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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96화 (96/304)

96화 가치 증명 (3)

“콜!”

반세영의 호응과 더불어 거래가 성사됐다. 적요석이라는 희귀 재료가 걸린 큰 베팅이 된 셈.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강후의 제안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팽창의 방은 반세영이 예전에도 몇 번이나 전세혁, 박동재와 왔던 방이었다.

스탯이 압도적으로 좋은 전세혁도 이 방은 팽창 속도의 절반도 따라가지 못했다.

온갖 가속 버프와 민첩 아이템을 둘러도 안 되는 건 안 됐던 것이다.

특히 데이터로 만들어 기록하기를 좋아했던 박동재는 이런 최종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 레벨 500이 넘어가는 전문 암살자 계열의 헌터가 특화 스킬 정도를 써 줘야 가능하다.

견적이 이렇게 나와 있던 상황이었기에 반세영은 박동재의 안목을 믿었다.

그는 틀린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틀릴 것 같으면 애초에 말도 꺼내지 않았으니까.

[시작합니다.]

스르륵.

이내 팽창의 방으로의 진입 경로를 가로막고 있던 결계가 허물어졌다.

파팟!

동시에 반세영은 앞서 말해 두었던 일당백 포인트로 향했다.

그곳만 선점해 두면 팽창의 방에서의 디펜스는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버티기만 하면 된다.

한편 강후는 가속 상태에 돌입하면서 바로 도약을 전개했다.

그리고 도약의 12m 이동이 끝날 즈음에 바로 그림자 걸음을 써서 다음을 연계했다.

그림자 걸음은 사용하는 순간, 세 개의 그림자가 강후의 몸을 중심으로 앞으로 뻗어져 나간다.

그 자체가 일종의 도약 효과가 있었다. 전방 8m 정도의 지점까지 그림자가 한 번에 쭉 방출되듯 나오는 구조라서다.

도약을 연달아 두 번 쓰면 몸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린다.

하지만 도약, 그림자 걸음, 도약 이런 식으로 연계하면 상대적으로 과부하가 덜 걸린다.

예를 들어 전자의 과부하 수치를 10으로 한다면, 후자는 5 정도만 걸리는 식이다.

강후가 연속적으로 가속 스킬을 스킬과 스킬 사이의 텀마다 밀어 넣었다.

평소 같으면 좋은 선택지는 아니다.

가속 스킬의 장점은 한계 없이 무한대로 가속이 가능하다는 점이지만, 반대로 단점이기도 했다.

육신이 버텨낼 수 있는 한계를 무시하고, 기계적으로 가속을 걸어 주기 때문이다.

즉, 아무 생각 없이 가속을 썼다가는 몸이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수도 있었다.

부러지면 차라리 다행이고, 재수 없으면 터지거나 갈가리 찢어져 죽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슬슬 오는군.’

가속을 다섯 번 정도 사용한 시점에 이르자, 몸에서 신호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에서 그만하라고. 더 하면 몸에 문제가 생긴다고. 적당히 하라고 말이다.

하지만 한 번의 실수에도 목숨이 오가는 세상에서 ‘적당히’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적당하게 살아서는 적당하게 성장하다가 적당히 죽는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빌어먹을 디스토피아 같은 세상은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 넣어야만 살만하도록 만들어졌다.

원작자가 굳은 의지가 담긴 어둡고 축축한 세계관이다.

그렇기에 매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고 한 단계 뛰어넘을 수 있다.

같은 시각.

“뭔데, 저 오빠? 무서워…….”

반세영은 어느 정도 속도가 붙기 시작하자, 슬슬 움직임에 잔상이 생기는 강후의 모습을 봤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강후의 뒤에 마치 혜성처럼 꼬리가 생겨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빠르다, 진짜 빠르다, 정도의 생각이었던 감상이 지금은 저게 가능해? 로 바뀌었다.

그랬다.

강후는 인체, 아니 헌터의 육신으로서도 감당할 수 있을 수준을 넘은 경지에 도달한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전세혁 역시도 최대한 허용되는 위치까지 앞으로 나와 현장을 살피고 있었다.

몸이 버티는 것은 둘째치고, 과연 스킬의 압박을 정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싶었다.

아무리 봐도 강후가 스킬을 쉴 새 없이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킬은 항상 정신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만큼, 저렇게 계속 사용하면 머리가 버틸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반세영에게 보이는 강후의 뒷모습에는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은밀하게 먹잇감을 쫓는 맹수처럼 강후는 조용히 멀어지는 제단을 쫓고 있었다.

“…….”

이런 식의 공략 방법을 수도 없이 생각했고, 테스트도 해 봤던 그녀다.

당연하게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적어도 자신이 경험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파르르르.

손끝이 떨렸다.

이제 몬스터들이 막 나오고 있는 참이고, 녀석들이 반세영에게로 몰려들고 있었다.

이 녀석들이야 잡고 있는 포인트에서 한 놈씩 차례대로 잡으면 그만이었다.

타앙! 타앙!

반세영이 기계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계속 시선을 강후에게 뒀다.

어느 시점엔가 강후의 몸 주변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더 빨라진 것이다.

반세영은 헌터가 된 이후, 처음으로 다른 헌터를 보면서 믿기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가 레벨 250이 될 때까지 성장해 오면서, 실력 좋은 헌터들을 많이 봐왔지만.

그들의 능력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었다. 헌터이기 때문이다.

헌터이기에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수 있고, 능력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했다.

한데 강후의 능력은 예외였다.

레벨 100도 되지 않은 헌터가 보일 수 있는 능력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제 걸음마를 뗀 어린 아기가 100m를 9초대에 달리는 모습을 보는 듯했다. 말이 안 되잖은가?

