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88화 (88/304)

88화 전종두 (3)

* * *

“얄팍한 개수작 부리지 마, 이 새끼야!”

폭주 기관차처럼 온몸이 벌겋게 달아오른 전종두가 강후의 그림자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하나고 그림자는 여럿이기에 강후의 입장에서 피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전종두에게서 가장 먼 그림자를 선택해 이동을 마쳤다. 늘 그랬듯 완벽한 기동이었다.

하지만.

후웅!

그 순간에 강후는 선명하게 굉음을 들을 수 있었다. 묵직한 무언가가 날아갈 때 들리는 소리다.

“망할.”

상황을 살피니, 반대편에 있던 전종두가 방금보다 더 가속된 상태로 돌진하고 있었다.

상상한 것 이상으로 너무 빨라서 강후도 재차 스킬을 쓸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이었다.

“크하하하!”

공포 영화처럼 가까워지며 큼지막해지는 전종두의 얼굴이 시야에 꽉 차게 들어왔다.

쿠웅!

그리고 충돌이 일어났다.

강후가 보호 결계를 펼치며 전종두의 돌격을 막았지만, 피해 없이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크윽!”

몸이 붕 떴다.

동시에 충돌 시작점인 팔꿈치에서부터 시작된 고통의 파도가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정신 나간 새끼다.’

강후의 기준으로 ‘극찬’에 가까운 욕이 나왔다. 전종두. 녀석은 명성대로 힘이 장사였다.

공중에 뜬 몸이 벽으로 날아가는 동안, 전종두가 양팔을 앞으로 뻗으며 자세를 취했다.

잡기 자세다.

튕겨 나오거나, 혹은 벽을 타고 떨어질 강후를 붙잡고 그 자리에서 끝을 보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후의 정신이 말짱하고, 타격을 입긴 했지만 부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교의 장막】

【도약】

그래서 기교의 장막을 깔며, 은신에 돌입한 상태에서 도약 스킬로 벽을 딛고 현장을 빠져나왔다.

다음 대응에 대한 생각이 정리되어 있었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바로 붙잡혀 죽을 뻔했다.

“실력이 제법이군. 궁지에 몰려도 빠져나가는 옵션을 꽤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입꼬리 내려, 새끼야.”

느닷없이 여유를 부리며 자신에게 엄지를 치켜세워 보이는 전종두에게 강후가 욕을 날렸다.

자신을 보며 활짝 웃고 있는 것이 상당히 기분 나빴다. 살짝 자존심 상하는 면도 있었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투가 재밌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종두 같은 콘셉트의 캐릭터가 강후에게는 가장 까다로운 적이기 때문이다.

암살이란, 모름지기 일격필살로 상대에게 중상을 입히거나 목숨을 끊을 수 있어야 한다.

한데 무지막지한 덩치와 완력을 가진 이런 부류의 헌터들은 쉽게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한두 번의 유효 공격을 당하더라도 다음이 있는 다른 직업군에 비해서.

전종두 같은 녀석에게는 붙잡히면 죽음이었다.

이런 녀석들은 적을 잡게 되는 상황이 일격필살의 시작점이다. 방금 노렸던 상황 말이다.

【도약】

파앗!

강후가 전종두에게 돌진했다.

소극적이면서 방어적인 전투로는 전종두에게 빈틈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다.

설령 만들어내더라도, 접근하기 전에 자세와 전열을 정비해서 대비할 공산이 크다.

결국 적극적으로 파고들면서 반응을 유도해야, 능동적으로 빈틈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이 광전사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상상 이상의 힘을 내기에 위력적이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빈틈을 노출하기 때문이다.

광전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몸이 일반적인 상식과 통제를 벗어나 신속하게 움직여서다.

“훗.”

정직하게 정면에서 치고 들어오는 강후를 보며 전종두가 웃었다.

암살자 직업군의 헌터도 꽤 많이 상대했던 자신이다. 이런 정석적인 패턴은 차고 넘치게 봤다.

아마 들어오는 척하다 뒤로 물러서거나, 아니면 아까 같은 이동 스킬을 쓰려는 거겠지.

어지간한 단검 공격에는 감흥조차 없는 전종두가 팔을 쭉 뻗었다. 대놓고 잡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그때.

【귀요미!】

강후는 그간 한 번도 쓴 적 없는 스킬을 썼다.

전투는 다양한 스킬 옵션의 싸움 아닌가?

