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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83화 (83/304)

83화 여수행 (5)

* * *

정유리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은 강후가 그녀를 만난 곳은 서울대공원이었다.

아직 김수경 용병단과 합류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었기에 시간적인 여유는 충분했다.

다만 정유리의 제안 덕분에 강후는 팔자에도 없던 동물원 데이트를 하게 됐다.

원작의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이런 자잘한 데이트 자체와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동물원에 가서 동물을 보면, 언제 어떻게 잡아먹힐까를 생각하는 캐릭터였으니까.

어쨌든 정유리가 동물원에 가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강후는 그녀와 함께 서울대공원 초입에서부터 코끼리 열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재밌지? 재밌지?”

“…….”

“막 설레지 않아? 아직 동물들도 못 봤는데, 난 벌써 기대되는데? 엄청 떨려!”

“날이 진짜 좋기는 하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정유리의 마음을 따라가기에는 강후의 마음이 너무 닳아 있었다.

그래도 날씨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좋은 것 같아, 자연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게 됐다.

소풍 가기 딱 좋은 날.

소설에서 그런 표현을 썼을 때, 딱 그때 떠올렸던 푸른 하늘이 오늘의 하늘이었다.

“뭐 하고 지냈어?”

“던전. 휴식. 의뢰. 휴식.”

“일, 집, 일, 집이란 얘기잖아?”

“헌터는 원래 그렇게 살 수밖에 없잖아. 도태되지 않으려면 채찍질을 계속할 수밖에.”

성장에 욕심이 없는 헌터였다면 적당히 레벨을 올린 뒤에 만만한 던전이나 돌아다녔겠지만.

강후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더 높은 세상, 순위, 서열을 꿈꾸는 헌터에게 휴식은 사치다. 많은 헌터의 공통된 생각이다.

“오늘 하루는 어깨에 힘 좀 빼봐! 너무 긴장하고 있잖아!”

강후의 어깨를 툭툭 치는 정유리의 손길에는 들뜬 감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그런 정유리가 부러웠다.

이 빌어먹을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그런 순수한 감정이 아예 삭제되어 있다.

원작에서 혹시나 다른 방향으로 새어나가는 빌런이 될까 싶어 걱정했던 탓에.

어지간한 긍정적인 감정은 전부 말살을 시켜놨기 때문이다.

그나마 웃을 수 있는 입과 근육이라도 살려둔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서 헛웃음이든 쓴웃음이든, 아니면 기뻐서 짓는 웃음이든 미소를 지을 수는 있다.

이것까지 없앴으면, 그냥 인간을 쏙 빼닮은 로봇 신세를 면할 수 없었을 터다.

“아이스크림이나 먹을까?”

“오! 아이스크림도 먹을 줄 알아? 얼굴만 봐서는 아이스크림만 먹어도 감기 걸릴 것 같은데?”

“얼굴이 어떤데?”

“내일 죽을 날을 받아놓은 사람처럼 창백하잖아.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따뜻한 카페 라떼를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야.”

“그래서 안 먹는다는 건가?”

“아니, 아니! 먹어야지! 사 준다면 무조건 먹는 거지!”

“바닐라? 초코? 딸기?”

“바닐라!”

“바닐라 아이스크림 두 개 주세요.”

주문하면서도 참 어색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 편한 상황이 강후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끊임없이 순수하면서도 따뜻한 기운을 뿜어내는 정유리의 존재가 좋았다.

아이스크림값을 지불하고, 아이스크림을 받아든 두 사람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 곳이다 보니, 느긋한 여유를 갖는 것이 가능했다.

강후가 슬쩍 운을 뗐다.

“생각보다 일찍 그라운드 제로에서 나왔네.”

“응. 그때, 선규 씨…….”

“스물아홉 살이야.”

“아! 그럼 오빠라고 부르는 게 편하겠네. 선규 오빠와 헤어지고 나서 던전을 여기저기 많이 다녔거든.”

“그라운드 제로 안에 개인적으로 공략할 수 있는 던전이 있나?”

“뭐, 정확히는 내 소유는 아니지만 우리 할아버지가 가진 던전은 좀 있지?”

예상하지 않았던 이야기가 불쑥 튀어나온다.

정유리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강후도 모른다.

다만 소유한 던전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력이나 실력이 있음을 뜻한다.

원작의 정유리에 대해서 조형된 부분은 그녀 자체밖에 없는데, 가족은 누구일까?

정유리가 말을 이었다.

“어쨌든 오빠에게 자극을 많이 받아서 열심히 던전을 공략했어. 그리고 생각했어.”

“세상에 나가고 싶다고?”

“응. 한 번 부딪혀봐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생각보다 괜찮은 헌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모자라지 않는!”

“깨달음을 얻었군.”

“맞아. 부정적인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난 거지!”

잘 됐지 싶었다.

정유리는 충분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강후가 은근하게 그녀가 세상에 나올 것을 종용한 것도 그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장기적으로는 정화 길드에 맞설 대항마를 만들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아마 정유리는 달리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잘 성장할 것이다.

레벨도 강후보다 훨씬 높은 만큼, 한참 앞쪽의 출발선에서 달려 나가고 있는 셈이다.

“레벨은 얼마나 올랐지?”

“10 정도? 많은 건지 적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던전에서 살았나 보네.”

“응, 맞아! 호호호!”

레벨 250의 헌터가 레벨 10을 이렇게 단기간에 올리는 것은 쉽지 않다.

저 정도의 성장이라면 할아버지라는 존재가 판을 깔아준 던전이 꽤 괜찮은 곳일 가능성이 높다.

더 나아가 할아버지가 다양하게 도움을 줬을 가능성도 있다. 조력자를 붙여줬거나.

할아버지가 누굴까.

