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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91화 (91/304)

91화 Lv. 100 (2)

전화기 너머에서 전세혁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후가 별다른 반응 없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자, 전세혁이 이내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 공교롭게도 세영이에게도 같은 연락이 와서 말입니다. 안 그래도 쓸만한 곳을 구하던 참이라.

“여유가 될 때만 맞춰 주십시오. 무리하실 필요는 없고요.”

자신은 요청을 하는 입장이었기에 강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전세혁에게 말을 건넸다.

지금은 그가 배려를 해 준다면 호의를 베푸는 것이지, 당연한 것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전세혁이 신세 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과 그 사이의 관계는 동등했다.

- 아닙니다. 마침 제 소유의 던전 중에 여유가 있는 던전이 있어요. 다만.

“다만?”

- 이 던전은 세영이 혼자서는 못 가는 던전입니다. 어차피 파티원을 구할 생각이었어요.

“그건 마침 잘됐네요.”

- 차명으로 던전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 외부 데이터베이스로 검색하시면 이상할 겁니다.

“그거야 뭐 흔한 일이니까요.”

강후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차명 소유, 대여는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일이다. 던전 소유에 세금이 매겨지기 때문이다.

헌터 치안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도 하나 없는 판국에 세금을 내고 싶은 헌터가 있을까?

그래서 1인당 던전 2개 소유까지는 세금이 면제되는 점을 악용한 꼼수가 판을 쳤다.

아니, 꼼수를 안 쓰는 놈이 머저리 취급을 받았다. 헌터 치안청은 깊게 단속하지도 않았다.

- 일단 부산으로 좀 내려오셔야겠습니다.

“불청객은 아닌 겁니까?”

- 오시면 세영이는 엄청 좋아할 것 같군요. 일단 내려오시죠. 전리품 양보는 됐습니다.

“나름의 값은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만.”

- 와 주시는 게 값을 치르는 겁니다. 왜 그런지는 와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실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산역으로 KTX 타고 출발할 때 다시 연락드리죠.”

- 오늘이시죠?

“네. 출발 전에 연락드리겠습니다.”

- 좋습니다. 곧 뵙죠.

통화가 끝났다.

물 흐르듯 잘 풀린 느낌이었다.

어떤 던전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오는 것만으로도 값을 치른다고 말한 것을 보면…….

최소 인원 제한이 1인이 아닌 던전인 모양이다. 반드시 둘이나 셋이 있어야 하는 그런 곳.

어쨌든 잘 됐지 싶었다.

레벨 100까지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만큼, 최대한 서둘러 목표를 달성하고 싶었다.

* * *

부산역으로 가는 KTX 안.

강후는 창밖으로 계속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며, 전종두와의 전투를 떠올렸다.

그와의 전투는 복기하면 할수록 곱씹을 게 많은 전투였다. 의미가 큰 사건이기도 하고.

전종두의 죽음을 확인하기 무섭게 오쇼 용병단 전원이 항복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레벨 350의 헌터를 제압한다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전종두는 목숨을 거두기에 가장 까다로운 성향인 육체파 헌터였다.

보통 이런 헌터는 버티기에 능하므로, 죽이기가 쉽지 않아 놓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강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으니, 모두가 강후를 전종두보다 훨씬 위로 본 것이다.

그래야 설명이 돼서다.

‘물론 전종두를 이겼다고 해서, 다른 레벨 350의 헌터를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지.’

강후는 자만하지 않았다.

레벨은 ‘참고 지표’가 될 수는 있어도, ‘절대 지표’는 되지 못한다. 변수라는 것이 있으니까.

전종두는 성격이 급했고, 자신의 집요함을 인내로 버텨낼 지혜가 없었다.

만약 전종두가 조금 더 똑똑했다면, 생각을 깊게 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도 내가 이 몸뚱이를 한계 그 이상으로 잘 활용하고 있는 것도 맞지.’

자만은 경계했지만.

강후는 자신에게 칭찬을 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대단치 않다고 할 필요는 없다.