이 스킬은 나름의 가치가 있었다. 처음에는 이름부터 거부감이 들어서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또잉! 뚜잉!

이내 전종두의 전방에 만들어진 사람 크기만 한 중형 슬라임이 시야를 꽉 채웠다.

강후가 무슨 짓을 해도 일단 잡겠다는 생각으로 뻗었던 전종두의 팔이 슬라임의 몸으로 들어갔다.

“X발!”

생각보다 쫀득쫀득(?)한 슬라임의 몸은 걸쭉한 코딱지처럼 전종두의 팔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그 사이, 슬라임을 만들면서 녀석을 타깃으로 횡 이동을 성공시킨 강후는 전종두의 뒤에 있었다.

어찌 보면 뻔한 후방 이동의 공식이지만.

중간 과정에서 슬라임 생성이라는 새로운 옵션을 집어넣으니, 뻔하지 않은 변수가 됐다.

‘아냐. 여기까지도 뻔해.’

하지만 강후는 자만하지 않고, 한 번 더 상황을 비틀기로 했다.

슬라임에게 꼬인 시점에서 전종두는 당연히 자신이 뒤에 자리 잡을 것을 예상했을 것이다.

【얕은 혼돈】

그래서 조용히 얕은 혼돈을 전종두에게 걸었다.

방향 감각 상실.

주변 시야 왜곡.

괴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을 이용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녀석에게 꽤 좋은 선택지였다.

“X미!”

퍼어엉!

전종두가 슬라임을 패대기쳤다.

얼마나 강력한 힘인지 슬라임이 통째로 터져, 하늘에서 젤리 같은 방울이 쏟아져 내릴 정도였다.

본체에 달린 똘망똘망한 슬라임의 눈은 바로 X자가 되어, 안타까운 죽음을 알렸다.

여기까진 좋았다.

전종두가 바로 시선을 돌려 뒤쪽, 정확하게는 측면 후방에 있는 강후의 존재를 인지했다.

어차피 암살자 직업군이 ‘뒤를 잡는’ 상황이야 셀 수 없이 경험해 봤으니 당황스럽지도 않았다.

우악스럽게 팔을 뻗었다. 거리가 가까우니 잡는 것은 금방이다.

바로 그때.

휘잉!

“……?”

전종두는 또렷하게 보이던 강후의 모습이 손이 닿자마자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였는데, 보인 것이 아니었다.

설마 환각인가?

아니면 감각 교란?

이런 방식으로 왜곡을 유도하는 정신 스킬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암살자가 이런 스킬을 쓴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바가 없었다.

광전사 계열인 자신이 마법 스킬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말이다. 연계성이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촤아아악!

“크아아아악!”

전종두는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위에서 치밀어 올라오는 고통을 느꼈다.

바로 사타구니였다.

처음에는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났고, 이어서 뜨거운 불길과 같은 고통이 상처에 덧씌워졌다.

극심하게 느낀 고통 덕분에 역설적으로 방금 전종두에게 걸렸었던 얕은 혼돈의 방해가 풀렸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벌어진 후였다.

전종두는 묵묵히 거구의 몸뚱이를 지탱해왔던 하체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단순 사고로 치부하기에는 사타구니를 공격당하면서 입은 피해가 컸다.

‘계속. 더.’

한편, 강후는 더욱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다.

대참수 스킬이 제대로 먹힌 덕분에 방금의 일격은 매우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제아무리 단단한 몸이라고는 해도, 몸 전체가 강철 같은 단단함을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으로 ‘연한’ 부위는 존재한다. 강후는 처음부터 그런 부위에 노림수를 두고 있었다.

【시야 강탈】

바로 전종두에게서 시각을 빼앗았다.

평소 같으면 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스킬.

하지만 지금은 하체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상황일 터.

이럴 때는 정신계 공격이 훨씬 더 잘 먹혀들어 간다.

전종두가 육체적으로는 완성된 헌터일지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는 분명 빈틈이 있었다.

“이 새끼가……!”

후웅! 화앙!

독기가 잔뜩 오른 전종두가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휘저었다.

뭐라도 하나 잡히기만 하면, 찢어발기겠다는 분노가 담긴 공격이었다.

하지만 되도 않는 허우적거림에 당할 강후가 아니었다.

강후는 숨을 죽인 채로 전종두를 살폈다.

상황이 유리해 보이기는 해도.

자칫 잘못해서 전종두에게 붙잡히면, 생기를 모조리 빨리고 회복을 돕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역전 한판승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상황이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그때.

