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가치 증명 (1)
* * *
던전 공략이 시작됐다.
던전 정식 명칭이 따로 있기는 했지만, 세 사람은 별칭으로 ‘미로 던전’이라고 불렀다.
레벨이 높아질수록.
마주하게 되는 던전은 이런 방식으로 복잡하게 꼬아놓는 형태가 많기에 감회가 남달랐다.
사실 원작자의 의중이 대폭 반영된 던전 콘셉트이기 때문이다.
미로형 던전으로 만들어두면 난이도를 높이기 좋아서, 쓰는 입장에서는 참 재밌었다.
하지만.
‘도전하는 입장이 되니 거지 같군.’
직접 체험하는 입장이 되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상시 긴장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음.”
던전에 입장하자마자, 포인트를 선점하고 자리를 잡은 저격수 셋이 보였다.
던전 입구를 지키는 보초다. 실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저격수다 보니 안심할 수는 없다.
약속된 합에 맞춰, 강후가 바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녀석이 강후의 타깃이다.
【도약】
【가속】
【도약】
가장 기본적인 스킬을 조합해서 연계했다. 지금으로서는 타깃과의 거리를 빠르게 좁히는 것이 우선.
순간적으로 몸에 과부하가 걸리기는 하지만, 가속과 도약의 단순 조합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타앙!
먼저 반세영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삼각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던 저격수 중 하나가 반세영의 저격에 오른쪽 어깨를 맞았다.
그리고 전세혁은 자신의 주특기인 화살 공격을 보류하고는 오히려 저격수의 공격을 유도했다.
우측 뒤편의 저격수를 노리려는 척하다가, 두 걸음 뒤로 물러선 것이다.
다음 순간.
타앙! 퍼석!
방금까지 그가 발을 딛고 있던 자리에서 불꽃이 튀며, 빗나간 마탄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전세혁은 공격 대신 유도를 선택했고, 노림수는 성공이었다.
이제 강후의 차례였다.
시이잉!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저격수의 총이 정조준되었을 때의 느낌이 났다.
마탄을 유도하는 마나의 흐름이 한 점에 집중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아주 미세한 통증이다.
일반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지간한 헌터도 절대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선천성 마나 과민증으로 감각이 발달해있는 강후에게는 쉽게 느낄 수 있는 감각이었다.
【그림자 걸음】
스파앙!
그 순간에 강후의 그림자가 세 갈래로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당황한 저격수의 총구가 흔들렸다. ‘진짜’ 강후를 노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내 그림자는 가짜고, 진짜 강후의 모습은 그대로 제자리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강후는 때마침 이동 경로에 있었던 나무 뒤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우우웅!
저격수가 마나 출력을 높였다.
작정하고 나무 뒤에 숨었으니, 나무 기둥까지 통째로 강후의 머리와 날릴 참이었다.
표적인 강후는 여전히 제자리였고, 저격수는 회심의 미소와 함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퍼서석!
고출력의 마탄답게 나무가 통째로 터져 나갔다. 당연히 뒤에 숨어 있을 강후의 머리야 운명이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
저격수는 당연하게 흩날려야 할 강후의 살점과 피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방금까지 그림자로 보이던 형체 하나가 강후의 모습으로 뒤바뀌는 것이 목격됐다.
이미 그 시점에 강후는 저격수를 향해, 혈루를 던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전광비도】
쿠와아아!
워낙 가까운 거리인 데다가, 강후가 완력까지 힘껏 실은 탓에 단검에서 굉음이 들렸다.
순식간에 공간을 가르며 날아간 혈루는 저격수가 손을 쓸 틈도 없이 양미간에 박혀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강후의 접근을 인지하고서 전세혁이 아닌 강후를 노리려던 저격수 역시.
푸우욱!
동료를 따라 즉사했다.
전세혁이 공격 대신 공격 유도로 저격수의 공격을 한 턴 빼냈을 때.
이미 강후는 연계를 짜둔 상태였다. 전세혁이 선공하지 않았음을 알고, 다음 생각을 해 뒀었다.
