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전종두 (1)
* * *
베주미예와 멋들어지게 싸움을 벌인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따뜻한 물결’의 성좌 전원이 당신에게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그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력을 소모하여 당신에게 상당한 버프를 후원합니다.】
【10초당, 체력 1% 회복.】
‘오호.’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온건한 성좌들의 모임인 따뜻한 물결이었다.
지난 성좌 시험 때도 제법 많은 후원을 해 줬는데, 이번에는 다른 형태의 버프를 후원했다.
10초에 체력 1% 회복.
결코 적은 양은 아니다.
회복 수단이 아쉬울 경우엔 이것도 아주 큰 도움이 된다.
게다가 자는 동안에도 계속 적용이 되기에 수면과 연계하면 특히 효과가 좋았다.
자고 일어나면 대부분의 체력이 회복된다고 말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셈이다.
【대재앙 – 어둠이 베주미예에게 선사한 완벽한 죽음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당신의 잠재력이 훨씬 더 높은 것 같다고 평가합니다.】
‘아무렴. 당연히 그래야지.’
대재앙 – 어둠의 칭찬도 더해지니, 어깨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황야의 전략가도 비슷한 칭찬으로 강후의 기분을 더 좋게 했다.
다만 평소 같았으면 참지 못하고 한마디 거들었을 차원 강탈자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질투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는 걸까? 조용하니 괜시리 다른 생각이 들었다.
“쪽문 쪽으로 빠져나온 베주미예를 잘랐다! 좀 더 강하게 밀어붙여! 정문도 해 볼 만하다!”
한편, 강후가 멋지게 베주미예를 제압한 것을 확인한 김수경이 좀 더 공격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일부 전력을 강후가 돌파한 쪽문으로 돌릴까 하다가, 이내 생각을 접었다.
정면에서의 교전이 생각 이상으로 치열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쪽문 방어가 거의 안 되고 있음을 뜻했다. 적 전력이 정문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니까.
이 상황에서 핵심 전력이 쪽문 쪽으로 빠지면, 괜히 그쪽이 포커싱될 가능성이 컸다.
김수경은 베주미예를 일대일로 제압한 강후의 실력을 믿고, 쪽문 루트를 맡길 생각이었다.
안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강후는 능숙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그때.
“트랩이다!”
김수경 용병단의 단원 중 하나가 깊숙하게 안으로 접근하려다가 다급히 소리쳤다.
쪽문으로 들어가려던 강후도 그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트랩이 있다는 것은 곧 폭발이 일어날 것을 의미한다. 과연 희생을 막을 수 있을까?
지이잉!
그 순간, 가장 최전방으로 이동한 김수경이 양손을 공중에 뻗으며 스킬을 전개했다.
강후는 쪽문에서 흘러나올 후폭풍을 버텨내기 위해, 곧바로 보호 방벽을 전개했다.
그리고.
쿠콰콰콰쾅!
트랩의 폭발이 일어났다.
화력이 상당했다.
이 정도 화력이라면 근거리에서 노출된 헌터는 부상을 면할 수 없을 상황.
투웅! 투웅! 터엉!
하지만 김수경이 펼친 거대하고도 길쭉한 방어벽은 완벽하게 폭발을 받아냈다.
희생자? 없었다.
심지어 부상을 입은 용병단원도 없었다. 깔끔하게 트랩의 폭발을 막아낸 것이다.
‘저건 탐나네.’
강후의 눈빛이 빛났다.
김수경도 괜히 네임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어에 있어서만큼은 특화된 헌터가 맞다.
아마 김수경과 일대일을 하면.
김수경이 자신을 죽이지는 못해도, 방어 능력은 확실해서 그가 죽을 일은 영원히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앙! 타앙!
한편 그간 들리지 않던 총성이 폐공장 안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각기 다른 총성인 것을 보니, 마탄 저격수가 최소 두 명은 있는 모양이었다.
“저격에 노출 안 되게 조심해! 그리고…….”
김수경이 부하들에게 신속히 명령을 내리며, 강후에게 추가 요청을 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강후는 쪽문 안으로 진입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빠르군.’
알아서 상황을 판단하고.
리더의 시야로 상황을 공감하고 자신이 할 일을 빠르게 찾는 듯한 느낌.
그런 느낌이 강후에게 물씬 들었다. 굳이 뭔가를 부탁하지 않아도, 강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잠시 후 정문 쪽에서 내부를 보고 있기에 볼 수 있는 몇 개의 구역이 김수경의 눈에 들어왔다.
폐공장을 지키고 있는 오쇼 용병단에게는 사각지대인 곳이다.
강후는 어느새 2층으로 올라가서는 빛이 잘 닿지 않는 경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노리고 있는 타깃은 2층에 자리를 잡은 마탄 저격수였다.
마탄 저격수의 장점은 일방적으로 고점을 선점하고 상대를 노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은 저격에 집중하기 위해 자신의 위치에 대한 집중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애초에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스스로 노출될 가능성을 낮게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으니, 자신만의 저격 포인트로 삼는 것이다. 그것이 맹점이다.
‘정말 빠르군.’
김수경은 방금 2층의 초입에 막 들어선 듯했던 강후의 위치가 순식간에 바뀐 것을 보았다.
도약, 가속류 스킬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스킬을 가진 것 자체야 이상할 것이 없지만, 강후의 레벨을 생각하면 대단히 이상한 것이 맞았다.
아무리 냉정하게 생각해도, 강후의 스킬 구성과 화력은 레벨과 괴리가 너무 심했다.
사실 너무라는 단어로도 표현이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 차라리 말이 안 된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때.
푸욱. 푸욱.
딱 두 번의 공격이 있었다.
그리고 목 뒤로 붉은 피를 철철 쏟아내며, 저격수 둘이 덧없이 2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깔끔한 제압이었다.
