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99화 (99/304)

99화 가치 증명 (6)

* * *

1,616억 원.

주황색 마석까지 전부 처분하고 난 다음에 강후의 통장에 찍힌 잔고였다.

2등급 아이템이 보통 1,000억 원 선에서 거래되는 것을 생각하면 구매는 문제없었다.

드디어.

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아이템 구매를 현실화할 수 있게 됐다.

“헤어지려니까 아쉽다, 오빠.”

“또 보면 되지.”

“던전 없으면 안 볼 거잖아?”

“그건 부정 못 하겠군.”

강후와 헤어질 때가 되자, 반세영이 아쉬움이 잔뜩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그런 감정은 숨길 법도 한데, 반세영은 자신에게 감추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세혁 오빠에게 좋은 던전으로 골라서 잘 뜯어와 볼게.”

“세영아, 나 듣는다.”

“도와줘, 오빠! 응?”

“체통을 지켜, 인마!”

“호호호.”

반세영과 전세혁 사이에 오고 가는 농담에 강후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저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물론 자신에게는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기는 했다. 농담이 익숙하지 않은 편이다.

어쨌든 강후는 반세영과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전세혁에게는 부산에 있는 VIP 마켓을 소개받았다.

500억 원 이상을 갖고 있음을 인증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마켓이라고 했다.

일종의 잔고 검증인 셈인데, 그만큼 양질의 물품이 많아 추천할 만하다고 했다.

‘VIP 마켓은 부산이 알아주기는 했지. 해외에서 들어오는 아이템이 많다 보니.’

원작에서도 있었던 설정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발품만 잘 팔면, 쓸만한 2등급 무기는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단검이 있을지가 관건이다.

1시간 후.

저녁에 열리는 VIP 마켓 오픈 시간까지 기다리는 동안, 강후는 인근의 호텔에 들어와 있었다.

윤상미에게 연락을 넣었다.

레벨 100 달성을 마무리하려면, 지금으로서는 윤상미가 가장 빠른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전화를 기다렸던 걸까?

신호가 한 번을 채 끝나기도 전에 윤상미가 전화를 받았다. 실수로 받았나 싶을 정도로 빨랐다.

- 어, 오빠? 생각보다 연락이 빠르네요?

“그러게. 예상했던 시간보다 볼 일이 일찍 끝나서. 던전 공략 건은 아직도 유효하지?”

- 뭔 말이에요? 이봐요, 정선규 씨! 당신이랑 가려고 비운 자리인데 유효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뭘 또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

- 큭큭. 누가 진지하게 받았는지 모르고 하는 말이죠?

“…….”

생각해 보니 윤상미는 장난을 친 게 맞았다.

마모된 감정 때문일까. 그 속에 담긴 유쾌함과 장난을 읽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쩔 수 없는 인간 신강후의 특징이기도 하기에, 강후가 체념한 듯 고개를 휘저었다.

그리고 화제를 돌렸다.

“여기 부산에서 아이템 하나만 사고 바로 KTX 타고 올라갈 거야. 어디로 가면 되지?”

- 대전 외곽이에요. 장소는 오빠가 출발할 때, 알려줄게요.

이래저래 요즘 대전을 자주 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수도권과 가깝고 치안이 나름 좋은 편이라, 출입이 꺼려지지는 않았다.

대전 일대를 구성하고 있는 세력 판도만 놓고 보면 언제든 폭발해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지만.

팽팽하게 구축된 힘의 균형 덕에 역설적으로 대전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었다.

“새벽쯤에 연락할게.”

- 알았어요. 잠이나 좀 자둬야겠네.

“컨디션 관리 잘하고.”

- 기다릴게요.

“응.”

짧은 통화가 끝났다.

던전 공략에는 문제가 없을 듯하니, 레벨 100의 달성은 확정적이다. 시간문제인 셈이다.

이어 전세혁에게서 문자 하나가 왔다.

VIP 마켓의 위치와 관련 사항에 대한 꼼꼼한 안내였다.