한편으로는 신강후의 몸에 빙의한 것이 참 잘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전종두나 다른 빌런의 몸에 빙의했다면, 이후 설계가 무척 복잡해졌을 것이다.

단점이 너무 극명해서, 가진 지식으로도 풀어가기 어려운 캐릭터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완성형이자 동시에 급성장형의 캐릭터였다.

게다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은 큰 핸디캡이면서 잠재력을 무한대로 끌어올리는 최고의 도구였다.

‘레벨 100을 찍고 나면. 정유리를 통해서 마스터 K를 꼭 만나봐야겠어.’

마스터 K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아 그를 만나보고 싶은 것도 있고.

동시에 정유리라는 좋은 가교가 생겼기에 자리를 만들어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어느새 보유량이 2개까지 줄어든 매드 솔라키움의 보충에 대한 문제도 있었다.

북한 쪽에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몇 군데를 알기는 하나, 접근 권한이 없어 과정이 복잡했다.

지금의 북한 땅은 임의로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허가가 필요했다.

물론 허가 없이 북한 땅을 활보하는 헌터가 제법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국제법상의 보호도 받을 수가 없고, 불이익을 당해도 호소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목숨을 내어놓고 다니는 것과 같아, 무단 월북을 하는 것은 권장되진 않았다.

강후가 정유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열 번 갔음에도 받지 않아 막 끊으려는 찰나에 그녀가 부스스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우웅?

“자는 중이었나 보네.”

- 괘, 괜찮아. 그냥 눈 좀 감고 있었어.

“흘리던 침이나 닦고 거짓말을 하지 그래.”

- 츄릅.

정유리의 순진한 반응에 강후가 피식 웃었다.

딱히 그녀가 웃긴다거나 재미있는 것은 아닌데, 미소를 짓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다.

아마 그녀만이 가진 순수하고도 깨끗한 영혼의 기운이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거겠지.

- 무슨 일이야?

“혹시 괜찮으면 할아버님을 뵐 수 있을까? 사고 싶은 물품도 있고, 나누고 싶은 말도 있는데.”

- 할아버지?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내가 데려오는 사람이면 할아버지도 좋아하실걸?

“손녀사위인 줄 알고?”

- 아니이! 그게 아니고! 할아버지도 핑계 삼아 손녀 얼굴 한 번 보면 좋아하실 거라는 거지!

“그럼 만남을 주선해 줘.”

- 응, 알았어! 그런데 지금 뭐 하는 중이야?

“부산에 가는 중이야.”

- 부산은 왜?

“놀러.”

-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네.

“그러게.”

- 아무튼 알았어! 할아버지랑 연락해 보고 다시 말해 줄게!

“부탁해.”

일이 수월하게 풀려가는 그림이다. 마스터 K에게는 알아보고 들어보고 싶은 것이 많다.

투두둑. 투둑. 투두두둑.

어느새 더 굵어진 빗줄기가 열차의 창문을 거칠게 두드리며, 시야를 가렸다.

승객도 별로 없는 객실 안.

강후가 의자를 살짝 뒤로 눕히고는 눈을 붙였다. 부산에 도착하면 정신없이 시간이 흐를 테니까.

* * *

강후와의 통화가 끝난 후.

정유리는 곧바로 마스터 K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지간해서는 통화가 안 되기로 악명이 높은 마스터 K지만, 손녀인 정유리에게는 예외였다.

그랬다. 전화를 가려 받았다.

- 그래. 율아.

율. 율이.

손녀 정유리를 부르는 마스터 K의 애칭이었다. 정유리도 그렇게 불러주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할아버지!”

- 응. 그래.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이제 먹을 거예요! 오늘은 피자나 시켜 먹을까 봐요!”

- 어제도 피자 먹더니만……. 몸에 좋은 것도 챙겨 먹고 그래. 너무 편식이다.

“헷, 알았어요. 할아버지! 아!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릴 게 있어 연락드렸어요!”

- 뭔데?

“정선규 씨 아시죠? 선규 오빠요.”

- 네가 그라운드 제로에 틀어박혀서 방황하며 지내던 것을 끄집어내 줬다는 그 남자 말이냐?

