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해결사 (1)
* * *
정말 많은 네임드를 보았다.
신태석도 특별한 게 아니라, 그중의 일부라고 말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신태석의 옆에 있는 여성이 눈에 익는다 싶어서 계속 살폈더니, 닮은 사람이 떠올랐다.
이선희.
일전에 가평역에서 질 나쁜 놈들에게 해코지를 당할 뻔했던 것을 구해 주었던 여자.
그녀와 비슷하게 생긴 여성이었던 것이다. 물론 동일 인물은 아니었다.
이선희는 지금부터 1년 후쯤 각성하고, 신강후에게 적당히 조력자 포지션이 되는 원작 인물이다.
에메랄드색 머리와 눈가에 길게 새겨놓은 십자가 타투가 인상적인 여자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아직 일반인이니까 딱히 이슈라고 할 것도 없겠지.’
요즘 인맥 욕심이 생기다 보니, 이런 인연도 허투루 생각하지 않게 되는 강후였다.
이번에 반세영과 전세혁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어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민수현을 구한 후, 이현석과 인연의 끈을 굳게 매듭지어 놓은 이유도 마찬가지.
정화 길드, 더 나아가 열세 개의 별은 자신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적이 아니다.
그들이 ‘멍청한 빌런’이라면 좋겠지만, 원작의 꼼꼼한 조형은 놈들을 똑똑한 빌런으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신에 준하는 힘을 가진 것이 아닌 이상, 열세 개의 별을 혼자 상대할 순 없었다.
‘그만큼 열세 개의 별에게는 진심이었지. 세상을 구할 영웅의 집단이니, 멋지게 만들고 싶었어.’
강후가 원작자로서 살았던 때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결과적으로는 악당에게 공을 잔뜩 들여놓은 셈이 됐다.
물론 그 이상으로 공을 들인 신강후의 몸으로 이제 판을 깨려고 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선희는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당장에 어떻게 써먹을 수는 없을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순리대로 그녀가 각성하면 인연이 만들어질 일도 자연스럽게 생길 것이다.
강후가 최종적으로 구매할 무기 아이템을 결정한 것은 그로부터 3시간이 흐른 후였다.
처음에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는 국내보다는 해외 마켓으로 가 보는 게 나을까 싶었지만.
막상 꼼꼼하게 살펴보기 시작하니, 구미가 당기는 무기 아이템이 꽤 많았다.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단검류의 물품이 썩 많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헌터들의 관심도 상대적으로 적었다.
아무래도 근거리 계열의 헌터는 장검, 대검을 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단검을 쓰는 직업군은 대부분이 암살자고, 암살자 직업군은 헌터 비중이 썩 높진 않았다.
흥정 없이 딱 1,000억 원.
강복화에게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VIP 마켓 관리자의 입회 아래 거래가 진행됐다.
1,616억 원의 잔고가 순식간에 616억 원으로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든든한 금액이었다.
이번 미로 던전 공략이 얼마나 큰 이득이 됐는지 새삼 느끼게 됐다.
2등급 무기 아이템을 사고도 넉넉하게 금액이 남아 있으니 말이다.
‘내친김에 400억 원 정도를 더 모아서, 2등급 아이템 하나를 더 사는 것도 괜찮겠어.’
그래서인지 욕심이 났다.
1,000억 원이라는 돈이 더 이상 불가능한 금액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다.
이래서 헌터들이 성장하면 할수록 씀씀이가 커지고, 경제 관념이 커진다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욕심은 자꾸 위를 보게 만들고, 그 위에 있기 위해선 그만큼의 품격과 명예, 돈을 요구한다.
‘감회가 새롭네.’
강후가 완전하게 자신의 소유로 넘어온 2등급 무기 아이템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보랏빛 광채가 나는 터라 주변의 주의를 끌 법도 하지만, 다들 관심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곳이 VIP 마켓이다.
2등급 아이템 하나쯤 구매하는 것은 이들에게는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이슈인 셈이다.
강후가 아이템을 살폈다.
【타락한 신념 - 무기】
【등급 : 2등급】
【근력 +350】
【체력 +100】
【항마 +100】
【맷집 +50】
혈루보다 근력 150, 체력 100, 항마 50이 높은 단검이다.
가격 차이가 나는 만큼, 그 값을 충분히 하는 녀석이었다.
