움을 20개 구입했다.

스팟파이어 길드에서 제공한 골드 카드의 한도에 딱 맞춰 구입한 금액이었다.

거래가 진행되는 동안.

정유리는 문형서와 산책을 다니느라 옆에 있지는 않았다.

대신 낱개로 잘 포장된 매드 솔라키움에 하트 모양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별것 아닌 스티커일 수 있는 데도 풋, 하고 웃음이 났다. 어린아이 같은 천진난만함 때문이겠지.

강후가 20억 원이 결제된 카드 명세서를 확인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비싸긴 비싸다.

“매드 솔라키움은 늘 볼 때마다 느끼지만 미친 가격이네요.”

“나도 구하는 게 쉽지가 않아서 말이야. 자연 재배 성공률도 너무 낮고.”

“그렇게 생각하면 오히려 합리적인 가격일 수도 있겠네요.”

“그나마 요즘 수요가 덜해서 가격을 내린 거야. 한창 비쌀 때는 3억 원도 했었어.”

“요즘은 안 찾는 모양이죠?”

“대체재가 워낙 많아야 말이지. 다들 혼합 형태의 각성제, 진통제를 원하니까.”

“마약 말입니까?”

“난 마약 취급은 안 해. 하지만 내게서 구매해 간 것들에 마약을 첨가하는 놈들은 아주 많지.”

매드 솔라키움을 20개나 산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후도 생각을 되짚으니, 직접 찾아가서 구할 수 있는 포인트가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어렴풋이 위치 몇 군데를 알기는 하지만, 탐색할 영역이 너무나도 광범위했다.

며칠 시간을 내서 가야 하는 작업인 만큼,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포장도 잘 되어 있어서 보관하기 좋을 것 같네요.”

“그나저나 자네. 스핏파이어 길드의 골드 카드를 어떻게 갖고 있는 건가?”

“어쩌다 보니?”

“그 길드, 은근히 깐깐한 구석이 많아서 외부인에게는 절대 골드 카드를 안 줄 텐데?”

“사연이 좀 있습니다.”

“길드 마스터가 개인적으로 신세 진 게 있는 모양이군? 허허, 갈수록 호기심을 자극한단 말야?”

K의 눈빛이 반짝였다.

첫 만남부터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알아갈수록 더 궁금증이 깊어지는 청년이었다.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그리고 왜 몸은 또 저렇게 저주받은 것처럼 잔뜩 말썽을 부리고 있는 걸까?

너무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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