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97화 (97/304)

97화 가치 증명 (4)

* * *

공략에 속도가 붙었다.

미로 던전은 모든 방의 콘셉트가 빨리 공략할수록 보상인 경험치가 증폭되는 구조라서다.

속도감을 요구받기 때문에 무리하다가 죽는 케이스도 꽤 많았다. 부상을 입는 것이야 부지기수고.

기록에 대한 욕심은 바꿔 말하면 죽음의 유혹도 되기에 여간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반세영도 강후와 던전에 가기로 했을 때, 기록에 대한 욕심을 내진 않았다.

버퍼인 박동재가 있어도 힘들었던 ‘속도전’이 강후의 존재로 달라질 것 같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강후를 향한 무한대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고, 오히려 도전해 보고 싶었다.

다음으로 입장한 방은 ‘증식의 방’이었다.

보스 몬스터는 공략 시작과 동시에 던전 중앙에 나타나는데, 이름은 데스 나이트였다.

우리가 판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보는 데스나이트, 그 녀석이 맞았다.

그런데 왜 증식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는가 하면…….

입장하자마자 마주치게 되는 스무 마리의 소형 몬스터, ‘데글린’의 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도마뱀 형태의 녀석들은 시간이 지나면 무조건 두 개로 분열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리고 이 방의 공략을 종료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데스 나이트를 죽여야만 했다.

즉, 데스 나이트를 죽이지 못하면 데글린이 계속 분열을 거듭하며 수를 늘리는 것이다.

정공법은 최대치까지 분열을 유도하고 모조리 잡는 방법이었다.

말이 좋아 정공법이지, 데스 나이트를 처치할 수가 없어 만들어낸 고육지책이었다.

심지어 분열로 만들어진 데글린은 경험치가 제공되지 않기에, 사실상 ‘개고생’이기도 했고.

“오빠, 데글린은 나한테 맡겨.”

“뒤는 안 볼게.”

“응. 오빠 옆에 붙는 데글린은 한 마리도 없을 거야.”

“위치 선정은 괜찮겠어?”

“여긴 생각보다 고점으로 잡을 포인트가 많아. 걱정 마. 위험해질 일은 없어.”

듬직한(?) 반세영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반세영의 명중률은 강후가 그녀에 대해 판단했던 것보다도 훨씬 높았다.

난전 중이라면 몰라도, 자리 잡고 쏜 마탄 중에서 빗나간 경우는 거의 보기 드물었다.

명중률 75%만 넘어가도 명사수 취급을 받는 헌터의 세계를 생각하면, 그녀는 그 이상이었다.

스르르륵.

파앗!

결계 해제와 동시에 강후가 데스 나이트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팽창의 방 공략을 마치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덕분인지 몸 상태는 괜찮았다.

여차해서 몸이 못 버티겠다 싶으면 남은 매드 솔라키움 하나를 씹을 생각이었다.

방법은 다 있다.

끼이익! 키이익!

강후의 존재를 인지한 데글린들이 걸쭉한 침을 흘리며, 양 뒷발에 힘을 싣기 시작했다.

모시는 주인, 데스 나이트를 위협하려고 하는 침입자를 어떻게든 차단하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반세영에 대한 강후의 믿음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타앙!

반세영의 총구가 푸른빛을 뿜으며, 데글린을 저격했다.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날아든 마탄은 데글린 셋의 머리를 날렸다.

데글린 세 마리가 일렬로 서 있던 상황을 완벽하게 노린 반세영의 깔끔한 한 방이었다.

단순히 저격으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꾸드드득.

최종점에서 한 차례 더 폭발을 일으킨 마탄은 강후의 주변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들었다.

‘마탄-마법 스킬이군.’

마탄-마법이라고 불리는 이 스킬은 저격이 성공한 직후에 현장에 마법을 구현해낸다.

마탄의 살상 행위가 끝난 후에 마법이 발동되어야 하므로 상당한 숙련도를 요구했는데.

반세영은 가능한 모양이었다.

강후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도 레벨에 맞지 않는 상당한 실력을 가진 능력자는 맞았다.

