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106화 (106/304)

106화 마스터 K (2)

* * *

그라운드 제로로 가는 차 안.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주변의 풍경도 빠르게 변해갔다.

정돈되고 깔끔하며, 안전한 느낌을 주는 서울의 밝고 활기찬 풍경과는 달리.

깨진 가로등과 아스팔트 포장이 많이 까진 길바닥, 버려진 차들이 즐비한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물론 이런 곳에서도 사람은 살아간다. 서울의 살인적 물가는 중산층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니까.

세상의 모든 공간이 빛과 행복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는 건, 너무 과한 욕심이다.

애초에 원작 ‘구원자가 된 빌런의 생활백서’는 철저히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세계로 그려졌다.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강후이기에 허튼 기대 같은 것은 하지도 않았다.

한편.

강후가 말을 먼저 걸지는 않을까 해서 기다리고 있던 정유리가 입술을 삐죽였다.

강후와의 대화는 늘 자신이 화두를 던져야 하는 식이었다.

지난번처럼 용건이 있을 경우에만 먼저 말을 걸지, 그렇지 않을 때는 그냥 석상이 따로 없다.

무표정한 얼굴까지 더해지다 보니, 가끔 마네킹이나 밀랍 인형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

강후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생각도 많고 슬픈 사연도 많은 남자를 보는 느낌이었다.

꾹 다문 입에서 혼자 무거운 짐을 모두 짊어지고 가려는 듯한 고독함이 느껴진다.

침묵 뒤에 숨겨진, 그의 복잡한 감정선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에게 뭔가가 있다고.

그래서 대화에는 영 소질이 없는 강후를 보면서도 자꾸 말을 걸고 싶어지는 것이다.

“정선규 씨?”

“응.”

“아까부터 계속 창밖만 보고 있는데, 힘든 일 있어?”

“아니, 딱히.”

“오빠. 이번에 심판의 지옥 용병 모집에 오빠도 신청했다고 그랬지?”

“응. 서류 심사 넣었어.”

“나도 가려고! 둘도 없는 성장 기회이기도 하고, 이참에 인맥도 좀 넓혀볼까 해서.”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화 길드에서 주관하는 공략인 만큼, 채관형을 그녀가 만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긴, 어찌 보면 인생의 원수나 다름없는데 괜찮은 걸까?

그런 강후의 생각을 읽었는지, 정유리가 말을 이어갔다.

“괜찮아! 채관형을 직접 본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마인드 컨트롤도 많이 했고, 감정을 숨기는 법도 배웠고.”

“정말 괜찮아?”

“응. 과거의 힘든 기억보다, 활기찬 미래로 나아가고 싶은 의지가 강해! 다 오빠 덕분이지.”

“결론이 좀.”

“진짜야. 나, 이래 봬도 빈말은 잘 못 한다구?”

“나는 팀 단위로 움직이진 않을 생각이야. 신청도 그렇게 넣었고.”

“응, 그건 오빠 선택이지. 같이 가자는 게 아냐! 나도 참여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 말이지.”

“잘 준비해 봐.”

“그래야지! 아, 물론……. 그 일을 잊지는 않았어. 복수는 꼭 할 거야. 그때까지 부단히 인내하고 기다릴 뿐. ”

마지막 말에 기억의 파편 속으로 잠시 묻어둔 그녀의 아픔이 드러났다. 힘껏 견디는 거겠지.

어쨌든 굳은 결심이 담긴 정유리의 대답을 끝으로 리무진 안은 다시 침묵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눅눅해 보이는 하늘만큼이나 딱 어울리는 차 안의 분위기였다.

정유리가 무선 이어폰을 꺼내서는 귀에 꽂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혼자 지낼 때, 외롭지 않게 그녀를 달래줬던 클래식 음악이다.

강후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스터 K를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좀처럼 긴장하지 않는 강후도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원작에서도 K에 대해 간접적인 언급은 많이 나왔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의 핵심으로 등장하진 않았다. 그가 주인공 ‘장시환’을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해답까지는 원하지 않아. 단지 길이라도 밝혀줄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생각할 뿐.’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한 막연함이라도 좀 걷혔으면 했다.

