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여수행 (3)
* * *
그 시각, 서울역.
“……떨려.”
한 여자가 서울역 로비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가만히 선 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발이 땅에 붙기라도 한 것 같은 무거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보게 되고, 막연한 두려움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기억난 사람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걸어봤지만, 연결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하긴. 던전 안에 있을 때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고 했었으니까. 그때가 지금인 거겠지.”
그녀의 정체는 정유리였다. 전화를 걸려고 했던 사람은 바로 강후였고.
감회가 새로웠다.
자기 스스로 선택해서 그라운드 제로에서의 은둔을 택한 삶을 이렇게 끝내게 될 줄이야.
계기는 분명했다. 강후가 자신에게 알게 모르게 기운을 불어넣어 준 덕분이었다.
뭐랄까. 세상에 잔뜩 상처를 받고 움츠러들었던 자신에게 희망의 빛줄기를 보여준 느낌이었달까.
정유리는 강후와 함께했던 짧지만 강렬한 추억 속에서 미래를 다시 만들어나갈 의지를 얻었다.
채관형과의 참혹한 기억에 사로잡혀서 트라우마에 허우적거릴 수도 있었던 삶.
하지만 강후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채관형처럼 타락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선의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알려 주었다.
무작정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해 줬다.
“같이 서울 구경이라도 하면 좋을 텐데. 어쩔 수 없으려나. 쳇.”
당사자는 전혀 모를 원망(?)을 퍼붓고 나니, 바닥에 딱 붙어 있던 발도 제법 가벼워졌다.
강후와 이런저런 말장난을 하면서 서울역을 거니는 상상을 해 보니, 더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단 바람이나 쐬자!”
정유리가 힘차게 역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선 항상 목에다가 즐겨 착용하는 예쁜 스카프를 하나 살 생각이었다.
그리고 서울 나들이를 실컷 즐겨보기로 했다. 실로 오랜만에 오는 서울이니까.
이따금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시선이 유독 적대적으로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건 자신만의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무던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 모든 감정은 지나치게 비약적인 것이고, 채관형이 남겨 놓은 트라우마의 산물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강하게 다독였다. 별 것 아니라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다고.
“이제 내 삶을 살 거야.”
정유리가 떨리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세상에 나온 이상.
이제는 잡아먹히지 않고 헤쳐나갈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줄 사람이 자신의 곁에는 꽤 많이 있다.
이를테면 할아버지와 할머니 같은 사람 말이다.
* * *
한편, 그 무렵.
야만의 시대 스킬북을 학습하기 위한 강후의 여정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위기라는 이슈가 전혀 없는 던전 공략을 도대체 얼마 만에 보는 건가 싶은데.’
백선태는 평온하다 못해, 한가롭기까지 한 강후의 던전 공략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중간에 나름 위기의 포인트라고 생각했던 미들 보스 공략 구간도 정말 무난하게 넘어갔다.
백선태는 알지 못했지만.
강후는 미들 보스에게 ‘출혈 강화’라는 패시브 스킬을 얻어낼 수 있었다.
미들 보스의 공격에 상처를 입었을 때, 지혈이 잘 안 된다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출혈 강화】
【스킬 숙련도 : Lv Max】
【기존에 출혈 효과가 있는 스킬의 효율을 임의의 확률로 2배에서 3배까지 늘립니다.】
출혈 스킬이 전혀 없는 헌터라면 무의미한 스킬이지만, 출혈 찌르기와 같은 스킬이 있는 강후에게는 시너지가 너무 좋은 스킬이었다.
어쨌든 백선태는 강후를 보면서 ‘깔끔하다’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했다.
암살자 직업군의 헌터들은 모두 절제되어 있으면서 군더더기 없는 한 방을 가진 스타일을 원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라고 지향하는 영역의 얘기일 뿐, 실전에서의 흐름은 매우 난잡하다.