‘역시 내 안목이 맞았군.’

강후가 미소를 지었다.

서포트 역할로 제격이겠다는 자신의 첫인상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그녀는 엄호 및 지원에 특화된 거너다. 사용 가치가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강후가 1% 정도 남아 있던 그녀에 대한 불신을 모두 벗어던지고 전력 질주했다.

무조건 데스 나이트만 볼 참이었다.

다만 껄끄러운 부분이 딱 한 가지 있다면.

“…….”

정면에 장승처럼 떡하니 서 있는 데스 나이트의 빈틈이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데스 나이트의 약점은 투구 안이다. 즉, 투구를 벗겨야 전투가 수월해진다.

온몸은 두꺼운 갑주로 보호되고 있기에, 이를 뚫고 빈틈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확실히 쉬운 놈은 아니다.

하지만 잡아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녀석이 보스로서 갖고 있는 패시브 스킬 때문이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령(死靈)의 침묵】

바로 이 스킬이다.

앞으로 자주 마주치게 될 던전의 다양한 콘셉트를 생각하면 꼭 필요한 스킬이기도 했다.

“어디 한 번…….”

까앙!

“크윽!”

프스스스슷!

탐색전 차원에서 데스 나이트에게 정면에서 달려든 강후가 신음과 함께 뒤로 쭉 밀려났다.

데스 나이트가 휘두르는 대검의 힘은 엄청났다.

버텨서 다행이지, 조금만 악력이 약했어도 혈루를 손에서 놓쳤을 뻔한 공격이었다.

파앗!

다시 달려들었다.

전신이 움직이는 하나의 요새와도 같은 데스 나이트의 빈틈을 만드는 방법은 단 한 가지.

움직임을 최대한 많이 유도하는 것이다. 움직여야, 그만큼의 빈틈이 생겨난다.

그렇지 않으면 철옹성처럼 우뚝 솟아 있는 요새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후웅!

까아아앙!

“후우.”

또다시 뒤로 밀려난 강후가 살짝 답답함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방어를 해냈다. 완성형의 탱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타앙! 타앙!

그사이, 중간중간 이어진 반세영의 지원 사격에 강후에게 달려오던 데글린들이 죽었다.

강후는 반세영을 믿었기에 뒤로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왜 사전 브리핑에서 정공법으로 공략을 하자고 했는지는 알 것 같군.’

전세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런저런 꼼수를 시도해도 절대 안 통하는 놈이니, 장기전으로 가자고 말이다.

최대치까지 분열한 데글린을 전부 쓸어 담고, 원거리에서 데스 나이트를 반세영이 저격하는 식.

정공법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게 맞나 싶지만,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 전략이기도 했다.

하지만 엉덩이가 무겁게 앉아만 있는 것이 전략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뚫지 못할 방패처럼 보이는 적일수록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나마 던전은 안 될 것 같아서 포기할 수도 있다고 치자.

나중에 상대하기 어려운, 까다로운 적을 만나도 포기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강후가 전략을 바꿨다.

정면승부는 의미가 없고, 뒤를 노리는 전술은 데스 나이트의 중무장 덕분에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변수를 창출, 정석적인 흐름에 변주를 만들어내는 것이 낫다. 상식을 깨는 것이다.

‘인내가 좀 필요하겠군.’

강후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상식을 깨는 전술이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그전까지는 지극히 상식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끌어가야 한다.

강후는 데스 나이트가 자신의 뻔한 공격 패턴에 익숙해지기까지 반복해서 덤빌 생각이었다.

녀석이 공격 패턴을 학습할 시간을 주는 것이다. 다분히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 * *

5분을 그렇게 싸웠다.

워낙 완력이 좋은 데스 나이트이다 보니, 거듭된 공방전에서 강후는 급격한 체력 손실을 경험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데스 나이트의 대검 공격을 막을 때마다, 팔꿈치와 어깨가 시큰거렸다.

그나마 막아내고 있으니 이 정도지, 대검이 스치기만 해도 몸이 깨끗하게 잘려나갈 판이었다.

