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Lv. 100 (3)
‘메인 성좌’의 가치는 지금까지 차원 강탈자가 보여준 것처럼 매우 크다.
우선 계약자로 하여금 성좌가 가진 성좌 특전을 모두 누릴 수 있게 해 준다.
지금 강후가 스킬을 강탈하고, 모든 스킬의 숙련도를 최대로 유지하며, 죽인 헌터의 성좌를 강탈할 수 있는 이유다.
지정한 포인트로 순간 이동하는 것 역시도 마찬가지.
만약 차원 강탈자가 메인 성좌가 아닌 일반 서브 후원 성좌가 된다면?
위와 같은 특전을 누릴 수 없게 된다. 특전을 누린다는 것은 메인 성좌만이 가능한 것이라서다.
계약자, 그러니까 계약한 헌터는 메인 성좌를 바꾸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했다.
교체 자체의 선택권은 헌터에게 있었다.
성좌와의 계약까지 파기할 순 없어도, 계약의 격을 메인에서 서브로 내리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다만 문제는 한 번 그렇게 계약의 격을 떨어뜨린 성좌는 다시 자리를 되돌릴 수가 없다는 점이다.
감정적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헌터의 시스템을 구성하는 구조의 문제였다.
게다가 메인에서 서브로 계약의 격이 떨어진 성좌는 계약자와 손실 없는 계약 해지가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메인 성좌의 교체는 상당히 신중해야 하는 작업이고, 흔치 않았다.
물론 실력 있는 헌터의 세계에서는 빈번한 일이기도 했다.
더 많은 능력과 특전을 누리게 해 주겠다는 성좌가 줄을 서기 때문이다. 그러니 경쟁에 불이 붙는다.
그리고 지금.
강후가 바로 그것과 유사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솔직히 차원 강탈자가 주는 특전을 뛰어넘기가 쉽지 않아. 그녀는 분명 매력 있는 성좌지.’
강후가 이 세계에서의 첫 성좌이자 메인 성좌로 차원 강탈자를 정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장기적인 방향성과 노림수를 모두 고려한 결정으로 절대 충동적이지 않았다.
그녀와 경쟁이 붙은 황야의 전략가는 메인 성좌로서는 줄 수 있는 특전의 질이 다소 떨어진다.
주로 정신 쪽에 특화되어 있는데 강후의 직업군과 시너지가 좋다고 볼 수는 없다.
대재앙 – 어둠은 가공할 만한 강력함을 제공하는 것이 특징.
하지만 그 대가로 계약자의 생명력과 보이지 않는 일종의 영력을 요구한다.
알게 모르게 힘을 빼앗기는 셈인데……. 강후는 그 막연함이 마음에 걸렸다.
어차피 결정은 자신이 한다.
그래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굳이 여기서 차원 강탈자의 위치를 못 박아 줄 필요도 없다.
여지가 있다 여겨야, 앞으로도 성좌들이 티격태격하면서 자신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까.
황야의 전략가가 남긴 메시지가 보였다.
【계약자여. 나는 네게 첫 번째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그저 내 특전을 누리게 해 주고 싶을 뿐.】
파격적인 말이었다.
메인 성좌의 자리는 원하지 않지만 자기의 힘이라도 누려보라는 제안이었다.
공짜로 물건을 주겠다는 얘기와 같다. 물건을 받는 입장에서 손해 볼 것은 전혀 없는 얘기.
하지만 이를 차원 강탈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냐의 문제가 있다.
그때, 대재앙 – 어둠도 자신의 생각을 남겼다.
【나는 내 격에 걸맞은 자리를 원하고, 당연히 다른 하찮은 성좌와 겸상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계약자, 네가 탐난다. 그리고 난 너에게 무한한 힘과 영광을 줄 수 있는 존재다.】
‘3파전인가. 재밌네.’
강후가 웃었다.
나중에 차원 강탈자와는 별도의 채널을 열어서 대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황야의 전략가가 제안한 내용에 변함이 없다면, 그녀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메인 성좌인 차원 강탈자가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조율은 자신의 몫이다.
그때.
우우우웅.
스마트폰의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 싶었는데 윤상미였다.
지난번 클럽 하데스에서 강후가 신세를 진 일에 대한 대가로 그녀가 받아 간 번호.