타깃이 될 헌터나 몬스터가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수많은 변수와 예측할 수 없는 대응 속에서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똑똑하다고 한들 수천, 수만 개의 상황에 대한 대응을 머릿속에 두고 있을 수는 없다.
한데 강후는 매번 모든 공격과 방어에서 당황하거나, 굼뜬 모습을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마치 상대가 이렇게 반응을 하면, 저렇게 대응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명확한 것처럼.
물론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확실히 보였다. 공격 레퍼토리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이다.
백선태가 직접 눈으로 확인한 스킬만 해도 15종이 훌쩍 넘어갔다. 자신이 가진 스킬의 보유 개수를 아득히 넘어서는 수준이다.
‘도저히 못 참겠군.’
백선태가 강후에게 호기심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감시자’의 역할에 집중하려던 다짐을 깼다.
김자호는 괜히 외부인에게 마음을 주거나, 인연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말라고 주의를 줬지만.
그러기에는 강후가 자신이 닮고 싶은 롤모델의 모습을 너무 많이 갖고 있었다.
레벨은 자신보다 한참 낮지만, 실력으로는 몇 수 위에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백선태에게 레벨은 그리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 레벨이 다가 아니다.
한편, 같은 시각.
‘메인 보스 앞두고 레벨 94.’
강후는 메인 보스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94까지 올린 자신의 레벨을 흡족하게 살피고 있었다.
레벨 100이 코앞이다.
레벨 100은 기본 스킬이 추가되는 구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성전에 있는 모든 성좌에게 ‘자격 알림’이 일괄적으로 통보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무슨 말인가 하면.
성좌들에게 많은 위기를 딛고, 마의 영역으로 불리는 레벨 100에 도달한 헌터가 있습니다, 하고 공식적인 알림이 뜨는 것이다.
이때는 모든 성좌가 해당 헌터의 존재를 인지하기에 많은 계약이 이뤄지곤 했다.
그래서 레벨 100 이상의 헌터는 99% 이상이 성좌와 계약이 이루어진 상태다.
어떤 성좌든지 일단 달라붙기는 하기 때문이다. 격이 떨어지거나 부족함이 있더라도 말이다.
물론 청명 수용소에서 탈출하기 전에 이미 차원 강탈자와 계약한 강후에게 새 이슈는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
자격 알림이 현재 강후를 후원하고 있거나, 지켜보고 있는 성좌들에게 자극이 될 가능성은 컸다.
황야의 전략가가 더 많은 후원 보따리를 준비하거나.
강후를 주시하는 ‘대재앙 – 어둠’이 생각보다 일찍 계약을 제안할 수도 있는 상황인 셈.
그래서 강후에게도 레벨 100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그것은 강후를 이미 메인 계약자로 두고 있는 차원 강탈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강후에게 직접 드러낸 적은 없지만,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경쟁자가 될 성좌가 언제 어떻게 튀어나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녀의 최대 위기인 셈이다.
보너스 포인트 투자와 스탯, 스킬의 확인까지 마친 강후가 잠시 휴식을 위해 바위에 걸터앉았다.
“저기, 정선규 님.”
그러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백선태가 말을 걸었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나 싶었더니, 궁금한 점이 생긴 모양이다.
“네.”
“혹시 스승 되시는 분이 누군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스승이라.”
“네. 좋은 스승님을 두셨을 것 같은데. 물론 가르침을 담을 그릇이 큰 것도 있겠지만요.”
강후가 스승이라는 말을 곱씹은 것은 그런 존재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백선태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체계적으로 지름길을 밟게 해 줄 스승이 없었다면, 지금의 실력이 될 수 없었을 거라고 본 거겠지.
실제로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를 보면 절반 이상은 좋은 스승을 둔 경우가 많다.
가까운 예시로 장시환의 경우도 평생의 은인이라고 부르는 스승이 존재한다. 지금은 죽었지만.