지금도 부작용과 고통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게 됐을 뿐,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니까.

“오빠. 너무 긴장하지 마. 할아버지가 오빠에 대해서 좋게 보고 계셔. 내가 잘 얘기해놨거든.”

“그래.”

장인어른을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정유리의 말이 왠지 묘하게 들렸다.

어쨌든 그만큼 긴장한 티가 났던 모양이다.

강후가 심호흡을 하며, 들뜬 감정을 가라앉혔다. 자신이 주눅들어야 할 만남은 아니기에.

* * *

그라운드 제로에 도착하고서도 한참을 더 깊숙이 들어가고 나서야, K의 구역에 도착했다.

정식 명칭은 ‘유리 랜드’.

이름에는 사연이 담겨 있는데, K가 정유리를 입양하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고 한다.

언뜻 유치해 보일 수도 있는 이름이지만, 사연을 듣고 나면 가슴이 훈훈해진다.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K의 구역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범위는 정말 넓었다.

K는 헌터 치안청과 정화 길드에 많은 각성제와 치료 약제를 납품하고 있다.

사실 독점에 가까운, 그것도 대규모 공급이다 보니 이렇게 재배 영역이 넓은 것도 이해가 갔다.

슬쩍 둘러보기만 했는데도, 안에서 일하고 있는 일꾼들의 수가 100명은 넘어 보였다.

게다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별도로 고용된 가드도 그만큼 있었다.

정문의 입구 앞에서 내리자.

강후 만큼이나 무미건조한 표정을 한 남자가 걸어와서는 인사를 건넸다.

먼저 정유리에게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그녀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형서야! 오랜만?”

“어서 오세요, 아가씨.”

“동갑인데 그냥 편하게 유리라고 부르라니까!”

“제가 모시는 주인님의 귀한 분이신데, 안 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응하기 어렵습니다.”

“아무튼 우리 왔어! 이분은 선규 오빠! 오늘 할아버지를 만나게 될 손님이야!”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문형서라고 합니다.”

강후가 문형서의 목례를 가볍게 받았다. 달리 악수를 청하지는 않았다.

문형서.

강후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보아하니, K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하는 심복으로 보였다. 아마 여기에도 사연이 있을 것이다.

“형서는 나랑 할아버지가 자신보다 더 신뢰하는 친구야. 오빠도 너무 경계 안 해도 돼.”

정유리의 설명 덕분에 문형서의 특성은 빠르게 파악이 끝났다.

아마 K와 그의 부인, 그리고 정유리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을 것이다.

보통 이런 외곬 성향의 심복은 세상의 모든 이들을 의심한다.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한다.

하물며 손님으로 온 강후가 예외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문형서가 챙겨온 탐지기를 바로 강후에게 들이댔다.

“보안 절차가 있습니다. 별도의 사진을 한 장 촬영할 것이고, 모든 무기는 맡겨주셔야 합니다.”

“얼마든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K가 외부인에 대해서 꼼꼼하게 체크하는 것은 오히려 잘하고 있다고 박수를 쳐 주고 싶었다.

느슨한 관리가 빈틈을 만들고, 그것이 변수가 된다.

K가 만약 외국으로 납치를 당한다거나, 범죄 조직의 손아귀에 들어간다면?

그때부터 국내의 약초 공급 판도가 뒤바뀌게 될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도 무주공산이 되겠지.

진행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사진 촬영도 입구에 설치된 카메라에 의해 바로 끝났고, 강후는 들고 있던 무기를 잠시 맡겼다.

검색 내내 별말이 없어서, 조용히 상황이 흘러갈 줄 알았는데.

중간에 문형서가 강후를 쓱 쳐다보더니, 아까 하지 못했던 말을 마저 덧붙였다.

“노파심에 말씀드립니다만, 마스터 K에게 아주 작은 무례라도 범하지 마십쇼. 아시겠죠?”