전세혁이 담당하기로 했으니 그가 처리하겠지, 하고 넘겨짚지 않았다는 얘기다.
“와우.”
“깔끔하다, 오빠. 그치?”
“그러게 말이다. 보통 암살자들이 실력 위주로 커버하는 경우가 많은데. 선규 씨는 그 안에 수 싸움을 반드시 넣는 편이야.”
“머리 싸움하는 거, 되게 부담되지 않아? 상대가 똑똑하면 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잖아?”
“세영아, 바꿔 생각해 봐. 내가 똑똑하다는 확신이 있으면, 머리싸움만큼 재밌는 게 없어.”
“난 영 젬병이라…….”
“네가 삼국지의 제갈량이 되었다고 생각해 봐. 멍청한 놈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할걸?”
전세혁이 반세영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해 주었다.
그녀는 분명 머리보다는 몸으로, 본능적으로 싸우는 타입이기는 했다. 물론 그게 또 장점이다.
어쨌든 그렇게 입구 장애물(?) 처리가 끝났다.
예전에 박동재와 왔을 때는 원거리 즉시 저격이 가능한 사람이 반세영밖에 없었기 때문에.
저격수 하나는 잡아도, 두 저격수는 시간을 두고 공략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전세혁이 활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기는 하나, 마탄처럼 화살을 신속하게 날릴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공략에서는 강후가 놈들 사이를 휘저은 덕분에 너무 쉽게 길이 뚫려 버렸다.
“제대로 된 암살자와 합을 맞춰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 떨리네.”
반세영은 자신도 모르게, 이미 강후를 ‘제대로 된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헌터와 팀플레이를 해온 그녀지만, 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은 한두 개는 있었다.
하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뭔가를 불만처럼 생각할 부분이 떠오르기 전에 이미 그 행동을 먼저 하고 있었다.
방금도 마찬가지.
강후가 전담했던 저격수를 처치한 시점에 이미 다음 공격이 전세혁을 노리던 저격수에게 갔다.
다른 헌터였다면.
반세영이 지원 화력을 더해주거나, 아니면 타이밍이라고 외쳐주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척하면 딱의 개념은 어지간하게 호흡을 맞춰본 사이가 아니면 성립하기 힘들어서다.
“잘해 봐.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라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있을 때, 최선을 다하도록 해.”
전세혁이 웃으며 말했다.
강후를 본 시간이 길지는 않지만, 헌터의 실력과 기본기는 잠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강후는 암살자로서의 기본기는 당연히 잡혀 있고, 확장성까지 뛰어난 헌터였다.
그에게 ‘암살자’라는 하나로 통일된 직업명을 붙여주는 게 맞을까 싶을 정도다.
만약 비공식적인 명칭을 붙여도 된다면……. 듀얼 클래스, 트리플 클래스 같은 명칭은 어떨까 했다.
가지고 있는 스킬이 암살 계열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가진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부터 전세혁은 경험치 획득이 아니라, 방을 열어주는 역할에만 집중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약속이 됐다.
나중에 보스 몬스터 공략 시에는 힘을 보태겠지만, 그때도 메인이 아닌 서브의 개념이다.
이 3인 팀의 메인 리딩과 오더를 맡은 사람은 가장 레벨이 ‘낮은’ 강후였다.
밖에서 보면 웃기지만.
직접 팀원으로서 안에서 본다면 절대로 웃을 수 없는 당연한 구성이었다.
* * *
“첫 번째 방을 빠르게 클리어하면, 지름길로 이동 경로가 열린다고 했지.”
“맞아. 브리핑 때도 얘기했었지만, 던전이 빨리 공략될수록 보상이 좋기도 하고.”
“그럼 도핑을 좀 해야겠군.”
카득! 카드득!
강후가 솔라키움을 꺼내어 힘껏 씹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드 솔라키움을 먹고, 원 없이 마나를 펑펑 쓰면서 싸우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매드 솔라키움이 너무 귀했다. 무한대로 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마스터 K를 만나려는 이유 중에 하나는 바로 이 매드 솔라키움에 엮인 문제였다.