이예린 역시 실력 좋은 스승이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국인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후는 백선태의 질문을 무시하기보다는 나름의 답을 주고 싶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계십니다. 뵌 지가 좀 오래되긴 했지만, 항상 제 곁에 계시는 느낌이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강후의 스승은 바로 자신, 본인이었다. 모든 깨달음과 배움의 원천이다.
신강후라는 캐릭터가 그렇게 짜여 있다.
원작에서 괜히 장시환의 최고의 숙적이라고도 불린 ‘아치 에너미’였던 것이 아니다. 주인공을 넘볼 수 있었던 캐릭터였다.
유심히 계속 자신을 살피는 백선태의 눈빛에 강후가 농담을 툭 던졌다.
“뒤를 캘 준비를 하는 거죠?”
“예?”
“표정이 딱, 누군가를 더 알고 싶을 때의 표정이라. 호기심이 차다 못해 넘치고 있달까?”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캔다는 표현은 좀! 정말 진심으로 궁금할 뿐입니다.”
“하하. 농담이에요.”
좀처럼 농담을 안 하는 강후지만, 백선태에게는 그런 장난을 치는 게 제법 재미있었다.
아직 헌터로서 때가 덜 묻은 청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군벌 ‘자강’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사실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의 헌터이기도 했다.
“선규 님. 혹시 괜찮다면 보스 몬스터 공략을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경험치는 보존하겠습니다.”
그때, 백선태가 의외의 제안을 꺼냈다.
감시자 역할에만 충실할 줄 알았는데, 굳이 보스 몬스터 공략에 같이 참여하겠다고 할 줄이야.
경험치를 보존한다는 얘기는 보스 몬스터가 죽기 1분 전에 전장을 이탈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대미지 기여도에 관련한 모든 부분이 리셋된다.
최종적으로는 기여한 바가 없게 되니, 당연히 경험치도 나누지 않게 된다.
한 마디로 같이 합을 맞추기만 하고 과실은 전부 강후에게 양보하겠다는 뜻.
강후의 입장에서는 굳이 거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오히려 고마운 제안이었다.
그의 속내가 짐작이 가지만, 강후가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들어볼까요?”
“한 번 호흡을 맞춰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지켜보면서 감명을 받은 바가 많아서요.”
“딱히 감명을 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은 아닙니다만.”
“다른 헌터는 몰라도, 저에게는 충분히 롤모델이 되는 실력을 가지셨습니다.”
강후의 입가가 씰룩였다.
백선태가 작정하고 비행기를 띄워주는, 기분 좋은 느낌을 털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냉정하고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강후다.
모자란 부분을 어떻게든 찾아내고, 넘치는 부분은 자만을 멀리하도록 만족하지 않게 채찍질한다.
그런데 백선태가 존경과 경외의 눈빛을 계속 보내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백선태의 실력을 보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어쨌든 같은 직업군의 헌터라면 귀감이 될 만한 요소가 있을지도 모른다. 레벨도 높은 편이고.
“그럼 기존의 룰만 잘 지켜주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까지나 제게 권리가 있는 보스 몬스터니까요.”
“물론입니다!”
강후에게 허락을 받은 백선태가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좋긴 좋은 모양이다.
바로 그때.
“짐이 만들어 낸 죽음의 불길이 어리석은 피조물에게 지옥으로 갈 지름길을 선사하리라.”
계속 강후를 기웃기웃 쳐다보던 보스 몬스터가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멘트를 소화했다.
무게감과 위압감이 있는 몬스터라면 듣는 그 순간, 소름이 쫙 돋을 멘트였다.
하지만.
“그래봤자 불닭이지.”
강후는 보스 몬스터 ‘카나비스’의 위엄과 권위를 한 마디 표현으로 짓밟아버렸다.
불닭.
활활 타오르는 불의 화신, 불사조를 꿈꿨었던 카나비스는 그렇게 한 마리의 하찮은 닭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