“무례인지 아닌지는 마스터 K가 판단할 문제인 것 같은데. 정말 ‘노파심’이군.”

살짝 선을 넘은 듯한 경고에 강후가 웃으며 받아쳤다.

원래 저런 외곬 성향의 심복이 보는 시야가 좁아서, 정작 자기가 무례를 범하곤 한다.

물론 본인은 모른다. 그래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싸움으로 비화하기도 하고.

“조심하시란 얘깁니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물러서지 않고 받아쳤다.

정유리가 갑자기 험악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는.

짜악!

재빨리 문형서의 등짝을 후려쳤다. 나름 상황을 풀기(?) 위한 그녀의 재치였다.

“형서야, 로봇처럼 안내용 멘트 반복 재생 그만하고 얼른 가. 오빠랑 알아서 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가씨.”

강후가 문형서의 뒷모습을 보며 그의 성좌 정보를 스캔했다.

계약 성좌가 다섯이 있다.

이 정도면 레벨을 아무리 낮게 잡아도 400은 된다.

게다가 ‘성창의 투사’라는 성좌와 계약을 맺은 것을 보니, 창술계로 보였다.

아마 재능이 있기에 이렇게 특정 직업군에 특화된 성좌가 붙은 거겠지.

다만 오늘 만난 자리에서는 그가 무기를 들고 오지 않아, 정확히 가늠해 보진 못했다.

“미안해, 오빠. 원래 형서가 지나치게 조심하고 신중한 구석이 있어서.”

“사과할 필요 없어. 각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지. 나는 나대로 할 말을 한 거고.”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마워.”

“선만 안 넘으면 뭐, 한쪽 귀로 듣고 흘려줄 수 있는 말이지. 신경 쓸 것 없어.”

진심이었다.

문형서의 말이 살짝 기분 나쁘긴 했지만, 마음에 담아두지는 않았다.

다만, 아주 묘한 느낌이지만.

문형서가 자신에게 보였던 날 선 반응이 ‘질투’는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럴 수도 있잖은가.

문형서가 정유리에 대해 마음이 있다면, 처음으로 함께 온 남자가 신경이 쓰일 법도 하다.

‘하여간 캐릭터 확실하군.’

강후가 다시금 문형서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꽤 꼴통 같은 캐릭터라 자주 기억이 날 것 같다.

* * *

K와의 만남은 바로 이뤄졌다.

그의 연구동으로 보이는 건물 1층에 별도로 마련된 응접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우리 손녀!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나?”

“고생은요! 할머니가 리무진 준비해 주셔서, 정말 편안하게 오빠랑 타고 왔어요.”

“어쩐지 아침에 내 통장에서 갑자기 돈이 빠져나가드니만…….”

“엥? 할머니 돈으로 결제한 거 아니었어요?”

“내 돈이 어디 내 돈이냐? 네 할머니 돈이지.”

“푸핫! 할아버지가 당했네, 당했어!”

“그래. 이 친구가 바로 정선규라는 젊은이지?”

“네! 선규 오빠예요! 오빠, 할아버지야! 보통 마스터 K라고 많이들 부르지!”

“반갑습니다. 정선규입니다.”

강후가 K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 대한 개인 정보는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어서, 경지를 가늠해 볼 수 없다.

그의 레벨에 대한 정보도 언급된 바가 없었다. 뉴스를 뒤져봐도 전부 추측성 기사뿐이었다.

그의 성좌 정보를 보니, 10개가 넘었다.

이 정도면, 최소로 잡아도 500 이상이다. 그것도 보수적으로 봐서 그렇고, 훨씬 더 높을 것이다.

“…….”

“…….”

서로 간에 잠시 침묵이 오갔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강후는 K의 시선에서 높은 파도가 밀려오는 압박감을 느꼈다.

직관, 통찰력에 특화되어 있고, 약간의 신기까지 곁들여 있는 사람을 마주할 때의 느낌이랄까?

그래, 영적인 느낌이 강한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기분이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기에, 그래서 더 오묘함을 느끼게 되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흥미로운 친구군.’

강후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K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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