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전종두 (4)
* * *
“와. 잠깐 기절했었나?”
강후가 눈을 뜬 것은 폭발에 휘말리고 나서 약 1분 정도가 흐른 후였다.
물론 대책 없이 눈을 감았던 것은 아니고, 전종두의 죽음을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했다.
그래서 긴장이 쭉 풀리는 과정에서 눈을 감았는데, 그새 선잠이 들었던 것이다.
전종두가 죽으면서, 그와 계약되어 있던 다섯 성좌가 우르르 강후에게 넘어왔다.
가장 탐냈었던 무정한 탐식가야 말해 입이 아플 정도로 만족스러운 구성이었고.
남은 네 성좌도 기대치가 충분히 높은 성좌들이었다.
【전장의 개】
【체력이 1% 떨어질수록, 근력 보정 수치가 1% 증가합니다.】
‘결국 근력이 화력이랑 연계가 되는 거니까, 나한테도 시너지가 좋은 성좌지.’
강후가 전장의 개 성좌에 대한 총평을 내렸다.
물론 암살자가 체력을 잃을 상황이 생기지 않는 게 좋지만, 생겨도 믿을 구석이 있다는 얘기다.
【인내의 구도자】
【고통을 50% 경감시킵니다.】
“어쩐지. 통각을 아예 없애버린 건 아닌가 싶더라니.”
고통은 적당히 느낄수록 좋다.
아예 느끼지 못한다면 위험하겠지만, 인내의 구도자는 딱 알맞은 만큼만 줄여주는 듯했다.
【바람의 인도자】
【기동력이 25% 상승합니다.】
【야바위의 달인】
【레벨 100 단위로 임의 보상을 활성화하는 돌림판이 생겨납니다. 꽝 혹은 나쁜 보상은 없습니다.】
“오호.”
바람의 인도자야 직관적이니 그렇다 치고, 야바위의 달인은 강후도 처음 보는 성좌였다.
원작에서도 임의성이 짙다고 판단했기에 핵심 캐릭터에게 붙여준 적은 없는 설정이었다.
물론 구상 과정에서 몇 번이고 떠올린 적은 있는 콘셉트였다. 그래서 구현이 된 모양이다.
레벨 100단위로 보상이 활성화된다면, 지금 강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기다.
현재 레벨이 95이기 때문이다.
5만 더 올리면, 야바위의 달인 성좌가 돌림판을 활성화해주는 듯했다.
강후가 다시금 무정한 탐식자에 대한 내용을 살폈다.
그러자 ‘생기 흡수’라는 별도의 능력이 활성화된 것이 보였다.
손이 닿는 대로 상대에게서 생기를 흡수할 수 있는 능력.
자의로 활성화, 비활성화가 가능했다. 게다가 생기 흡수를 진행하려면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전종두와는 궁합이 아주 잘 맞지만, 난 전투 중에는 조금 쓰기 어렵겠네.”
얼추 쓰임새와 활용하는 그림을 떠올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휴식하고 있는 상황이거나, 적을 제압한 이후에는 손쉽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시험 삼아 죽은 전종두의 몸에 손을 얹어보았다.
【생기 흡수를 활성화합니다.】
그리고 비활성화해 두었던 생기 흡수를 활성화하자.
스으으으읍!
“……!”
전종두의 몸에서 생동감 넘치는 기운이 강후의 손을 따라 쭉 빨려 들어왔다.
방금 전투로 상당히 떨어져 있던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바로 흡수되는 체력 포션을 들이킨 느낌이었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특징은 또 있었다.
생기 흡수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억제됐다.
정확히 말하면,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지 않았다. 마나 회복이 더뎌졌던 것이다.
‘상호 작용이 아니라, 반대 작용의 기전이 있는 건가?’
물음표가 찍힌다.
어떤 이유로 생기 흡수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반대 작용을 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직접 체감할 수 있었고, 일단 기억해 둬야 할 단서 하나는 수집한 느낌이었다.
아마 이렇게 알게 된 지식을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 터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관련되어서는 아주 작은 단서라도 있으면 좋다. 연구에 도움이 될 테니까.
수습은 빠르게 진행됐다.
여전히 폐공장에서는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었다.
폭음이 심심찮게 들리고.
비명이 뒤섞이는 것으로 봐서는 어느 한쪽의 완벽한 우세는 아닌 듯했다.
