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위기는 곧 기회 (2)
* * *
‘속도형 몬스터가 많은 던전에서 폭발이 일어난 것 같군.’
진원지로 이동하면서.
날뛰는 몬스터들의 특성을 바로 파악했다.
보통 던전 폭발이 일어나면, 해당 몬스터의 특성이 극대화된 형태로 출몰한다.
만약 맷집이 좋은 녀석들이 던전 안에 있었다면 외피가 잔뜩 두꺼워진 형태가 되고.
움직임이 날쌘 녀석들은 2배속, 3배속 빨리 감기를 하듯이 날뛰는 식이다.
마법을 쓸 줄 아는 몬스터라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나를 탑재하게 된다.
이번 폭발은 움직임이 날쌘 녀석들과 관련된 것이었다.
기동전에 능하지 않으면 피해를 보기 딱 좋은 스타일의 몬스터들이 날뛰고 있는 상황.
“크헉.”
“허억.”
그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몬스터에게 달려들던 헌터 둘이 순식간에 머리를 잃었다.
사마귀처럼 생긴 몬스터 두 녀석이 집게로 싹둑 머리를 자르자, 그대로 잘려나간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공격이었지만, 속도가 워낙 빨라 눈 뜨고 당해버렸다.
“좋은 훈련이 되겠네.”
강후는 가볍게 생각했다.
전투는 무겁게 임해야겠지만. 굳이 시작부터 겁을 집어먹지는 않았다.
“히이익!”
“도망가자! 애들이 너무 쎄!”
“야! 우리가 도망가면 이놈들이 이쪽 거리를 미친 듯이 활보하고 다닐 텐데!”
“알 게 뭐야! 케낙스에서 알아서 하겠지. 영웅 놀이하지 말고 얼른 도망치자고, 병신아!”
본능에 충실한 반응이 헌터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어차피 이런 상황이라면 던전 라이센스도 무의미할 테고. 역으로 들어가 봐?’
강후는 좀 더 먼 그림을 보고 있었다.
어떤 던전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폭발이 일어났다면 내부에 미들 보스, 메인 보스가 있을 터.
이들을 잡으면 평소보다 더 강화된 보상은 물론, 스킬도 당연히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로 이득을 볼 여지가 많은 상황이라 욕심이 났다.
폭발이 일어난 마당에 공략 라이센스가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파팟! 팟!
목표가 더해지니, 전보다 훨씬 더 의욕이 샘솟았다.
하지만 던전 밖에서 날뛰는 몬스터의 관심은 강후도 예외는 아니라서, 몇 놈이 꼬여 들었다.
후웅! 후웅!
콰작! 콰작콰작!
“어우. 빠르네.”
앞서 머리를 잃은 헌터들이 손도 못 쓰고 당한 이유를 알 것 같을 만큼 속도가 빨랐다.
심지어 강후가 쉽게 피할 수 없도록 위, 아래, 옆을 동시에 노리는 식이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후방 회피로 쭉 빠지지 않았으면, 어디든 잘려 나갔을 공격이었다.
【풍뢰진】
광역 공격을 위한 풍뢰진을 깔았다.
이렇게 속도감이 있는 몬스터들은 일대 다수의 전투가 매우 까다롭다.
그래서 동시에 녀석들의 전력을 약화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전투가 어렵게 흘러간다.
퍼석! 퍼서석! 파삭!
끼엑! 키에에엣!
풍뢰진의 효과는 만점이었다.
순식간에 공격 영역 안에 들어온 사마귀 다섯의 몸에 셀 수 없이 많은 상처가 났다.
날카로운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자리에 이따금 풍뢰진의 ‘전류’가 터지면.
아예 몸이 경직되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감전과 동일한 형태의 증상이었다.
당연히 강후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전광비도】
한 번의 단검 투척에 모든 힘을 싣는 전광비도는 지금 같은 상황에 최적화된 필살기였다.
손끝을 떠났는지 알 새도 없이 사라진 단검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마귀의 양미간을 뚫었고.
꾸엑.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몰리스 마니체로 간단히 혈루를 회수하면 상황 종료.
일방적인 대미지 교환의 성공이었다.
【납치】
끼에에엣!
이번에는 한 녀석을 직접 앞으로 소환했다.