질문을 참고 싶은 마음보다 호기심이 훨씬 더 앞섰다.

다만 질문을 하기 전에 정유리가 먼저 말을 덧붙였다.

“이제 다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 물론 채관형에게 가진 복수의 마음은 그대로지만.”

“세상에 맞서보고 싶은 의지가 생겼다고 보면 되겠지.”

“맞아. 아무 생각 없이 복수하지는 않을 거야. 생각을 많이 정리했어. 조용히 칼을 갈 거야.”

시종일관 밝았던 정유리의 눈빛에 살기가 어렸다.

그것은 지켜보던 강후도 순간적으로 흠칫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살기였다.

“먹어. 녹겠다.”

“에휴! 순진한 동물들이 가득한 동물원에서 내가 뭔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미안해, 오빠.”

“동물원이 성역(聖域)도 아니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는 거지. 근데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강후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 아, 우선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할아버지는 아냐. 나를 입양해 주신 할아버지야!”

“양부의 개념이 아니라 양조부라는 뜻인가?”

“응, 맞아. 친엄마, 친아빠의 자리를 빼앗고 싶지 않다고 하셨어. 그대로 두고 싶다고 하셨거든.”

“그렇군. 내가 괜한 질문을 한 건가?”

“아냐, 전혀! 친부모를 원망하거나 그렇진 않아. 어쨌든 할아버지는 그라운드 제로에 계셔.”

“그라운드 제로?”

“응. 오빠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솔라키움 재배를 하고 계시거든!”

“아, 그분이?”

“응! 내 할아버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정유리의 할아버지가 마스터 케이(K)인 것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솔라키움을 재배할 수 있고.

자신의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해서 조언을 구해볼 수 있겠다 싶었던 사람.

그 사람이 정유리의 양할아버지라니. 인연이란 이렇게 의외의 형태로 연결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원작자로서 원작의 내용을 모두 꿰뚫고 있어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무의식 혹은 원작에서 다뤄지지 않은 영역이 이런 식으로 알아서 끈을 만들어내곤 한다.

내가 쓴 원작의 세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있다니.

물론 굵직한 뼈대와 기둥이 될 메인 스토리는 알고 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흥미로웠다.

적당한 긴장감이 들었다.

모든 것이 생각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말, 말 그대로 적당한 긴장감 말이다.

어쨌든 마스터 K가 할아버지라면, 정유리의 가치는 강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아진다.

강후가 잠시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자, 정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왜? 할아버지랑 안 좋게 엮인 일이 있는 거야?”

“아냐. 오히려 반대지. 종종 필요한 것을 마스터 K에게서 사곤 했었으니까.”

“내게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하면 할아버지도 반기실 거야! 가고 싶을 때, 언제든 말해줘!”

“좋아. 잘됐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유리를 중간 다리로 삼아 마스터 K를 만난다면, 좀 더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만남이 가능할 터.

그의 존재는 강후에게 꽤 중요했다.

솔라키움의 공급은 부차적인 문제고, 그가 가진 지식들과 경험의 폭이 넓기 때문이다.

한서연이 알아본 루마니아의 미하이 반쿠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가 선의를 가진 헌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일부 사전 검증(?)이 된 마스터 K가 좀 더 믿을 만했다. 상대평가이기는 하지만.

그 이후.

서울대공원의 메인 관람 루트를 따라 걸으면서, 강후는 정유리와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정유리의 양할머니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정유리가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확실한 것은 양할머니 역시 헌터라는 것이다.

게다가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길드에는 꽤 영향력을 미치는 막후 실력자인 듯했다.

정유리에게 뜻하지 않게 많은 정보를 얻었다.

그녀가 자신에게만큼은 경계심 없이 속 깊은 얘기까지 해 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믿음이라는 것.

누군가가 자신을 신뢰하고 믿어준다는 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반면에 강후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게 됐다.

과연 자신이 100% 믿는 사람은 존재하는가? 단언컨대 없었다. 항상 의심의 눈으로 상대를 본다.

뜨거운 우정을 나눌 친구.

서로 재고 따지지 않을 사랑.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 두 가지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오로지 비즈니스적인 관계만 있을 뿐.

‘고독하네.’

결론은 간단하다.

고독하고 외롭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을 우정과 사랑이 나타났으면 했다.

그러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세상이 밝고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언제부터인가.

강후는 복잡한 생각들에 빠지지 않고 정유리와의 동물원 데이트를 즐겼다.

귀여운 동물을 보며 웃었고, 맛있는 간식이 주는 달콤함의 기쁨을 오롯이 느꼈다.

빙의 이후.

정말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에게 처음, 제대로 찍어주는 쉼표였다.

그리고 쉼표를 찍는 시간에, 자신을 외롭지 않게 해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한나절의 데이트가 강후에게는 의미 있는 재충전의 시간이 됐다.

이제 김수경 용병단과의 만나게 되면, 그때부터는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이 무대가 된다.

데이트가 끝나고.

서로 다른 길로 향하게 될 4호선 대공원역 앞에서 둘은 작별의 인사를 나눴다.

“오빠.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연락 줘. 물론 나도 던전에 있으면 연락은 못 받지만 말이야!”

“즐거웠어.”

“오빠! 좀 웃고 다녀! 아까 보니까 웃는 모습이 훨씬 더 잘생겼더라! 진짜로!”

“내가 웃은 적이 있었나?”

“몰랐구나? 아까 오빠 엄청 활짝 웃던데?”

웃지 않는 것이 일상이다 보니, 웃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억지웃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정유리와 보내는 시간에 오롯이 집중했기 때문일 테지.

“아무튼 또 연락할게! 고마워, 오빠!”

강후가 손을 흔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녀가 충분히 멀어졌을 때, 중얼거리듯 속내를 토해냈다.

“나도 고마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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