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마스터 K (1)
* * *
세상에 공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강후 역시 불로소득인 돌림판이 마음에 들었다.
꽝이 없는 돌림판.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문장이다. 뭐가 나와도 이득이라는 것 아닌가.
허공에 홀로그램처럼 활성화된 돌림판은 촘촘한 간격으로 수많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몇 개만 대충 짚어보자면.
【주황색 마석 5개】
【랜덤 스킬북 1권】
【마력 스탯 75 증가】
【레벨 1 상승】
이런 것들이었다.
“마력 스탯 상승이 나오면 버려야겠는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야만의 시대 효과를 봐야 하기에 마력이 오를 수 있는 여지는 원천봉쇄해야 한다.
어쨌든 어떤 것이 나와도 이득이라 부담은 없었다.
생각을 깊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만큼, 강후가 바로 돌림판을 돌렸다.
돌림판이 화려한 조명을 비추며 – 강후는 관심도 없었다 - 스스로 돌아가는 동안.
강후는 잔뜩 쌓여 있는 성좌 메시지에 눈을 돌렸다.
워낙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 그런지, 성좌들이 관심을 보인 내용도 확인하지 못했던 상태였다.
일단 처음 보는 이름의 성좌 서른 정도가 소규모의 후원을 해 왔다.
대부분 성력 부담이 가장 적은 경험치 버프 후원이었는데, 티끌 모아 태산이라 나쁘진 않았다.
성좌들은 신중하다.
저렇게 자기 존재를 알려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후원만 해 놓고, 헌터를 유심히 지켜본다.
한 헌터에게 이끌려 성력을 후원해 주기 시작하면 그만큼 성력이 ‘매몰’되게 된다.
게임으로 따지면 아이템이나 스킬 세팅에 많은 비용을 투자해서 접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
헌터에게 투자하면 할수록 그에게서 빠져나오는 것이 큰 손해가 되기 때문에…….
의미 있는 투자는 신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간보기 식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레벨 100에 맞춰, 관심을 보인 신규 성좌가 서른이면 시작은 좋네.’
괜찮은 시작이었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레벨 100이 됐을 때, 새로 모습을 드러낸 성좌도 서른쯤 됐으니까.
물론 더 높은 케이스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장시환과 출발선은 같은 셈. 이쯤이면 성공이다.
그때.
【성좌 ‘황야의 전략가’가 당신에게 정식으로 제안합니다.】
【내가 메인 성좌가 아니어도 좋다. 그저 내가 가진 특전을 계약자인 네가 누리게 하고 싶다.】
“…….”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연인이 있는 남자에게 날 사랑해 주지 않아도 좋으니, 곁에만 있게 해 달라는 느낌이랄까?
계약자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성좌의 힘만을 누리게 해 주고 싶은 것이다.
보통 서열이 낮은 성좌가 매력적인 계약자와 함께 하기 위해서, 이러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황야의 전략가는 그래도 대성전 안에서 200위 안에 들어가는 성좌였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매력적인 다른 계약자를 찾아, 그의 메인 성좌가 될 수 있단 얘기다.
메인 성좌가 되면, 계약자의 성장과 더불어 성좌의 격(格)도 같이 올라가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가치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게다가 특전을 제공한 이상, 메인 성좌나 다름없는 관계가 이루어져 계약자를 버릴 수도 없다.
성좌의 일방적인 관심과 사랑.
강후로서는 얼떨떨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네가 가진 전투에 대한 의지, 그리고 전략과 전술, 그 모든 것을 높게 평가한다.】
【그저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해서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대성전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차원 강탈자도 충분히 거물로서 자신과 함께하는데, 이렇게 또 네임드 성좌가 하나 더 붙는 걸까.
내색은 안 했지만.
가슴은 떨렸다.
앞서 강후가 죽였던 헌터로부터 강탈한 성좌들.
그들도 황야의 전략가처럼 계약자에게 ‘을’의 관계로 예속된 것이긴 했다.
