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Lv. 100 (4)
“압니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까쉬마르 길드는 전종두의 오쇼 용병단을 막후에서 조종했던 길드다. 사실상 수족처럼 부렸다.
까쉬마르 길드의 마스터 니콜라이 스트라크가 전종두의 상위 호환 형태였기 때문에.
전종두가 자신의 스승으로 받들어 모신 이력이 존재했다. 성향이 거의 같아서 가능한 얘기였다.
다만 갑작스럽게 까쉬마르 길드에 대한 얘기가 나온 이유가 궁금했다.
차라리 같이 전투에 임했던 김수경이 물어봤으면 이유를 이해라도 하겠는데.
전혀 관련이 없는 전세혁이 오쇼 용병단과 연관된 길드를 얘기하니 흠칫했던 것이다.
전세혁이 앞뒤 맥락 없이 얘기가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언급의 이유를 덧붙였다.
“다름이 아니라 말입니다. 원래 저희와 함께하던 파트너가 그 길드에 납치되어 있어섭니다.”
“까쉬마르 길드에요?”
“네, 그렇습니다. 이번에 저희가 함께 갈 던전은 반드시 3인이 합을 맞춰야 하는데, 공백이 생긴 거죠.”
3인이 호흡을 맞춰야 하는 던전인데 2인 밖에 없으니, 자신의 빈자리가 생긴 것은 당연했다.
까쉬마르 길드는 오쇼 용병단보다 더 질이 나쁜 놈들이다.
오쇼 용병단이 동네 양아치 같은 느낌이라면, 그놈들은 잘 짜인 하나의 거대한 범죄 조직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도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정화 길드만큼 이미지가 좋았다.
특히 러시아 정치권과 줄이 확실히 닿아 있는 탓에 러시아 내에서는 아예 평가가 찬양 일색이었다.
강후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납치되었다는 헌터의 생사가 궁금했다.
“생존은 확인하신 겁니까?”
“네. 어제 연락했습니다. 그쪽에서 요구하는 돈도 보내줬고, 일단 살려는 뒀어요.”
전세혁의 표현이 정확하다.
살려는 뒀다.
왜냐면 까쉬마르 길드에 보내준 돈만큼이 목숨으로 치환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 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까쉬마르 길드는 인질을 매매하거나 실험체로 쓴다.
베주미예 같은 인간 헌터 병기가 되어 나타나는 것도 매우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전세혁이 말을 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찾아가서 다 박살을 내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요.”
“이현석 님을 통해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까?”
강후의 질문은 이현석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인 전세혁에게는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이현석은 국내보다 국외에 더 친분 있는 세력이나 길드가 많았다. 러시아 쪽도 마찬가지고.
“현석이에게 부탁하는 것은 너무 면목 없는 문제라 비밀로 하고 있었죠.”
“보고 싶어, 동재 오빠…….”
그때.
반세영이 살짝 눈시울을 붉히며 납치된 헌터의 이름을 언급했다.
동재. 당연히 누구로 특정할 수는 없는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흔한 이름도 아니었다.
원작의 내용을 꿰뚫고 있는 강후에게 기억나는 이름이 있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동재 오빠라는 분이 박동재 님입니까? 버프계 스킬에 특화되어 있는.”
“오! 맞습니다. 동재를 알고 계신 겁니까?”
“알음알음 헌터들 사이에 소문이 돌던 분이라.”
전세혁의 놀란 반응에 적절하게 이유를 섞어 둘러댔다. 실제로 흔한 일이기도 하고.
아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맞다고 해서 강후도 살짝 당황했다.
박동재.
광란의 지휘자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매우 실력이 뛰어난 버퍼다.
원작에서는 신강후와 박동재 사이에 연결고리가 생길 뻔했던 것을 장시환이 차단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는 박동재의 스승인 복형석을 장시환이 죽였기 때문이었다.
악인 단죄, 정의 구현이라는 이유가 붙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승자의 주장일 뿐이었다.