방금에는 찾아가는 서비스를 했지만, 이제는 찾아오게 만드는 서비스를 한 셈.
아무 생각 없이 서 있다가 강후에게 강제로 소환된 사마귀는 피할 겨를조차 없었고.
푸욱!
복부 한가운데에 시원하게 혈루가 꽂힌 사마귀가 집게를 움직이며 강후를 노리려는 찰나.
쫘아아아악!
강후가 사마귀의 복부 한가운데에서부터 왼쪽 어깨까지, 거대한 붉은 선을 그어버렸다.
어떤 스킬도 쓰지 않고 단순히 완력(腕力)으로 임한 것이지만,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후두두둑!
상처를 따라 체액, 피, 오장육부 할 것 없이 쏟아질 수 있는 모든 것이 쏟아졌다.
사마귀는 그 자리에서 몸 한 번 까딱이지 못하고, 선 채로 목숨을 잃었다. 쇼크사였다.
“와, X발. 저 새끼 뭐냐.”
“뭔데 몬스터를 앞까지 강제로 끌고 와서 배를 쑤시냐? 방금 깔았던 전기장판 같은 건 뭐고?”
“누구야, 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지켜본 헌터들이 앞다퉈 혀를 내둘렀다.
여기저기서 비명과 더불어 헌터가 죽어 나가는 현장을 생각하면 더욱 이질적인 광경이라서다.
“차라리 우리도 숟가락 얹을까? 쟤 뒤로 따라가면 몬스터들도 제법 잡을 수 있을 듯한데?”
약삭빠른 헌터가 강후의 남다름을 알아보고는 자기 나름대로 그럴듯한 계획을 세웠다.
강후가 몬스터를 상대하는 재주가 있는 듯하니, 뒤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주워 먹으려는 것이다.
어쨌든 대미지 측면에서 양념이 된 몬스터를 죽이거나 하면, 경험치와 보상을 얻을 수 있으니까.
강후는 혼자고 자신들은 여럿이니, 대놓고 들러붙어도 싫은 소리를 못 할 것이라고 여겼다.
아무리 헌터에게 실력이 제일이라고 한들, 쪽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기 때문이다.
“빨대 꽂기를 하자는 거냐?”
“그렇지. 몬스터 신경 쓰느라 정신없는데, 뒤까지 신경 쓸 겨를이 어딨겠어?”
“하긴. 보니까 독고다이네. 작정하고 붙으면, 생각보다 또 빨아먹을 구석이 있겠어.”
“클클. 가자고. 그리고 원래 말이야. 실력이 있으면, 동업자 정신으로 다른 헌터도 챙기고 하는 게 맞아. 그렇지 않냐?”
어찌나 자기 합리화에 능한지.
혹자는 들어도 콧방귀도 안 낄 개소리를 진지하게 늘어놓는 패거리들이었다.
문제는 그 개소리를 모두 격하게 공감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는 점이랄까.
어쨌든 강후에게 기분 나쁜 똥파리들이 꼬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장시환은 자신의 집안에서도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화장실에서 계속 손을 씻고 있었다.
여기는 어지간해서는 볼일을 보러도 잘 안 오는 위치였다.
서재나 거실 같은 핵심 활동 반경에서 한참 떨어진, 집의 ‘외곽’에 있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화장실을 써야 할 이유가 있어, 굳이 여기까지 와 있던 상태였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수돗물을 따라, 장시환의 손에서 붉은 피가 쉴 새 없이 씻겨져 나갔다.
그리고 우측 하단 쪽으로 보이는 배수구에는 출처가 다른 사람의 피가 계속 흘러들고 있었다.
이런 살인이 한두 번 있었던 일은 아닌 듯, 장시환은 시체에 관심도 없었다.
그저 거울을 본 채로 계속 중얼거릴 뿐이었다.
“이젠 그냥 안에서 푹 쉬지 그러냐. 내가 만든 꿈속에서 영원히 쉬란 말이다.”
차갑게 깔린 목소리는 분명 평소의 장시환과는 거리감이 꽤 있는 목소리였다.
애초에 눈빛도 달랐다.
우수에 잠긴 슬픈 눈빛이 아니라 광기로 가득 찬 살인마의 눈빛이랄까?