강후도 다 아는 내용이었지만, 다시 한번 숙지했다.

잔고 500억 원 이상을 인증할 것. 그리고 VIP 마켓에서는 3등급 이상의 아이템만 취급한다는 것.

한 마디로 여유 있는 손님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다. 의외의 인연을 만날 수도 있겠지.

“지금쯤이었던가.”

문득 기억 하나가 떠오른 강후가 객실에 있는 데스크탑으로 키워드를 검색했다.

바로 ‘심판의 지옥’.

곧 정화 길드에서 모집 공고를 올릴 것으로 추정되는 대규모 던전 공략에 관한 건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모집 글과 관련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서두를 장식한 것은 볼 때마다 기분이 묘한 존재, 바로 장시환이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헌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부족하지만 정화 길드의 대표 자리를 맡고 있는 장시환이라고 합니다.]

[3개월 전에 그라운드 제로에서 발견된 거대한 차원문은 저희들을 미지의 세계로 인도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곳을 심판의 지옥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죽음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곳, 이곳은 분명 지옥이 틀림없었습니다.]

언뜻 장시환의 말을 들어보면, 던전에 대해 상당히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달랐다.

다분히 의도적인 멘트였다.

도전하고 모험하기를 즐기는 헌터들의 호기심과 욕구를 자극하기 위해, 겁을 먹은 ‘척’한 것이다.

위험을 두려워하기보다, 자극을 느끼며 불나방처럼 달려들 용병이 정화 길드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총알받이를 구하는 공고지만, 그 본질을 파악한 헌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전혀 없을지도.

[이 거대하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는 저희 정화 길드 혼자만 감당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도전할 기회를 헌터 여러분들에게 제공하고, 시련과 고난을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싶습니다.]

[기다립니다. 저희 정화 길드와 함께 심판의 지옥 공략에 참여하실 영웅을 모집합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영상의 덧글은 작업을 친 건지, 아니면 진심인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온통 장시환 찬양 일색이었다.

정화 길드가 독식해도 되는 기회를 나눠준 것이 정말 대단하다는 낯간지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화 길드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너무 좋기에 그럴듯하게 들리는 구석도 있었다.

“목적이 뻔히 보이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유혹이지. 눈 뜨고 기연을 내주고 싶지도 않고.”

강후의 목표는 확실했다.

이후, 심판의 지옥 공략에서 장시환은 기연을 통해, 또 한 번의 성장을 경험하게 된다.

매우 의미 있는 기연을 두 개나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원작에서 주인공의 성장을 위해, 작가가 대놓고 만들어준 화려한 무대였다.

이것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당연히, 무조건 빼앗는 게 인지상정.

하물며 이득을 볼 대상이 최종적으로 적이 될 녀석이라면, 더더욱 포기할 수 없었다.

“면접이 문제군.”

강후가 인상을 찌푸렸다.

외부에서 모집된 용병은 반드시 면접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인 정보 일부가 넘어가게 되고, 모든 기록이 데이터베이스에 남을 터.

만약 공략에서 두각을 드러내게 되면, 정화 길드에서 관심을 갖게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장시환과 채관형의 관심도 함께 받게 되겠지. 그래서 신경이 쓰이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도 일단 고.”

강후가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여, 모바일 신청서를 넣을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가명과 사진, 그리고 약간의 경력 소개와 레벨 정보만 담으면 됐다. 클래스 정보도 있으면 좋고.

나머지는 면접 과정에서 담당자들이 판단할 몫이다.

“너무 적게 쓰면 서류 심사에서 탈락할 수도 있으니, 스킬 종류를 좀 넉넉하게 적어줄까.”

패를 너무 숨기면, 아예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할 수 있다.

스킬 정보 일부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 어차피 평생 스킬을 안 쓰고 살 것도 아닌 만큼.

강후가 공개해도 괜찮겠다 싶은 스킬 목록을 쭉 적기 시작했다.

아마 서류 면접관들은 십중팔구 이 내용을 믿지 않을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기겠지.