어쨌든 장시환의 입장에서는 악인의 제자고, 스승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박동재가 눈엣가시였다.
게다가 그런 박동재가 장시환의 호적수로 신강후가 떠오르면서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
장시환이 위협을 느끼고 죽여버렸던 것이다. 길드의 정예 다수가 동원된 암살이었다.
‘박동재는 옆에 두면 무조건 플러스야. 평범한 더하기도 아니고, 거의 곱하기 수준이지.’
지금까지 강후가 반세영이나 정유리 같은 인물의 능력에 매력을 느끼긴 했지만.
박동재를 옆에 놓고서 비교한다면, 말할 정도도 못 됐다.
단 한 번의 공격에 극대화된 위력을 담는 강후에게 버퍼의 지원 여부는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박동재는 진정한 의미로 강후에게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헌터였다.
‘구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일이 있어서 원작에서 등장 시점이 엄청 늦어졌던 거군.’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고 나니까 원작에서 신강후와의 접점이 늦게 생긴 이유가 이해가 갔다.
분명히 박동재는 활용할 가치가 큰 헌터다. 강후는 어떻게든 그와 인연을 엮고 싶었다.
본능적 직감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성적으로 자신에게 잘 맞는 헌터임을 인지해서이기도 했다.
전세혁에게 바람을 좀 넣어보기로 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건, 앞뒤가 너무 안 맞는 일이다.
“이현석 님의 도움을 받는 것도 좋다고 생각됩니다. 파트너의 운명을 외면할 순 없으니까요.”
“정말 심각하게 고민 중이긴 합니다.”
“필요하다면 제 힘도 보태드리죠.”
돈이 엮이지 않으면 좀처럼 나서지 않는 강후의 자발적인 의사였다.
전세혁은 의뢰꾼인 강후가 단순히 선의로 힘을 보태겠다고 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악의가 있을 리는 없을 터. 그러면 사람이 선한 걸까? 전세혁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 * *
이후. 박동재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던전 관련 브리핑이 신속하게 진행됐다.
이미 공략 경험이 있는 전세혁과 반세영이 서로 번갈아 가며, 내용을 풀어냈다.
“일단 던전의 수준은 3인의 레벨 평균으로 결정됩니다.”
“문제없습니다.”
전세혁의 말에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전세혁, 반세영의 평균점으로 잡히면 약 250 수준일 터.
원하는 난이도와 수준에 딱 맞았다. 그 정도는 이제 충분히 할 만했다.
반세영이 설명을 이어갔다.
“던전 구조는 폐쇄 미로형. 다음 방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앞방에 헌터가 있어야 해.”
“문이 닫히는 모양이군.”
“응, 맞아.”
“그러면 앞방이 아니라, 공략을 진행할 방에 헌터가 한 명인 경우는?”
“그때는 방이 활성화가 되지 않아. 즉, 앞방 한 명, 도전하는 두 명이 필수야.”
“물건이나 기계 꼼수는?”
“여러 가지를 시도했지만, 지금까지 된 적은 아무것도 없었어.”
그렇다면 한 명은 사실상 구경꾼인 셈이다. 머릿수를 채워주는 용도라는 표현이 딱 맞겠지.
아니나 다를까, 전세혁이 강후의 생각을 확인시켜 주었다.
“제가 통로 유지 역할을 할 겁니다. 세영이와 미로 던전 공략에 집중해 주시면 됩니다.”
“사촌 동생을 위해 가주시는군요. 경험치 측면에서는 아예 소득이 없으실 텐데.”
“뭐. 가끔은 저도 쉴 때가 있어야죠. 세영이 실력도 점검하면서, 겸사겸사 쉬는 겁니다.”
“네, 이해했습니다.”
“보스 몬스터도 3인 연계 체제라서 호흡을 좀 맞출 필요는 있습니다. 이동하실까요?”
“훈련장이 있으신 모양이죠?”
“네. 거기서 각자 기본 방향성 정도만 점검하면 될 것 같습니다. 포지션이 겹치지 않으니까요.”