물론 수적 우위는 처음부터 김수경 용병단에 있었으니까 유리한 쪽은 아군일 것이다.
강후는 전종두에게서 모든 아이템을 싹 벗겨냈다.
그중에 바꿔 착용하거나 대체하기 어려운 아이템을 별도로 분류해서 챙겼다.
예상 기대 가치는 200억 원.
전종두를 생포하지 않고 제거하면서 떨어진 보상금만큼을 그대로 채워 주는 가치였다.
그리고 착용해도 괜찮을 4등급의 반지 두 개를 꼈다.
‘세트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칼립스 (좌) - 반지】
【등급 : 4등급】
【근력 + 100】
【근력 + 25 (칼립스의 의지)】
【칼립스 (우) - 반지】
【등급 : 4등급】
【근력 + 100】
【근력 + 25 (칼립스의 의지)】
‘칼립스의 의지’라는 세트 효과의 활성화 덕분에 근력 50을 추가로 얻었다.
아직까지 세트 효과가 있는 아이템을 착용한 적은 없지만.
중장기적으로 보면 이런 계열의 아이템을 집중적으로 찾아 착용하는 것이 좋았다.
장시환 같은 경우는 착용한 열 개의 반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세트 효과를 가지고 있다.
주인공 버프가 무지막지하게 들어간 녀석이다 보니, 아이템 구성에도 사기성이 짙다.
장시환이 강후의 최종 목표이기도 한 만큼……. 이제는 차근차근 세트 효과를 신경 쓸 때가 됐다.
‘레벨 100이 되고, 기본 스킬을 추가하고 나면 그때는 꼭 적요석을 쓰는 게 좋겠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적요석 개수는 총 5개.
스킬 업그레이드에 요긴하게 쓸 수 있는 값비싼 물품인 만큼 아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은 헌터의 세계에서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나중에 쓴답시고 아꼈다가, 비명횡사를 하고 영원히 못 쓰게 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적요석 5개를 활용할 방향성을 정하지 못해 그동안 살짝 뒤로 미뤄온 부분이 있었지만.
이제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더 빠른 기동과 회피.
암살자의 특징을 극대화해줄 수 있는 스킬에 적요석을 투자해야만 한다.
그래야 전종두 같이 자신과 상극인 캐릭터를 만났을 때, 좀 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다.
이번 전종두와의 전투는 녀석의 약점이 뚜렷했기에, 이 정도 수준에서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지금보다 전종두의 레벨이 50 정도만 높았어도, 반응이 조금만 빨랐어도 결과는 달라졌겠지.
“무조건 100.”
강후가 몸을 일으켰다.
이번 의뢰가 끝나는 대로, 모든 의뢰 수행을 중단하고 레벨업에만 매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자. 전종두. 바깥 구경할 시간이야.”
전종두의 시체.
그 머리채를 움켜쥔 강후가 그를 질질 끌고,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시작했다.
듬직한 용병대장, 전종두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전력으로 싸우고 있을 오쇼 용병단원들에게.
그의 시체로 가장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가 된 듯했다. 사기와 전의를 꺾을 시간이다.
* * *
“…….”
“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던 폐공장 전체의 시간이 멈춰버린 것은 그로부터 1분 후였다.
폐공장 2층의 한쪽 난간에서 들려온 요란한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을 때.
눈을 돌린 헌터 모두가 볼 수 있었다.
턱 아래가 흔적도 없이 터져 없어지고, 사타구니 사이가 넝마가 되어버린 전종두의 시체를.
그리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전종두의 얼굴을 짓밟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강후의 발이었다.
“X발, 대장이…….”
“저렇게 쉽게 죽었다고?”
“저 새끼는 또 누구야.”
가장 먼저 경악한 것은 오쇼 용병단 소속의 헌터들이었다.
전종두는 그들이 ‘신’이라고 생각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인물이었다.
쇠파이프나 알루미늄 배트 따위는 심심풀이로 찌그러뜨리고 접어댔던 것이 전종두다.
우스갯소리로 오쇼 용병단 전원이 그에게 달라붙어도, 모두 접혀 죽고 말 것이라고 했었다.
그만큼 대장 전종두를 믿었고, 그가 가진 힘의 파괴력을 믿었다. 너무 당연한 신뢰였다.