돈만 있다고 무조건 구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닌지라, 그의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것이다.
“그건 뭐야?”
“솔라키움.”
“진정 효과 말고는 딱히 뭐 없지 않아? 통증 억제도 썩 잘 되는 편은 아니던데.”
“뭐, 루틴처럼 껌을 씹는 개념 정도라고 해 두지.”
“하긴. 취향은 존중!”
강후의 특수한 몸 상태를 알지 못하는 반세영은 솔라키움이 강후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모를 수밖에 없다.
강후는 확신했다.
솔라키움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마음 놓고 성장해 올 수 없었을 것이라고.
심한 핸디캡이 될 수도 있었던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메리트로 바꿔준 것이 이 녀석이다.
“두 분. 준비되면 손을 들어주세요.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던전의 카운트가 시작될 겁니다.”
전세혁이 친절하게 안내했다.
그가 홀로 ‘출발의 방’에 남게 되면, 바로 다음 방이 열리게 된다.
통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직전 방에 반드시 한 사람은 있어야 하므로.
그는 끝까지 이 역할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주 위태로울 때, 강후 또는 반세영의 요청에 따라 원거리 공격을 지원할 예정이었다.
그전까지는 요청이 없다면 아무리 위급해 보이는 상황이어도, 절대 힘을 보태지 않기로 했다.
실력 향상을 위해, 쉽게 갈 수 있는 도움은 지양하고 싶은 강후와 반세영의 공통된 의지였다.
출발 전.
강후가 반세영에게 말했다.
“뒤 안 볼 거야. 믿고 달릴 테니까, 지원해 줘. 그럼 밥값은 내가 2인분 이상은 꼭 하지.”
“믿어본다?”
“안 믿을 수 없을 거야.”
자신 있게 말하는 강후의 말에 반세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그런 강후의 자신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늘, 강후는 본인의 자신감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증명해 왔다. 그래서 불신은 없었다.
드드드득.
문이 열리는 순간.
파앗!
강후의 모습이 반세영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미 가속, 도약을 연달아 전개하면서 방의 중앙부까지 순식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끝자락에서는 그림자 걸음까지 쓰면서, 더 깊은 곳에 그림자를 밀어 넣고 위치를 바꿨다.
덕분에 강후는 문이 전부 다 열리기도 전에 이미 방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방 안에서도 가장 몬스터가 많은 곳이었다.
몬스터 타입은 ‘각성형 오크’로 맷집이 좋지는 않았다. 대신 공격 자체의 화력은 높았다.
타앙!
꾸웨에엑! 웨엑! 뀌엑!
불을 뿜은 반세영의 마탄이 한 방에 오크 넷의 머리를 통으로 날려 버렸다.
맷집이 약하고, 밀집도가 높다 보니 한 번의 공격으로도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컸다.
이 방의 공략 포인트는 이런 힘자랑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모든 몬스터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강후가 바로 판을 짰다.
【풍뢰진】
보란 듯이 풍뢰진을 깔았다.
안에 들어서기만 하면 온갖 전류와 칼바람의 공격을 받게 되는 그야말로 죽음의 공간.
풍뢰진의 중심에 자리한 강후는 만약을 대비해 바로 보호 결계를 스스로에게 걸었다.
곧 이곳이 죽음의 지대로 바뀔 참이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미끼가 되지 않으면 몬스터도 모여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일부러 미끼가 된 것이다.
어차피 풍뢰진에 자신이 죽지는 않을 것을 알기에 던져볼 수 있는 노림수이기도 했다.
‘전략에는 이렇게 내 일부를 희생시키면서, 적의 목숨을 통째로 가져가는 방법도 있기 마련이지.’
강후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전략과 머리싸움에는 정말 끝이 없다.
그리고 멍청한 놈들을 꾀어내어 단번에 몰살시키는 쾌감은…… 가장 짜릿한 것이었다.
어떤 쾌감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어쩌면 성적(性的)인 것보다 더한 쾌감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