실력이 우수한 헌터일수록 서로 호흡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높다 보니, 타인과의 연계에 무관심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6층 빌딩을 개인 사무실로 소유하고 있는 전세혁. 그의 훈련장은 또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강후가 그의 재력에 대한 기대와 함께, 훈련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가 보는 정식 훈련장이기도 했다.
* * *
‘역시.’
예상대로 전세혁은 훈련장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고 있었다.
보아하니 땅도 사고, 거기에 건물도 직접 올린 듯했다.
바로 옆에는 해영 길드의 제5 훈련장이 있었다.
들어가기 전 해영 길드 소속의 헌터들과 눈이 마주쳤는데, 모두 전세혁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물론 전세혁의 옆에 있는 강후에 대해선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려진 얼굴이 아니기에.
어쨌든 내부에 들어가니, 온갖 비싼 훈련 시설이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시뮬레이션 시설도 있었는데, 가상 던전 환경까지 구현하는 고가의 장비였다.
게다가 고감도의 센서가 장착된 고가의 훈련복도 10벌 가까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훈련장 하나를 세우는데, 수백억 원은 거뜬히 썼을 법한 최상의 장비의 향연이었다.
“훈련복으로 갈아입으시고. 훈련 레벨은 300으로 맞춰서 해 보겠습니다. 낮은 것보단 높은 게 좋으니.”
“그러시죠.”
전세혁의 제안을 받았다.
훈련은 결국 그 자체로 실전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어서 긴장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마련.
그래서 의도적으로 수준을 한두 단계 더 높여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얼마 후.
훈련이 진행됐다.
가상 훈련의 콘셉트는 ‘회피’와 ‘저격’으로 잡혔다.
원거리 공격이 많다는 미로 던전의 구성상, 회피가 최우선 과제가 될 일이 많아 필수였고.
저격의 경우는 반세영이 확실하게 강후를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한 사전 점검 차원이라 꼭 필요했다.
휴식 시간 없이, 약 5시간의 집중 훈련이 진행됐다.
전세혁이 한 말에 따르면, 이렇게 긴 시간을 훈련한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과거에 박동재와 같이 훈련을 했을 때도, 보통 3시간 정도면 지쳐 나가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훈련 내내 작은 신음 한 번 내지 않았고,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집중했다.
그렇게 훈련이 끝나고.
강후가 별도의 샤워실에서 땀에 범벅이 된 몸을 씻어내는 동안, 남은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주제는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강후였다.
“오빠. 봤어? 클린 히트, 제로 대미지. 결과 분석표에 나온 선규 오빠의 훈련이야.”
“봤다. 대단하군.”
“대단하군, 으로 끝날 상황이야 이게? 훈련인데도 단 한 번을 피격도 안 당했다구.”
“다른 사람이면 더 놀라서 말을 했겠지. 하지만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정선규 씨는 충분히 인정받을 실력을 가진 암살자라고.”
“게다가 단검 투척도 총 스물아홉 번을 했는데, 빗나간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실력과 기본기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전세혁은 처음부터 강후가 예사롭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강동현의 사냥개, 차소희를 일대일로 제압한 남자다. 3배에 가까운 레벨 차를 극복하고 말이다.
이미 떡잎부터 다른 헌터였기에 그가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놀랍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박동재의 대체자로 강후를 미련 없이 생각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검증된 실력을 가져서다.
‘세영이가 더 성장하려면, 신강후처럼 앞에서 뛰어놀 수 있는 판을 만들어줄 실력자가 필요해.’
전세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사촌 동생의 성장을 위한 탄탄대로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강후와의 관계는 매우 중요했다.
박동재를 나중에 구해서 데려올 수 있게 된다면, 그 역시 강후의 곁에 있게 하고 싶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헌터를 보는 눈이 트이게 된 전세혁의 확신이었다.
강후에게 부족한 것은 레벨뿐이다. 잠재력과 실력은 이미 예전에 다 갖췄다.
그런 인재를 두고도 외면한다는 것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자체로 큰 손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