강후가 강탈할 수 있는 성좌는 정식 계약이 된 성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해결사를 죽이고 얻은 네 성좌 중에서 하나를 제외한 셋은 예속된 성좌다.
하지만 이상하진 않았다.
격이 높은 성좌는 아니어서다.
오히려 해결사의 실력을 보고, 먼저 달라붙어 대리만족이라도 누리고 싶었을 것이다.
마약왕 같은 성좌가 딱 해결사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었을 성좌였다.
【어찌 생각하느냐?】
초조해졌는지, 황야의 전략가가 살짝 채근하듯 강후에게 물었다.
그녀의 성좌 특전이 자신과 아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나, 있으면 무조건 좋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 부분은 차원 강탈자도 뭐라고 할 수 없다. 메인 성좌의 자리가 위협받는 것이 아니니까.
“저는 좋습니다.”
【고얀 놈. 내게는 반말이나 찍찍하더니, 격이 떨어지는 X에게는 존댓말이군.】
조용히 있는 듯했던 차원 강탈자가 툴툴댔다. 아마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원 강탈자와는 처음 만남부터 말을 놔버렸기 때문에 다시 높이기가 껄끄러웠다. 아니, 귀찮았다.
【계약자여. 네 의지를 다시 묻겠다. 계약을 수락하겠느냐? 대답은 대성전에 전달될 것이다.】
“물론입니다.”
【좋다. 대성전에 정식으로 보고를 올리고 계약을 위한 허가를 받겠다. 시간은 좀 걸릴 것이다.】
“감사합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죠.”
【아무렴. 넌 늘 그래왔다.】
【언제부터 봐왔다고 늘 그래 왔다는 거냐?】
【네년이 계약자를 지켜보기 지루해서 잠이 들었을 때도 나는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격이 떨어지니, 할 일도 없는 모양이구나.】
【어디서 개가 짖지?】
때아닌 두 성좌의 말싸움에 강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내 메시지창은 조용해졌다.
아마 자기들만의 공간에서 서로 티격태격하고 있는 것이겠지.
뻔한 예상이지만, 둘은 사이가 앞으로도 좋을 것 같진 않았다.
그림으로만 놓고 보면, 한 남자를 가운데 두고 싸우고 있는 모습이니까.
물러서는 쪽이 지는 거다.
그리고 쉽게 굽힐 생각은 누구에게도 없을 것이다.
* * *
“이거 아직도 돌아가고 있네.”
꽤 긴 시간을 황야의 전략가와 대화를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돌림판의 회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하지만 이제 끝물인지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고.
이내 슬슬 멈출 듯, 말 듯 하면서 보는 사람의 마음을 쪼이는 상황이 이어졌다.
【주황색 마석 1개】
“그건 아니지.”
마음을 많이 비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적으로 형편없는(?) 보상을 보니 고개가 저어졌다.
이왕 얻는 공짜 선물이면 그래도 푸짐한 게 좋을 수밖에!
그렇게 몇 번이고 멈출 것 같은 연출 속에서 강후의 시선을 잡아끌기를 몇 차례.
드디어 멈췄다.
야바위 돌림판에서 얻어낸 공짜 보상은 바로.
【스킬 복사 1회】
【헌터를 상대로 성별, 레벨, 클래스에 상관없이 직접 확인한 스킬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체득하는 과정에서 클래스 불일치에 따른 페널티는 없으며, 효율도 100% 승계됩니다.】
“……대박인데?”
워낙에 요란법석을 떠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 담백하게 말하긴 했지만, 정말 대박이었다.
상태창 한편에 스킬 복사에 관련된 특별창이 추가됐다.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눈에 잘 보이게 자리 잡은 상태.
최고의 결과였다.
이왕이면 네임드 중의 네임드로부터 스킬을 복사하는 것이 효율이 좋을 것이다.
장시환도 괜찮다.
수준급의 흑마법 스킬을 상당수 보유하고 있으니까. 타깃이 될만한 헌터는 많다.
“레벨 100이 되자마자 일이 잘 풀리는 느낌이네.”
