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여수행 (1)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강후는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아침에 보겠다는 말을 거절하고.
바로 그들을 만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외롭게 방치되고 있을 자식이 눈에 밟힐 부모의 마음이 느껴져서였다.
강후가 감정적으로 마모된 구석이 많다 해서, 타인의 감정을 유추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딱히 수면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지도 않는 터라, 잠을 자고 싶지도 않았다.
박민성의 부모이자, 영국의 스핏파이어 길드의 마스터, 부 마스터이기도 한 두 사람.
둘의 이름은 가니에르와 멜리사였다. 이름을 알고 나서야 강후도 기억이 났다.
아주 두각을 드러낸 네임드까지는 아니었지만, 원작에서 지나가듯 몇 번 언급된 적이 있는 이름임을.
어쨌든 가니에르와 멜리사를 박민성이 있는 곳까지 안내했다.
그들이 직접 마련한 보안 차량을 타고 이동하니, 그라운드 제로로 가면서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현장에서 박민성의 시신을 수습했다.
그라운드 제로의 특수한 지역적 환경 덕에 박민성의 시신은 거의 부패하지 않은 상태였다.
몇 시간 전쯤에 죽은 시신을 보는 느낌이랄까. 약간의 고름이 생긴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멀쩡했다.
가니에르와 멜리사는 눈물을 훔치며, 보안 차량의 냉동 공간에 아들을 실었다.
펑펑 눈물을 흘리는 두 사람을 보면서, 강후는 부모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양자(養子)에게 저만큼 마음을 줄 수 있나 싶기도 했다.
실리적이면서 대단히 이성적인 자신의 감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이지 싶기도 했다.
그렇게 수습이 끝나고.
그라운드 제로에서만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제법 가신 도로까지 나왔을 무렵.
가니에르가 운전하던 차를 잠시 세우고, 강후에게 대화를 요청했다.
차 안에서 흘러가듯 대화를 나누기에는 예의와 격식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고.
사람들이 많은 장소에서 대화를 나누기에는 제법 중요한 내용들이 오고 갈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강후도 장소를 가리는 타입은 아닌지라, 차에서 내려서 길가로 나왔다.
그라운드 제로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는 통행량이 거의 없어, 고요했다.
먼저 말을 시작한 것은 가니에르였다.
“정말 어떻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게 되었네요.”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 슬픔을 제가 감히 재단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아프네요.”
“입양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가슴으로 열심히 키운 아이입니다. 슬프지만 이겨내야겠지요.”
가니에르가 눈물을 훔쳤다.
멜리사는 아까부터 계속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지라, 제대로 말도 잇지 못했다.
강후가 물었다.
“아드님이 한국에 오신 건 모르셨던 겁니까?”
“저희가 마지막으로 민성이에게서 얘기를 들은 것은 일본의 헌터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전화통화였죠.”
“음…….”
“실제로 도쿄에 들른 것도 확인이 됐습니다. 하지만 만났다는 친구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짚이는 바는 없으십니까?”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한국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정화 길드뿐이었는데…….”
듣고 싶지 않았던 길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설마 이 일에도 정화 길드가 개입되어 있을까? 박민성이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을까?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니 할 수 있는 것은 추측밖에 없다.
하지만 정화 길드에서 공을 들여서 박민성을 도모할 만큼, 그의 가치가 큰 것은 아니다.
다만 박민성의 부모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쪽은 원작에서도 장시환과 무척이나 대립각을 세웠던 국가이기도 했다.
당연히 ‘악당’ 포지션으로 그려졌었다.
하지만 지금, 달라진 시점에서 보면 끝까지 부역자들에게 저항했던 정의의 세력인 셈이다.
어쨌든 단서가 너무 부족하다.
억지로 연결고리를 만든다고 한들, 이유를 찾을 수 없으니 무의미한 연결이 되는 셈이다.
“괜찮으시다면 영국으로 오시게 될 경우, 저희 스핏파이어 길드의 옵저버(Observer)로 참여해 주시겠습니까?”
가니에르도 소모적인 얘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어디까지나 박민성의 죽음은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자신들이 알아보고 조사해야 할 문제다.
아들의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도와준 강후에게 또 다른 짐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다.
옵저버.
각 나라마다 다른 단어로 쓰이기는 하는데, 국내에서는 보통 ‘초청 용병’이라는 표현을 쓴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길드 차원에서 정식으로 외부 손님을 맞이하는 것이다.
단, 길드 소속은 아니면서 길드원과 동등한 대우와 지원을 받는다.
조직에 대해 구속은 되지 않으면서, 필요한 특혜나 권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길드에서 외부의 헌터를 초청하거나 전력에 보탬을 얻고 싶을 때 많이 쓰는 방식이었다.
초청 용병을 두고 영미권에서는 옵저버라는 표현을 썼다.
강후가 대답했다.
“저야 그렇게 배려해 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죠. 스핏파이어 길드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립서비스다.
사실 오늘 처음 기억에서 막 떠올렸지만, 원래 말이라는 것이 하기 나름 아닌가.
강후로서는 참 반가운 제안이었다.
국내에서 최고가 된다고 해서, 세계에서 최고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원작의 장시환도 그랬다.
국내를 다 평정하고 해외로 진출했다가, 시작부터 미친 듯이 털리고 시작했었다.
물론 그것을 계기로 해서 더욱 각성했고, 세계를 제패할 실력자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해외로의 진출은 필수적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미리 밑밥을 쳐둘 필요가 있었다.
일본에는 안영호라는 믿을 만한 카드를 만들어뒀고.