특히 올리기 까다로운 항마 스탯을 더 끌어올려 주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스탯은 만족스러운 부분들 중에서 ‘일부’일 뿐이다.
시선을 좀 더 내렸다.
1등급부터 3등급 아이템까지 부여되는 ‘특수 효과’가 있다. 여기서 아이템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혈루의 경우, 피의 맛과 탐식이라는 효과가 있었다.
【검은 눈물 – 모든 스킬의 효율이 10%, 대미지가 20% 상승합니다.】
“흠.”
탄성을 터뜨리려다가.
사람들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감정을 억누른 티가 나는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스킬 종류와 개수가 다양한 강후에게 검은 눈물 효과는 시너지가 정말 좋았다.
이를 테면 현재 한 번에 12m를 이동할 수 있는 도약 스킬은 검은 눈물 효과에 13.2m가 된다.
수많은 헌터가 1m, 아니 50cm를 더 이동하기 위해 스킬 숙련도를 갈고 닦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큰 변화였다.
심지어 별도로 노력할 것도 없이, 아이템 착용만으로 이뤄지는 손쉬운 변화다.
검은 눈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지만, 특수 효과는 아직도 두 개가 더 있었다.
【왜곡 각성 – 동일 계열의 무기를 타락한 신념을 활용해, 스탯 일부를 흡수할 수 있습니다.
총 5회의 흡수가 가능하며, 해당 무기의 총 스탯량이 높을수록 흡수량이 증가합니다.
흡수하려는 무기에 타락한 신념을 가져다 대면, 왜곡 각성이 활성화됩니다.】
‘무기에 무기를 먹이는 구조네.’
게임에서 자주 본 듯한 모델이 떠올랐다. 소위 ‘먹인다’라는 표현을 쓰는 딱 그런 형태다.
동일 계열이라고 말했으니 다른 단검을 흡수시켜야 할 터.
기회가 총 5회로 제한되는 만큼, 이왕 먹일 거면 좋은 무기를 먹이는 게 좋겠지 싶었다.
물론 신중해야 한다.
왜곡 각성을 도전한답시고, 1등급 무기 아이템을 먹일 수는 없으니까. 그건 오히려 손해다.
【타락 결의 – 세트 효과 ‘타락 결의’를 가진 아이템 5종의 위치를 표시합니다.
해당 아이템이 던전에 있을 때만 표시가 가능하며, 특정인의 소유 시에는 알 수 없습니다.
아이템 5종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단검, 흉갑, 목걸이, 반지 2종.】
흥미로운 내용의 연속이었다.
요 근래 세트 효과에 관심을 부쩍 갖기 시작한 터라, 더욱 시기적절한 특수 효과였다.
단검 ‘타락한 신념’은 이미 갖고 있는 상태니, 남은 4종의 행방을 찾아야 하는 셈이다.
상세 툴팁을 살피자, 나머지 아이템의 위치가 표시됐다. 전부 던전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었다.
‘너무 좋은데?’
강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기본 스탯 측면이나 검은 눈물 효과에서 합격점을 충분히 받을 만한 단검이지만.
여기에다가 왜곡 각성과 타락 결의의 잠재적 가치까지 더해지니 더욱 매력적인 아이템이 됐다.
아마 타락한 신념이 단검이 아니라 장검, 대검이었다면 진즉에 팔렸을 것이다.
암살자 직업군이 많지 않아, 단검 수요가 적다는 것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있을까.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니, 타락한 신념의 고유 광채인 진보랏빛도 마음에 쏙 들었다.
1등급 무기 아이템으로 바꿀 일이 생기지 않는 한, 당분간 이 녀석과 연인처럼 붙어 지낼 듯했다.
아울러 기회가 되면, 타락 결의의 남은 아이템 4종을 찾으러 떠날 계획도 세웠다.
세트 효과 달성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 * *
대전으로의 이동은 VIP 마켓을 나오는 즉시 이뤄졌다.
마침 KTX 서울역행 막차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굳이 미룰 것이 없어 바로 KTX를 탔다.
- 일단 던전 위치는 문자로 보냈어요. 제가 대전역으로 오빠 데리러 갈게요.
“굳이? 거기서 쉬고 있어. 내가 내려서 적당히 택시 타고 갈 테니까.”