“덤비라고! 덤벼!”

우악스럽게 손을 뻗으며 여기저기를 움켜쥐려던 전종두의 상체가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체가 지탱하는 능력이 평소와 다르다 보니, 상체의 움직임을 쫓아가지 못한 모양새였다.

몸의 무게 중심이 흔들렸을 때.

재빠르게 수습하면 이내 중심을 찾지만, 그렇지 못하면 몸은 운동 방향을 그대로 따라가게 된다.

지금의 전종두는 후자였다.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상대적으로 얼굴을 앞으로 내민 그림이 되었다.

【납치】

강후가 승부수를 던졌다.

붙잡히면 죽는 전종두에게 가장 신중하게 써야 하는 스킬이지만, 지금은 그럴 가치가 있었다.

“허억!”

암살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스킬의 연속에 전종두가 또 한 번 당황했다.

당황한 것만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지만, 육중한 몸이 통째로 들려서 강후에게 향하는 중이었다.

시야 강탈의 시야 차단은 아직 풀리지 않았고, 전종두의 시각 정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강후가 몸을 낮췄다.

그리고 자신의 앞으로 소환당한 전종두를 올려다보았다.

‘턱.’

일격으로 노릴 지점이 보인다.

혈루를 꽉 움켜쥔 강후가 대참수 스킬과 연계하며, 그대로 단검을 위로 뻗으며 일어섰다.

푸우우우욱!

뼈와 근육, 살을 뚫고 들어가는 묵직한 느낌과 함께 혈루가 전종두의 혀와 입천장을 관통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거대한 몸을 가진 전종두지만, 모든 부위가 단단한 것은 아니었다.

“끄르르륵……!”

이윽고 시야 강탈의 효과가 사라진 전종두가 강후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혈루가 얼굴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지만, 아직 전종두는 죽지 않았다.

바람만 불어도 터질 것처럼 전종두의 눈알이 팽창했다.

어떻게든 강후를 붙잡아서 죽이겠다는 독기가 덧씌워진 전종두는 야차 같았다.

터업!

“망할.”

전종두에게 양팔을 잡혔다.

단검이 얼굴 안을 꿰뚫은 와중에도 전종두는 본래의 괴력을 잃지 않았다.

스으으으으읍!

이내 몸의 피가 한쪽으로 쏠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기운이 쫙 빠지기 시작했다.

전종두의 성좌 능력 중 하나.

생기 흡수가 시작된 듯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생기뿐만 아니라, 몸의 마나까지 통째로 빨리는 느낌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후의 양팔을 붙잡은 전종두가 그 상태로 하늘 높이 강후를 들어 올렸다.

인간 놀이기구가 있더라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순식간에 몸이 붕 떴다.

어지간한 헌터였으면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에 전종두는 버티고 있었다.

오히려 반격을 당할 판이었다.

이 상태로 전종두의 괴력이 더해진 내려치기가 시작되면, 말린 북어 신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몸이 앞뒤로 곱게 잘 다져진 고기처럼 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남아나는 게 없을 것이다.

“미친 새끼.”

강후가 혀를 내두르며, 괴력을 뽐내고 있는 전종두에게 욕을 내뱉었다.

조금의 시간만 더 줘도, 강후도 덩달아 부상을 입을 판이었다. 아니, 부상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래서.

【혈화】

마무리 스킬을 썼다.

전투 초반에는 이렇다 할 상처를 내지 못해 쓸 수 없는 스킬이었지만.

지금은 사타구니와 아래턱에 깊은 상처와 다량의 출혈을 유도한 상황이라 ‘재료’는 충분했다.

퍼펑! 퍼펑! 퍼퍼퍼펑!

대폭발이 일어났다.

다만 전종두에게서 벌어진 피의 폭발에서 이번만큼은 강후도 자유롭지 못했다.

늘 멀찍이서 멋지게 끝을 보던 혈화의 전개와 달리.

이번에는 타깃이 될 대상과 한 곳에 뒤섞여서, 피와 살점의 폭발을 경험해야 했던 것이다.

앞서 내뱉었던 ‘미친 새끼’라는 표현에는.

끝까지 쉽게 끝나지 않도록 만든 전종두의 무지막지함에 질린 감정도 함께 담겨 있었다.

‘며칠 푹 쉬어야겠군.’

폭발에 휘말려 같이 만신창이가 될 몸을 예견한 강후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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