평소의 장시환과 어울리지 않는 눈빛이었다.
“이건 내가 꿈꾸던 세계가 아니야. 자꾸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지 마. 이건 아니라고!”
“하지만 넌 내가 만든 이 꿈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아. 점점 그 꿈에 취한 시간이 늘어가잖아?”
“아냐! 아니라고!”
“마음 편히 꿈에 취해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부역자로서의 복잡하고 어려운 생각은 전부 내게 맡기라고.”
“안 돼. 절대 안 돼……!”
한 입에서 전혀 다른 두 자아의 격론이 오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승리한 것은 ‘항상’ 그랬듯, 장시환의 변질된 자아였다.
아직 강후는 알지 못했지만, 이렇게 원작의 장시환은 이미 부역자 엔딩의 밑바탕이 깔려 있었다.
원작 내용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망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대의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있다고 믿었던 모든 것은 완벽하게 망상이었다.
자기 자신이 만들었기에 완전히 속을 수밖에 없었던 망상.
실제의 장시환은 누구보다 잔인하고 잔혹하며, 더 나아가 정의에는 관심도 없는 빌런이었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장시환의 집에 외부인 자격으로 있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둘도 없는 죽마고우인 채관형이다.
장시환이 남은 피를 마저 씻어내며 말했다.
“들어와.”
“아우, 피 냄새! 작작 좀 죽여, 인마! 티 안 나게 시체 처리하는 것도 나한테는 일이라고.”
“처리해 달라고 한 적 없어. 귀찮으면 여기에 냅둬. 알아서 썩든 뭐든 되겠지.”
“그럼 시체가 썩는 냄새가 나겠지. 퍽이나 생활 환경이 좋아지겠다. 어?”
“잔소리하러 온 거면 가라. 지금도 충분히 머리가 많이 아프니까.”
“아직도 그 미친놈이 말을 걸어오는 거냐?”
“뭐.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고. 신경 쓸 것 없어.”
신경질적으로 양손을 닦아낸 흰 수건은 여전히 피가 잔뜩이었다.
결벽증이 있는 채관형은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흰 수건에 붉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다.
그가 화제를 꺼냈다.
“엘리자베스가 합류하겠다고 한다.”
“본인 입으로?”
“어. 우리의 대의에 적극 공감한다고 하더군.”
“구원의 성녀가 드디어 세상을 구할 결심을 하게 됐군. 진즉에 그랬어야지.”
장시환이 웃었다.
구원의 성녀, 엘리자베스.
아프리카나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치료하고 돕는 힐러 계열의 헌터다.
아픈 사람을 치유하고, 가난한 자를 도우며,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낫게 해 주는.
그야말로 성녀의 아이콘이었다. 그렇기에 구원의 성녀라는 별칭에 누구도 이견이 없었다.
그런 헌터가 열세 개의 별에 합류할 의사를 밝힌 것이다. 충실한 부역자가 한 명 더 늘었다.
* * *
한편 그 시각.
‘인간의 이기와 시기는 어쩔 수 없는 건가. 부스러기만 주워 먹을 줄 알았는데, 선을 슬슬 넘네.’
강후는 점점 자신의 경로를 방해하는 것도 모자라.
은근슬쩍 위협까지도 하는 헌터들의 움직임에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에는 자신이 미처 처리하지 못한, 양념된 몬스터 일부만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동선에 방해가 되었기에 쳐내고 지나간 몬스터라, 딱히 욕심을 내진 않았다.
오히려 뒤에서 쫓아오는 헌터들이 마무리를 해 주니, 귀찮은 수고를 더는 느낌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슬쩍, 마치 실수인 듯 아닌듯하게 자신을 향해 스킬을 날리는 녀석이 나왔다.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기도 하고, 멋쩍은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단지 사과만 받고 넘어가기에는 섬뜩할, 예리하게 빈틈을 노린 공격이 몇 차례 있었던 것이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를 생각했던 것이라면 나쁘지 않았던 시작.
하지만 본분을 잊은 악어새들은, 어느새 악어의 살점을 뜯어먹을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강후는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다.
시선은 여전히 앞을 향해 있었지만, 모든 살기는 후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슈아아아!
확실하게 선을 넘는, 누군가의 마법 스킬 공격이 강후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