그게 강후가 노리는 점이었다. 그럼 궁금해서라도 실제 면접 장소에 자신을 부를 것이다.

* * *

그 시각.

윤상미가 감지할 수 없는 범위 밖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그녀의 뒤를 밟고 있었다.

‘강한 힘을 가진 것은 맞지만, 그에 맞는 기민함까지 갖추진 못했군.’

적정 거리를 유지하니, 윤상미는 자신이 미행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그러는 사이에 누군가와 통화를 마쳤고, 남자는 본능적으로 연결을 직감했다.

남자의 정체는 해결사였다.

윤상미에게 짙게 묻어나는 마나의 흔적은 분명 김천 해방구에서 파악한 마나의 흔적과 일치했고.

그 정도로 가까운 관계라면, 이번 통화의 상대방도 그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림은 간단해진다.

기다리면 된다.

윤상미를 감시 거리 안에만 두고 있으면, 머지않아 상대가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확신했다.

‘흥미로워. 얼른 상대해 보고 싶군. 간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는 건, 녀석이 처음이니까.’

해결사의 입꼬리가 어색하게 올라갔다. 그 나름대로는 최대한으로 이끌어낸 감정 표현이었다.

빨리 한 판 붙고 싶었다.

신준호의 당부사항이 있어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바꿔 말하면 죽이지만 않으면 됐다.

그 안에서는 실컷 힘겨루기를 해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

해결사가 혀끝으로 입술을 핥으며,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겼다.

여전히 윤상미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기척을 숨기는 데 특화된 자신이다. 알아차리면 그게 더 이상할 일이다.

* * *

그날 밤.

‘깐깐하긴 하네.’

강후는 입구에서부터 잔고를 확인하고 얼굴 촬영까지 진행하는 VIP 마켓의 절차를 거친 뒤, 마켓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VIP 마켓은 명성에 걸맞게 10층 빌딩을 통째로 썼다.

빌딩의 소유주이자, 동시에 VIP 마켓을 운영을 담당하는 사람의 이름은 강복화라고 했다.

요즘 세대 같은 이름은 아니고, 어림짐작으로도 중년의 나이는 될 듯한 여성의 이름.

강후에게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원작에서 언급된 적은 없는 이름이 분명했다.

어쨌든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에서부터 외국인 헌터의 모습이 제법 보였다.

일본인, 중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독일에서 온 헌터도 제법 보였다.

특히나 마법계로 보이는 헌터가 많았는데, 판매 아이템 중 마법계 아이템의 비중이 높았다.

고객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어보니, 강복화가 해외에서 물건을 잔뜩 떼왔다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막후의 대상인 같은 콘셉트인데…… 누구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VIP 마켓에서 판매할 아이템을 해외에서 공수해 오려면, 어지간한 자본으로는 안 된다.

물론 전액을 주고 사 온 것은 아닐 테고, 대리 판매 형식으로 가져온 것이기는 하겠지만.

결국 이것도 감정가 20%를 보증금으로 걸어야 하기에 보통 비싼 게 아니었다.

2등급 아이템 하나를 구해와서 대리 판매를 하려면, 보증금 200억을 주고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다들 한껏 차려입은 모습이라, 어디를 보아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

그 품격에 맞지 않게 투박한 옷차림으로 온 강후에게 많은 헌터들의 시선이 쏠리고 있었다.

좋게 말해서 쏠린 거지, 나쁘게 말하면 무시하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강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전투는 벌어질 수 있고, 지금의 옷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전투에 특화된 옷이다.

한데 바로 그때.

정면에서 한 남자가 샴페인 잔을 쭉 들이키면서 여성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 주변의 헌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남자와 마주한 모든 헌터가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싶었다.

그래서 흘깃 그의 얼굴을 살핀 순간, 정체가 바로 밝혀졌다.

‘그래. 저런 녀석이 이런 곳에 없으면 섭섭하지.’

정화 길드의 서열 3위.

신태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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