그래서인지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시시콜콜한 일로 연락을 할 사람은 또 아니기에.
“응.”
- 기차예요?
“맞아.”
- 어쩐지. 평소보다도 목소리를 더 낮게 까는 것을 보니, 집에 있는 건 아니겠다 싶었는데.
“무슨 일이지?”
- 던전 라이센스 대여를 하나 받았는데 같이 갈래요? 같이 한 번 놀기로 했잖아요?
좋은 제안이었다.
레벨업이 필요한 상황이라 던전을 수소문하는 과정에서 부산까지 내려가고 있는 판국이다.
그녀가 자신의 레벨에 맞게 물어온 던전이라면, 강후가 원하는 수준에도 부합할 터.
여러모로 시기 좋은 제안이다.
반세영, 전세혁과의 만남을 진행한 이후에 그녀를 만나는 루트면 그림이 딱 좋을 듯했다.
“내일 늦게나 모레 연락해도 괜찮을까?”
- 그럼요. 급하진 않아요. 딱히 다른 파트너를 생각한 던전도 아니고 해서.
“기분 좋은 얘기군.”
-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오빠 잘하잖아. 실력을 믿는 거죠.
“그럼 조금만 기다려줘.”
- 알았어요. 연락 기다릴게요.
“응.”
짧지만 유익한 통화가 끝났다.
반세영과 함께 가게 될 던전의 규모와 보상이 어느 정도일지는 모르겠지만.
설령 거기서 조금 성장이 부족하더라도 확실히 메꿀 만한 세컨드 플랜이 생긴 느낌이었다.
* * *
도착한 부산역은 비가 일찌감치 그친 상태였다.
서울 다음가는 헌터의 메카답게 부산역 일대는 헌터들이 엄청 붐볐다.
인산인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차고 넘쳤다.
역 앞에 마련된 길드, 용병 부스만 놓고 보면 오히려 서울이 초라해 보일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는 용병 모집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화 길드가 독점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서울에서 다른 길드의 영업 활동은 금지된다.
물론 비공식적인 얘기다.
공식 자리에서 정화 길드는 다른 길드와의 ‘상생’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3초면 탄로 날 개소리다.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데.’
근데 원래 붐비는 곳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사람이 너무 많았다.
특히 정화 길드와 해영 길드의 견장을 달고 있는 헌터의 수가 상당히 많았는데.
무슨 일인가 싶어 좀 더 살펴보니, 역 앞에서 큰 행사가 있었다.
해영 길드의 마스터 ‘홍해창’과 정화 길드의 서열 3위 헌터인 ‘신태석’의 만남이었다.
‘원작에서 안영호가 복수하려고 함께 폭사한 헌터가 신태석이었지. 갱생 안 될 폐기물이기도 하고.’
강후가 가늘게 눈을 떴다.
장시환이 사람 좋아 보이는 쓰레기고, 채관형이 두 얼굴을 가진 쓰레기라면.
신태석은 그냥 태생부터 겉으로 드러난 모든 것이 쓰레기인 녀석이다. 재활용도 안 되는 수준.
지금 정화 길드에서 대외비적인 궂은일을 맡고 있는 것이 바로 신태석이기도 했다.
장시환과 채관형이 지시를 주로 하는 편이고, 실제 수행은 신태석이 거의 도맡아 하는 식이다.
그때.
부산역 앞에 설치되어있던 대형 전광판을 통해, 오늘 그들의 만남의 이유가 밝혀졌다.
[금일 해영 길드는 정화 길드와 상호 전면 교류를 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부산과 서울에서 명실상부한 1위 길드인 두 세력의 연합은 향후 국내 판도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바뀌었다.’
원작과 흐름이 달라졌다.
원작에서는 장시환이 해영 길드를 혐오하다시피 싫어했었다.
부역자 엔딩을 생각하면…… 그 생각 자체가 망상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강후는 원작에서 부역자 엔딩으로 끝나기 전까지의 모든 내용이 ‘꿈’일 가능성도 고려했다.
즉, 자신이 쓴 원작의 내용 대부분이 지금 이 세계를 살고 있는 장시환의 ‘상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부역자 엔딩의 개연성도 함께 맞춰진다.
그렇잖은가?