강후의 존재를 아예 인지하지도 못한 저격수 둘은 손도 못 쓰고 목숨을 잃었다.
강후가 무영 스킬에 기교의 장막까지 더해가면서 기척과 모습을 철저하게 숨겼던 상황.
저격에 집중하고 있었던 저격수의 맹점까지 맞물려, 둘은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대상을 죽이고, ‘고독한 명상가’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대상을 죽이고, ‘게으른 천재’와의 계약을 탈취하였습니다.】
‘수입이 짭짤하네.’
강후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고독한 명상가는 정신 집중력을 10% 증가시키는 버프를 제공하는 성좌였다.
정신 집중력의 증가는 곧 스킬 캐스팅 속도의 향상을 뜻한다.
극적인 체감을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분명히 필요한 절대 시간을 줄여준다는 장점은 있었다.
게으른 천재는 마나의 회복력을 2배 증가시키는 버프를 제공하는 성좌였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과의 시너지를 생각하면,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런 이유로 강후가 폐공장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두 저격수를 노렸던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적이고 죽여야 하는 존재라면, 쓸만한 성좌를 강탈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휘리릭! 푹!
시간차를 두고 전광비도로 날린 연습용 단검이 1층에 있던 오쇼 용병단원의 뒤통수를 뚫었다.
동시에 1층으로 떨어진 저격수의 시신이 눈앞에 보이자, 오쇼 용병단원들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저격수가 있던 위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불안감이 순식간에 증폭된 탓인지 폐공장 내의 공기가 갑자기 확 바뀌었다.
“밀어붙여!”
김수경이 그 흐름을 귀신같이 읽고는 좀 더 공격적으로 용병단에 주문했다.
게다가 뒤늦게 합류한 2팀이 후문 루트를 뚫으면서, 기세가 확실히 뒤집혔다.
‘전종두 이놈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다만 강후는 상황이 이렇게까지 흘러감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전종두의 행방이 궁금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뀌긴 했어도, 여전히 오쇼 용병단은 호각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종두가 냅다 도망친 것도 아니었다. 그랬다면 김수경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것이다.
전종두의 도주를 예상하고 폐공장 주변의 모든 루트에 보초를 깔아뒀기 때문이다.
전종두는 강후 같은 암살자 계열이 아니기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도망친 게 아니라면.
호각세라고 하더라도 언제 전황이 바뀔지 모르는 이곳에서 전종두의 등장이 늦는 것이 이상하다.
‘이건 이유가 하나밖에 없는데.’
짚이는 바가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도 전장으로 나오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전투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반드시 시간이 필요할 경우다.
원작에서 나온 수많은 설정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 무협식 표현을 빌리자면 흡성대법 같은?
전종두가 헌터나 몬스터의 육신으로부터 힘을 얻는 구조의 광전사라면 예측이 들어맞는다.
그렇다면 지금쯤 예상하지 못한 김수경 용병단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을 터.
폐공장 안의 어딘가에 전종두가 몸을 숨기고 있을 만한 공간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집중해서 살폈다.
빨리 찾을수록 좋다.
광전사 계열은 대외적으로 알려진 레벨이나 전투력을 아득히 뛰어넘는 위력을 낼 때가 많다.
그것이 광전사 직업군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변수를 줄일 필요가 있다.
‘보인다.’
그때, 2층 구석 쪽에 잡동사니와 집기가 잔뜩 쌓여 있는 공간 사이로 옅은 불빛이 보였다.
언뜻 보면 주변 조명에 뒤섞여, 다른 빛이 있는지 쉽게 감지하기 힘든 위치였다.
하지만 적의 공격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에서 차분하게 살피니, 약간의 틈이 보였다.
쿠콰콰쾅! 콰콰쾅!
“크윽.”
계속 트랩이 발동되고 있다.
오쇼 용병단원들이 구축한 방어선을 뒤로 물리면서, 트랩이 김수경 용병단에게 반응하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어가는 흐름이다. 전종두에게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 분명하다.
“…….”
강후가 다시 기교의 장막을 활용하며,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은신 상태에 들어갔다.
빠르게 틈 앞까지 접근하니, 마치 안에는 아무것도 없는 듯이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불빛은 은은하게 있었지만.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미세한 온기조차 흘러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럴 줄 알았다.’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결계가 촘촘하게 구축되어 있었다.
어떤 반응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침입자를 대비한 공격형 결계일 가능성이 컸다.
마나를 응축시켜 폭발을 일으키거나, 혹은 고열을 발생시켜 화상을 유도하는 식이다.
유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도 이 공간에 구축해 둔 것을 보면 중요한 곳임은 확실했다.
꾸욱.
강후가 혈루를 조금 더 짧게 움켜쥐었다.
전투 상황 발생 시, 빠르게 전종두를 공격하기 위해서였다. 경로를 최대한 짧게 잡아야 한다.
‘광전사 계열과 제대로 싸워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군.’
예전에 조영재와 싸운 것이 광전사 헌터와의 첫 전투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치긴 애매했다.
녀석은 전종두와 비교하면 새 발의 피, 아니 발톱의 때만도 못한 실력을 가진 헌터였기 때문이다.
반면 전종두는 광전사 계열이고 동시에 잡기 능력에 특화된 존재.
앞서 싸운 베주미예 저리 가라 할 정도의 덩치와 말도 안 되게 두꺼운 팔뚝을 가진 ‘괴물’이었다.
그래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전종두에게는 일단 붙잡히면 다음이 없다.
정해진 결말이 있기는 하다.
허리든 목이든 어디든 폴더폰처럼 접혀서, 다시 펴지지 않는 채로 맞이하는 죽음 말이다.
한마디로 이승 하직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