실제로 강후가 중간중간 방어의 용도로 이용해 먹은 바위 몇 개는 깨끗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이것들을 한데 모아 돌로 성을 만들어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잘린 단면이 깔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데스 나이트의 움직임에는 전보다 더 많은 여유가 생기고 있었다.

심지어 중간중간 대검을 내리거나, 고개를 까딱이는 식으로 강후를 도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강후는 겉으로는 잔뜩 화난 체를 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나름 실감나는 메소드 연기였다.

그때.

이제는 강후의 패턴이 뻔하다고 여겼는지, 데스 나이트가 공세를 취하며 접근했다.

앞서 강후는 이럴 때마다 뒤로 빠졌다가, 반 박자 느리게 받아치는 패턴을 고수했었다.

데스 나이트도 자연스럽게 패턴이 학습됐고, 강후의 대응을 미리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뒤로 몸을 움찔하는 듯했던 강후가 도약과 함께, 거꾸로 앞으로 돌진했다.

“……?”

흠칫 놀란 데스 나이트의 몸이 어색하게 멈춰버린 사이.

순식간에 데스 나이트의 하체로 파고든 강후가 전력으로 데스 나이트의 발목을 밀어냈다.

축구에서 말하는 슬라이딩 태클이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깔끔한 다리 걸기였다.

“……!”

노림수가 성공했다.

제대로 발이 걸린 데스 나이트가 양팔을 허우적대다 쓰러졌다.

불가항력이었다.

공중제비나 백 덤블링을 할 수 있는 스킬이라도 있지 않은 이상,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당연히 묵직한 움직임이 장점이면서 주 무기인 데스 나이트에게는 없는 방법이기도 했고.

쿠웅!

차가운 지면 위에 누워버린 데스 나이트가 양팔을 휘저어댔다.

순간적으로 놓쳐버린 대검을 잡기 위함이었는데,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이미 눈앞에서 눈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푸우우욱!

“……!”

소리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굴 전체를 보호하고 있는 투구의 시야 확보를 위해 만들어둔 틈새로 단검이 들어온 것이다.

방어할 새도 없이 데스 나이트의 양쪽 눈 뼈가 강후의 혈루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박살이 났다.

푸슈슈슛!

투구 안쪽에서 솟구친 정체불명의 검은 액체가 순식간에 강후의 얼굴 전체를 적셨다.

강후는 이에 아랑곳 않고, 대검을 막 움켜쥐려던 데스 나이트의 손목을 내리쳤다.

비록 갑주로 보호되고 있긴 해도, 모든 압박에서 완벽하게 지켜주는 것은 아니었다.

까강!

이내 놓쳐버린 대검이 데스 나이트의 손에서 멀어졌다.

강후는 그 상태로 데스 나이트의 투구 위쪽을 움켜쥐고, 우악스럽게 그것을 벗겨냈다.

데스 나이트는 벗길수록(?) 약점이 드러나기에 당연한 과정이었다.

“크이이이익…….”

흉물스러운 데스 나이트의 얼굴 전체가 드러났다.

썩어가는 회백색 빛의 해골 사이사이로 수많은 구더기와 정체불명의 애벌레들이 가득했다.

그때.

본능적으로 위험을 직감한 강후가 공격을 이어가려던 동작을 중단하고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다음 순간.

정말, 아주 간발의 차이로 강후가 있던 자리를 데스 나이트의 양손이 훑고 지나갔다.

그 와중에 데스 나이트가 강후의 몸을 잡으려고 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물론 강후의 멋진 대응 덕분에 데스 나이트는 자신의 공격 턴을 잃고 말았다.

이제 강후의 턴이었다.

화악!

데스 나이트의 가슴 위로 착지한 강후가 혈루를 힘껏 치켜들었다.

타앙!

동시에 반세영의 시기적절한 지원 사격이 이어졌다.

그녀는 누운 데스 나이트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조준했고, 마탄은 정확히 타깃을 맞췄다.

덕분에 다시 대검을 움켜쥐려던 데스 나이트의 시도는 또 무위로 돌아갔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물론.

“마이 턴.”

강후에게는 최상의 상황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