그런 일이 강후에게서 벌어지고 있었다.

* * *

‘나도 어지간히 미친 모양이군.’

그 무렵, 강후는 웃고 있었다.

한계에 일찌감치 돌입한 몸뚱이는 한참 전부터 살려달라는 무언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몸 전체가 뜨거운 열기 속에서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이 된 느낌이었다.

물론 가속으로 인해 증폭된 공기와의 마찰은 보호 결계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보호 결계가 모든 압박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약간의 경감 효과랄까.

몸이 느끼는 부담도 부담이나, 사실 더 큰 문제는 스킬의 연속 사용에서 오는 고통이었다.

시야가 온통 검게 변하는 블랙 아웃이 계속 일어났고, 뇌가 터져나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으읍.”

쿨럭, 하고 나올 뻔했던 기침을 강후가 속으로 삼켰다. 사소한 기침도 지금은 큰 방해가 된다.

몸과 정신에 걸리는 압박이 커질수록 역설적으로 무아지경에 접어드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나의 과도한 사용으로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하고, 체력이 급강하하고 있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멀쩡했다.

고통이 커지고 뚜렷해질수록, 세상의 모든 것이 선명하게 보였던 것이다.

‘터질 것 같고, 쓰러질 것 같지만, 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확신이 들었다.

몸과 정신이 지금 같은 혹독함을 즐기는 것 같았다. 참을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진달까.

‘미친놈.’

강후가 스스로에게 가장 어울리는 말을 떠올리며 웃었다.

이쯤 되자, 성좌들이 앞을 다투어 메시지를 쏟아내는 것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용을 보진 않았지만,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자신에 대한 찬사나 놀람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멀어지기만 하던 제단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방의 팽창 속도를 따라잡은 수준을 지나, 역전한 것이다.

우직하게 쫓았다.

목표 하나만 보고 있으니, 다른 것에는 아무 관심도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몸에도.

그렇게 얼마나 쫓았을까?

순식간에 가까워진 제단이 마치 빨리 감기를 한 것처럼 자신의 코앞까지 다가왔고.

타악!

강후가 제단 위에 있던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던전의 모든 것이 멈췄다.

방의 끝없는 팽창도, 그리고 반세영에게 몰려들던 몬스터의 흐름도.

모든 것은 한 줌의 재가 됐고, 그것은 고스란히 이 방에 있는 두 사람의 결과가 됐다.

[해당 던전의 공략에 소요된 시간을 계산한 결과, S+ 판정을 받았습니다.]

“후우…….”

강후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동시에 사라진 모든 몬스터의 경험치가 일괄적으로 정산되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단숨에 레벨이 96으로 뛰었다.

방 하나만 공략했는데도 불구하고 레벨이 즉시 한 계단을 올라가 버린 것이다.

보통 레벨 100을 앞둔 시점이 되면, 던전 하나에서 레벨 1을 올리는 것도 어려웠다.

괜히 헌터들이 레벨업에 목숨을 거는 게 아닌 것이다. 정말 어렵고 오래 걸리는 인고의 길이다.

“하면…… 되긴 하는군.”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몸과 정신을 극한, 아니 극한보다 더한 수준까지 밀어붙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분명 주저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강후의 시선은 하늘로 향해 있었다.

버틸 힘이 조금도 없는 몸뚱이가 중력의 흐름에 순응한 모양이다.

늘상 하던 체력 포인트 투자를 마친 강후가 오랜만에 상태를 살폈다. 중간 점검의 시간이다.

【신강후 Lv. 96】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470】 【민첩 85】

【체력 532】 【마력 20】

【항마 170】 【맷집 395】

‘누가 이 스탯을 레벨 100도 안 된 암살자의 스탯이라고 보겠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덕분에 마나에 스탯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성장 동력을 체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현재의 체력은 체력 스탯을 ‘주 스탯’으로 삼는 같은 레벨 대의 탱커형 검사보다도 훨씬 높았다.

같은 레벨의 전문 탱커보다 더 탱킹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항마나 맷집도 마찬가지.

주목할 점은 강후는 탱커형 검사도 아니고, 방어에 특화된 헌터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련 스탯이 전부 높은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스킬은 두말할 나위도 없고.

평범한 헌터였다면 마력 20이라는 수치가 참 형편없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총량이 낮은 마력을 패널티가 아닌 이득으로 바꿔버렸다.

【야만의 시대】

【스킬 숙련도 : Lv Max】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꼼수로 학습한 광전사 전용 스킬인 야만의 시대는 화룡점정이었다. 누가 이런 조합을 갖겠는가?

“적요석 하나…… 확보했군.”

강후가 혈루를 꼭 움켜쥔 채로, 두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반세영과의 내기는 진심이었다.

적요석 하나로 스킬을 업그레이드하고 안 하고는 차이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스킬 하나 때문에 생사가 갈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을 정도다.

물론 반세영도 자신이 이 말도 안 되는 내기에서 질 리는 없다고 확신하고 대뜸 받은 것이겠지만.

잠시 던전의 바람을 느꼈다.

무아지경에 빠져서 달리고 있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산들바람 속의 꽃향기가 느껴졌다.

그래, 민들레꽃 향기였다.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너무나도 기분 좋은 향기.

하지만 선혈과 살점이 난무하는 던전에는 어울리지 않는 너무 평화로운 향기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미친 오빠! 진짜 미쳤어! 아무리 적요석을 걸어도 그렇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황을 만들어?”

“일단 총은 좀 치우지.”

눈을 뜬 강후는 거꾸로 보이는 반세영의 얼굴과 코앞에 닿아 있는 총구를 보고는 흠칫 놀랐다.

반세영이 떨리는 두 눈과 손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직도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그래.

믿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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