“음……. 너무 뼈 때리는 말이긴 한데, 어쨌든 맞아요!”

정유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녀가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고 했을 때, 마스터 K는 말리지 않았다.

선택도 책임도 오롯이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그리고 강제로 손녀의 껍데기만 데리고 나오고 싶지 않다는 말도 했다.

사실 그도 그렇고, 할머니 역시 모든 결정의 권한을 정유리에게 줬다.

자기 운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고, 책임 역시 무한하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신념이었기에.

다만 속으로는 손녀의 칩거 생활이 일찍 끝나길 바랐는데,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 계기는 바로 강후였다.

- 그래서 그 남자가 왜?

“오빠가 할아버지를 뵙고 싶어해요. 사고 싶은 것도 있고, 여쭙고 싶은 것도 있다고 해요.”

- 나를?

“네. 꼭 뵙고 싶다고 했어요.”

- 혹시 손녀사위로 맞이해 달라고 데려오려는 거냐?

“아앗! 그런 거 아니에요!”

정유리가 얼굴을 붉혔다.

그것과 별개로 정유리가 강후에게 이성적인 호감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 것은 맞았다.

청춘남녀가 외모와 성격에 이끌려 서로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었다.

- 네 눈에는 그 남자아이가 어떻게 보이더냐?

“숨겨진 사연이 많은 사람 같아요. 눈빛이 깊고 슬퍼요. 세상 고통을 다 끌어안은 사람처럼요.”

- 환자냐? 약쟁이가 보통 그런 표정을 많이 짓던데.

“……할아버지.”

솔라키움을 위시한 진정류 식물이나 마약류 식물을 많이 다루는 마스터 K의 흔한 반응이었다.

- 알았다. 손녀가 냉정하게 보고 소개하려는 사람이니, 기본적인 믿음은 있어야겠지.

“겉으로 볼 때는 조금 재수 없으실 수 있어요. 하지만 제게 정말 많은 힘이 돼준 사람이에요.”

- 그래. 그거면 됐다. 오기 전에 연락하거라. 6시간 전쯤에 전화하면 만남은 문제없을 게다.

“와! 감사해요, 할아버지!”

- 용돈 부족하면 얘기하고. 던전도 필요하면 얘기하고. 끊는다. 손님 왔다.

“네!”

전화를 끊은 정유리가 왠지 할아버지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스마트폰에 연신 입을 맞췄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이렇듯, 항상 자신을 응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는 고마운 분이었다.

정유리는 그런 두 분의 기대를 더 이상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헌터로서 다시금 성장의 고삐를 당기는 것. 그것이 정유리가 지금 꿈꾸는 목표이자 열정이었다.

사실상 프리패스에 가까운 허락을 할아버지에게 받았다.

남은 건 강후의 시간이 될 때, 그라운드 제로로 찾아가는 일뿐이다. 그거면 됐다.

* * *

한편 그 시각.

KTX 김천 구미역을 막 통과하고 있을 무렵에 강후는 시끌벅적한 느낌에 잠에서 깼다.

객실 안이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강후에게만 출력되는 메시지창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성좌들의 경쟁이 막 붙은 참이었기 때문이다.

메시지창을 쭉 위로 올려보니, 시끄러움의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었다.

차원 강탈자의 말이었다.

【너희들이 아무리 메인 성좌를 꿈꾼다고 해도, 이 자리에는 격이라는 것이 있다. 모르느냐?】

【계약자가 메인 성좌를 바꾸는 건 자유 의지지. 함부로 네 질펀한 엉덩이를 깔아뭉개고 오래 앉아 있을 자리는 아니란 말이다.】

맞받아친 것은 성좌, 황야의 전략가였다. 두 성좌의 충돌은 예전부터 예고되었던 바이기도 했다.

바로 그때.

【남의 부스러기나 훔쳐먹는 년이나. 되도 않는 망상을 전략이라고 포장하는 년이나. 둘 다 한심한 것들이다.】

대재앙 – 어둠이 이 전쟁에 ‘참전’한 흔적이 있었다.

생각보다 성좌들 사이의 다툼은 꽤 가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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