강후가 유독 오늘따라 밝고 아늑해 보이는 테라스 밖의 풍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일이 오늘 같으면 참 좋겠지만, 언제든 먹구름은 금방 드리울 것이다.
* * *
다음 날.
서울에서 정유리를 만났다.
윤상미와는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도 한 번 더 통화를 했고, 컨디션은 아주 좋다고 했다.
그래도 신경 써서 간호해 준 것이 효과가 있는 듯해서 기분은 좋았다.
한편으로는 결국 윤상미도 자신과의 일에 엮여 고생한 것이기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번 달 지나기 전에 써야지.”
강후가 지갑에서 꺼낸 골드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스핏파이어 길드의 인증을 받은 골드 카드다. 월 한도 20억 원이니 알차게 써 줄 필요가 있다.
강후는 K를 만난 후, 그에게서 구매할 솔라키움 대금을 이 카드로 치를 생각이었다.
소모품 구매인 셈이다.
헌터는 많은 돈을 벌지만, 그만큼 많은 돈을 쓴다.
그러니 헌터라고 해서 전부 부자인 것은 아니었다.
돈을 안 쓰고 부자가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성장이 정체되고, 결국은 도태될 뿐이다.
보통 많은 돈을 모을 실력을 가진 헌터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 더 열정적이었다.
얼마만 딱 모으고 헌터 생활을 은퇴한다느니 하는 케이스는 그리 흔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마인드인 헌터는 성장이 더디거나, 던전에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오빠!”
반갑게 자신을 부르는 정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면티에 청바지와 가죽 자켓으로 캐쥬얼한 느낌을 낸 그녀가 보였다.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자리여서 그런지, 무난한 20대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복장이었다.
“왔네.”
“많이 기다렸지?”
“전혀. 시간 딱 맞춰 왔네.”
“가자! 차는 미리 준비해 놨으니까 주차장으로 가자!”
“렌트인가?”
“가서 직접 봐봐! 설명하기 귀찮아!”
정유리가 강후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를 보러 가서인지, 정유리는 무척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 설렘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혈육을 만난다는 건,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일이니까.
그녀를 따라 도착한 주차장에는 강후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차가 있었다.
“이거, 안전 리무진인가?”
“응! 맞아! 방탄 처리부터 해서 마석과 연동한 자체 방어 결계 시스템까지 갖췄지!”
“……비쌀 텐데.”
“괜찮아. 할머니가 타고 가라고 보내주신 차거든! 아, 기사님! 같이 갈 손님 데리고 왔어요!”
정유리가 정신없이 인사를 나눴다.
운전기사로 보이는 남자도 헌터가 틀림없어 보였고.
동행할 것으로 보이는 뒤의 차에는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은 경호원이 보였다. 그들도 헌터다.
‘도대체 누구지?’
강후는 완전하게 베일에 가려진 인물인 정유리의 ‘할머니’가 누군지 궁금했다.
이 정도 세팅의 안전 리무진은 걸어 다니는 집 한 채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가격이 비싸다.
사실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운전에 들어가는 유지비가 문제다.
이 모든 세팅을 유지하고 그라운드 제로까지 가려면, 주행 한 번에 9천만 원은 족히 쓴다.
결계 유지에 활용한 마석은 전부 폐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재탕도 안 되고, 다른 것으로도 대체가 안 되는 만큼 깔끔하게 길에 버리는 돈인 셈이었다.
“유리야.”
“응?”
“할머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을까.”
어지간해서는 궁금한 기색을 잘 드러내지 않는 강후지만, 이번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정유리의 가족 관계에 살짝 ‘무섭다’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할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 일대를 꽉 잡은 마스터 K고. 할머니는 그 이상의 재력을 가진 헌터.
둘을 합친다면 영향력이 상당한 부부가 나올 것 같았다.
잠깐 생각에 잠긴 듯한 정유리가 강후의 표정을 보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뭔가 대답이 나올 것 같은 입술에 강후의 눈빛이 반짝이자, 정유리가 피식 웃더니 대답했다.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