하지만 다수의 적도 아니고, 일개 헌터에게 전종두가 죽음을 맞이한 것은 충격이었다.
그것도 한 곳에 치명상을 입고 죽은 그림이 아닌.
얼굴과 하체의 중심이 걸레짝이 되어버린, 정말 괴기스러운 죽음이었다.
강후의 스킬인 ‘혈화’의 존재와 그 위력을 알지 못하는 헌터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후가 암살계가 아닌, 전혀 다른 계열의 헌터로 보이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그랬으니까.
“너희 대가리가 뒈졌어. 그래도 열심히 싸워야 하는지는 잘 생각해 봐.”
투욱!
강후가 무심히 한마디를 던지고는 전종두의 시체를 발로 툭 밀쳐냈다.
그러자 난간 아래로 떨어진 전종두의 시체가 볼썽사납게 얼굴부터 바닥에 꽂혔다.
와드드득!
코와 이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지만, 어차피 죽은 터라 아무도 신경 쓰진 않았다.
“하…….”
오쇼 용병단의 헌터 중 한 명이 터뜨린 탄성에 모든 구성원이 느낀 상실감이 담겨 있었다.
전종두의 등장만을 믿으며 버티고 버텼던 그들이었다.
처음부터 약속이 된 기다림이기도 했다. 전종두가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고 나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다림의 대가는 희망이 아닌 절망이었다.
이제는 타이밍의 문제가 됐다. 언제 상대에게 항복하느냐의 문제 말이다.
‘전개가 이렇게 극적으로 갈 줄은 몰랐군.’
한편 놀란 것은 김수경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는 김수경 용병단 전체가 놀랐다.
강후가 전종두를 찾아서 도모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전종두를 죽여서 끝을 볼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를 꾀어서 밖으로 나온 다음, 용병단과 협력하는 그림을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 김수경의 바로 뒤에 있는 헌터들이 유사시에 강후를 지원하기 위해 편성된 정예 전력이었다.
한데 계획이 무색하게 강후는 홀로 전종두를 끝장내 버렸다.
전종두를 쉽게 도모하기가 힘든 탓에 판을 크게 짜고, 외부 용병까지 끌어온 것인데…….
거창하게 세운 제거 계획이 헌터 한 명의 활약으로 끝나 버리니 어안이 벙벙했다.
‘레벨 100도 안 되는 헌터가 레벨 350을 잡아먹는 그림이 가능한가?’
김수경은 생각이 열린 사람이었다. 레벨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늘 변수는 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레벨 100이 350을 상대로 무승부도 아닌 완승을 거둔 것은 그 이상의 영역이었다.
이예린이 강후를 레벨 하나만으로 재단하지 말라고 몇 번이고 강조하기는 했었다.
그때는 강후에 대한 신뢰가 담긴 어느 정도의 립서비스가 있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아니었다.
이예린은 있는 그대로 이야기를 해 준 것이었다. 김수경 본인이 왜곡해서 들었을 뿐.
일단 감탄은 여기까지다.
강후가 성공적인 승리를 위해서 멋지게 판을 짜놓은 만큼, 신속하게 수습할 필요가 있다.
김수경이 소리쳤다.
“너희 대장은 뒈졌다! 무의미하게 저항하지 말고 투항해라! 개죽음당하고 싶지 않다면!”
쩌렁쩌렁 울리는 김수경의 목소리가 폐공장 전체를 뒤덮었다.
사자후 스킬이 따로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격렬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강후는 2층 난간에서 투척을 위한 연습용 단검 하나를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차해서 다시 전투가 시작된다면, 성좌 강탈에 욕심이 나는 헌터가 여럿 있어서였다.
그 녀석들을 노릴 참이었다.
하지만 용병단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버팀목이자 대들보였던 전종두가 죽은 마당에.
곧바로 저승에 직행할 것이 뻔한 객기를 부릴 헌터는 없었다.
“전 항복하겠습니다.”
“저도 항복하겠습니다!”
“공격하지 마쇼! 제발!”
“무기를 내려놓겠소!”
오쇼 용병단은 그날부로 해체됐다. 전종두의 죽음으로 허무하게 맞이하게 된 끝이었다.
그리고 이 전투의 시작과 끝에는 강후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누구도 크나큰 기여와 공에 대해 반박할 수 없을, 강후의 완벽한 활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