- 괜찮겠어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 날이 어두우니까 그렇죠.
“그쪽은 어때?”
- 주변에 24시간 계속 돌아가는 생산 공장들이 있어서 아주 어둡진 않아요.
“그럼 거기 있어.”
- 알았어요. 밥은?
“들어가기 전에 가볍게 샌드위치나 먹자고. 편의점에서 사서 갈 테니까 따로 살 것 없고.”
- 난 치킨 샌드위치!
“접수 완료.”
대전역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서 윤상미와 짧은 통화를 마쳤다.
둘 다 야행성인 데다가, 잠이 많은 편이 아니라 피로감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강후는 레벨 100이 코 앞인 만큼, 빨리 레벨 100을 찍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한편으로는 VIP 마켓에서 구매한 타락한 신념을 던전에서 써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 * *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역 앞에서 안전 택시에 탑승, 윤상미와 접선하기로 한 던전으로 향했다.
안전 택시가 엄청 비싸긴 하지만, 택시 면허를 발급받은 ‘헌터’가 직접 운전하는 만큼.
위급 상황 시의 대처라던가, 해당 교통수단에 대한 안전은 확실히 보장된 것이기도 했다.
“음…….”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대전역에서 내린 직후.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내내, 윤상미에게 건 전화가 한 번도 연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장소야 확정적이니 예정대로 이동하면 그만이기는 하지만.
평소 같았더라면 신호가 제대로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는 그녀의 스타일과는 너무 달랐다.
피곤해서 자고 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스마트폰을 던져두고 다른 일을 할 것 같진 않았다.
‘그냥 좀 쉬고 있는 거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녀가 어쭙잖은 놈들에게 휩쓸려 당할 만큼 실력이 없는 헌터는 아니잖은가.
그로부터 10분 후.
현장에 도착했다.
주요 도로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던전으로 이동 중이던 강후가 잠깐 자리에 멈춰 섰다.
윤상미와 만나기로 한 던전 방향에서 묵직하고 축축한, 아주 음침한 기운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분명 뿌리 자체는 마력이 맞는데, 그 마력의 성질 자체가 대단히 어두웠다.
이런 경우는 보통 한 가지밖에 없다. 흑마법 스킬에 능통한 흑마법사 계열의 헌터가 있을 때다.
예전에 상대했던 김목현과 같은 허접한 흑마법사 말고.
레벨 300 이상의 수준급 흑마법사가 곁에 있을 때, 이런 기운이 종종 느껴지곤 했다.
숨길 수 없는 기운이라고 하면 표현이 맞을까?
꽃 옆에 있으면 꽃향기가 나듯, 흑마법사 헌터 옆에 있으면 마력의 성질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삑.
강후가 통화 버튼을 다시 눌렀다. 윤상미에게 걸어보는 전화였다.
신호음이 들리고.
이어서 반대편 어딘가에서도 벨소리가 들린다. 윤상미답게 최신곡을 세팅해 둔 벨소리였다.
하지만 받지 않는다. 일부러 받지 않는다기보다, 받을 수 없는 상황인 거겠지.
“…….”
강후가 차분하게 걸었다.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은 맞지만, 적어도 목숨을 잃거나 그런 것은 아닌 듯했다.
거리를 좁혀 가니, 흑마법의 기운 외에도 윤상미 고유의 느낌도 같이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놈일까.
누구기에 윤상미를 전투 불가의 상황으로 만들어 놓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분명히 녀석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윤상미는 딱히 주목적이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윽고 현장에 도착한 순간.
윤상미를 기절시킨 상태로 나무 기둥에 꽁꽁 묶어둔 채 팔짱을 끼고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남자와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래, 이거야. 널 기다리고 있었다. 반갑군, 반가워. 후후후.”
강후의 등장에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심지어 얕은 미소도 지었다.
하지만.
“또라이냐? 실실 쪼개는 것부터 병신 같네.”
강후의 독설이 그대로 꽂혔다.
필터링이라고는 전혀 없는, 역겨운 불청객에 대한 순도 100%의 적개심이었다.
그 순간, 강후는 남자의 정체를 반 박자 늦게 떠올리며 기억을 되짚을 수 있었다.
바로 해결사.
원작에서도 빌런으로 조형된 적 있는 또라이 중의 또라이였다.
차소희보다 더 골치 아픈 놈이 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