생각을 신중하게 하기는 해야겠지만, 유청화를 통해서 중국의 신투 길드 쪽에도 선을 댈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영국이다.
가니에르와 멜리사를 통해서 스핏파이어 길드에 줄을 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스핏파이어 길드는 영국에서 Top 15에 드는 것은 물론, 모험이나 오지 탐사, 개척에 특화된 길드다.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은 희귀한 던전도 제법 보유하고 있는 만큼, 기대되는 요소가 많았다.
“이건 옵저버 전용 라이센스입니다. 제 명의의 전자 서명이 있으니, 인증은 바로 됩니다.”
“이렇게 주셔도 되는 겁니까?”
“제 아들을 무사히 품으로 돌려보내 주신 은인이시니까요. 개인적으로 쓰셔도 되고, 외부에 파셔도 상관없습니다. 그런 경우까지 전부 고려한 감사 표시입니다.”
전자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전부 금으로 처리된 옵저버 라이센스.
보고만 있어도 소유욕을 강하게 자극받을 만큼, 무척 예쁘게 만들어진 라이센스였다.
“기한은 어떻게 됩니까?”
“무기한입니다. 평생 저희 스핏파이어 길드의 옵저버로 언제든지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최고의 보상이었다.
옵저버 라이센스는 짧은 기간으로 발급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외부인에게 일방적으로 특혜만 제공하는 형태이기에 길드 입장에서 길게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을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무기한이라는 말은 즉, 스핏파이어 길드로부터는 앞으로 언제든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들에 대한 별도의 의무나 책임 없이 말이다.
막 눈물을 훔친 멜리사가 말을 보탰다.
“정말 감사해요. 금전적인 보상도 얼마든지 드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요.”
“저희 보안 연락처를 따로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길드 명의의 골드 카드를 발급해 드리겠습니다.”
골드 카드.
매달 사용 한도가 리셋되는 결제용 신용카드를 말한다.
정해진 금액 안에서 언제든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한도는 서로 협의하기 나름이지만, 보통 최소가 10억 원으로 시작한다.
즉, 매달 10억 원은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펑펑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최소가 그 정도다.
이미 옵저버 라이센스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더 누릴 수 있는 것을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충분히 그럴 만한 일을 하기도 했고.
강후가 웃으며 되물었다.
“월 한도가 얼마입니까?”
* * *
그 후.
아들 박민성의 시신을 수습한 가니에르와 멜리사는 바로 영국으로 향했다.
예전부터 미래를 대비해 준비해 뒀던 가족 전용의 묘소에 박민성을 묻는다고 했다.
한국에 급히 왔을 때와 다르게 영국으로 돌아가는 항공편은 그들의 전세기를 이용했다.
이제 박민성도 양부모와 함께했던 제2의 고향으로 돌아가, 영면(永眠)할 수 있을 것이다.
“선의는 보답받는다, 이건가.”
강후가 자신의 양손에 들려 있는 옵저버 라이센스와 골드 카드를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언제든 스핏파이어 길드의 던전이나 내부의 인프라를 활용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나아가 월 한도 20억 원의 신용카드도 쓸 수 있게 됐다.
골드 카드는 몇 년 정도의 제한을 둘 것이라 생각했지만, 가니에르는 처음부터 확실하게 못 박았다.
강후가 사용하는 한 무기한이라고 말이다. 외부인에게 양도만 하지 않으면 평생이라고 했다.
한바탕 폭풍 같은 보상의 향연을 누리고 나서인지, 뒤늦게 피로가 몰려왔다.
수원역 인근의 호텔에 체크인을 한 강후는 여기서 한숨 푹 자고 난 뒤, 온누리 길드를 찾아가 지난번처럼 던전 공략 라이센스를 요청할 생각이었다.
발트만 던전을 다시 들어갈 수 있다면, 지난번처럼 꼼수 학습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날 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자고 일어난 강후는 바로 온누리 길드를 찾아갔다.
이번에도 던전 관리팀의 총괄팀장인 한승혁이 나왔다.
그래서 생각보다 대화가 잘 풀릴까 싶었는데, 변수가 생겼다.
이미 공략 일정이 앞으로 한 달가량은 꽉 차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승혁은 외부인인 강후가 자꾸 발트만 던전에 관심을 갖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자신들은 알지 못하는 꿀포인트나 숨겨진 보상이 있는지 집요하게 캐려고 했다.
게다가 라이센스를 대여하는 단가도 배 째라 식인지 100억 원으로 올려버렸다. 애초에 대여할 생각이 없다는 것처럼.
덕분에 협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결렬됐다.
강후도 꼭 발트만 던전 하나만 가능한 것은 아니라서, 굳이 한승혁에게 목을 매지는 않았다.
그래서 강후가 새로 잡은 목적지는 바로 여수였다.
여수의 군벌, 자강(自强).
그들 소유의 던전 중에 발트만 던전처럼 스킬북 꼼수가 가능한 던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만 다르지, 사실 내부 구조나 형태는 발트만 던전과 95% 이상 같은 던전이기도 했다.
군벌 ‘자강’의 대장인 김자호는 화교 출신으로 소속 헌터들도 화교 출신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거점 영역으로 접어들자, 차이나타운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아니나 다를까.
“어이! 외부인은 여기서부터 두 발로 걸어서 들어가라! 편하게 차 몰고 다닐 생각 하지 말고.”
그들의 관리 구역 초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강제로 차에서 하차하게 됐다.
외부인이 편하게 차를 몰고 다니는 꼴은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