원작에서 장시환이 자신을 정의 그 자체라고 믿으며 행동하고 움직였던 것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지금 빌런이 될 준비를 착실하게 하고 있는 장시환의 행보가 깔끔하게 설명이 된다.
어쨌든 더러운 놈들끼리 양손을 제대로 잡는 모양새라 강후의 입장에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이러면 전광판의 방송대로 향후 국내 판도가 복잡해진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스마트폰을 확인하자, 이제 막 도착해서 주차 중이라 조금 늦는다는 전세혁의 메시지가 있었다.
강후가 두 사람을 기다리며, 전광판을 통해 이어지는 헌터 관련 뉴스를 좀 더 살폈다.
[정화 길드가 금일 오전 8시를 기해 오산 권역의 토벌을 진행한다고 밝혔습니다.]
[오산에서 인신매매, 마약 밀매, 성폭행과 같은 강력 범죄에 연루되어있는 평정, 바스타드 길드가 척살 대상임을 밝혔습니다.]
[해당 세력은 이미 지명수배자와 범죄 혐의가 있는 헌터가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도 빠르네.’
장시환의 오산 권역 토벌은 원작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대외적인 명분이야 토벌이니 정의구현이니 하는 개소리를 늘어대고 있기는 하다.
헌터 치안청과 협력을 하는 구조라서 포장하기에 수월한 부분이 많았다.
어쨌든.
장시환이 오산 쪽을 탐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알짜배기 던전이 많기 때문이다.
길드 차원에서도 육성에 도움이 되고 개인적으로 공략하고자 하는 던전도 많은 곳.
그래서 언젠가는 먹겠지 싶었는데, 그 시기가 원작보다 훨씬 빨랐다. 1년 이상 빠르다.
‘평정이랑 바스타드가 쉽게 토벌될 길드는 아냐. 애초에 게릴라전에 능한 놈들이기도 하고.’
강후는 정화 길드의 오산 토벌이 길어지는 그림을 보고 있었다. 원작에서도 그랬다.
그렇다면.
‘황금 고블린의 광산 쪽도 경계가 느슨해질 가능성이 있어.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딱인데.’
그간 평정과 바스타드의 전면전으로 엄두조차 내 볼 수 없던 던전의 진입도 욕심내 볼 수 있다.
황금 고블린의 광산.
이름에서 느낄 수 있듯이 내부에 보상으로 챙길 ‘먹거리’가 매우 많은 곳이고.
동시에 강후만이 알고 있는 별도의 특수 공간도 있는 던전이다. 챙길 것이 많다는 뜻이다.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
이제 어떤 부분에서는 원작보다 시기가 빠르거나, 아예 결이 다른 부분도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이야기의 큰 흐름을 생각하면 영향을 크게 미칠 만한 요소가 생긴 것은 전혀 아니다.
여전히 강후가 알고 있는 수많은 원작의 지식은 언제든 써먹을 수 있는 가치 높은 정보들이었다.
* * *
그로부터 5분 후.
부산역 앞에서 살짝 밖으로 나온 번화가에서 강후가 전세혁과 반세영을 만났다.
전세혁은 전에 봤을 때와 달리 가면을 쓰고 나왔다.
확실히 가면으로 흉터를 가리니 시원한 눈매만 보기 좋게 드러나서 훨씬 더 잘생겨 보였고.
반세영은 던전 안에서 착용하던 특수 고글을 벗고, 풀 메이크업을 하고 나온 덕분인지 상당히 예뻐 보였다. 잘나가는 뷰티 크리에이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미모였다.
반갑게 강후와 인사를 나눈 전세혁이 바로 역 근처에 있는 빌딩 하나를 가리켰다.
“가실까요?”
“빌딩에 뭐가 있습니까?”
“있죠. 정확히는 제 사무실입니다만.”
“이 빌딩 전체가 오빠의 사무실이야. 꼭대기 층은 사실상 펜트하우스나 다름없고.”
전세혁의 말 대신 반세영이 설명을 덧붙였다.
빌딩 전체를 개인 공간으로 쓰는 헌터라. 이상하지는 않다. 돈만 있으면 다 되니까.
다만 강후의 생각을 복잡해지게 만든 것은 그 직후에 전세혁이 강후에게 건넨 질문 때문이었다.
“혹시 러시아 국적의 까쉬마르 길드에 대해 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