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위기는 곧 기회 (1)
박상오.
아웃복서 스타일의 검사로 원작에서 떠돌이 용병 출신으로 네임드가 된 헌터다.
강후가 박상오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원작을 연재할 때, 직접 삽화까지 넣어가며 막판에 그에게 공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삽화 속의 얼굴 그대로이니, 다른 사람을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박상오는 국내파가 아니라, 일본에서 주로 활동했던 헌터이기도 했다.
그 역시 정화 길드를 좋아하지 않아, 영입 제안을 뿌리치고 일본으로 갔던 것이다.
‘어쨌든 원작처럼 흘러간다면 지금은 죽을 일이 없지. 무조건 당첨될 복권이라는 얘기고.’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돈을 불릴 요소를 찾게 됐다.
에밀리아와의 만남도 그렇고, 홍천 해방구에 온 것이 여러모로 터닝 포인트가 된 느낌.
원래는 그냥 지나칠 생각이었지만, 이래서야 데스 매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데스 매치에서 공식적으로 배팅 참여자에게 공개되는 정보는 딱 하나뿐이다.
매치에 참여할 헌터의 레벨 정보.
레벨 스캔을 통해 인증되기 때문에 정보는 왜곡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이런 데스 매치만 주로 찾아다니는 헌터들이 사적으로 정보를 판매한다.
신뢰도는 저마다 천차만별이라 가짜 정보를 파는 경우도 있고, 진실인 경우도 있었다.
결국은 정보를 구매하는 헌터가 얼마나 분별력 있게 정보를 사들이느냐가 관건이 되는데.
당연히 정보 판매자 중에도 네임드가 있는 터라, 그 사람의 정보가 비싸게 팔리곤 했다.
처음 보는 판매자라던가, 과거 구매 내역이 없는 판매자의 정보는 보통 사지 않는다.
‘박상오가 가장 레벨이 낮네.’
전광판에 표시된 정보를 보니, 박상오가 다른 참여자에 비해 레벨이 50 이상 낮았다.
이런 매치는 레벨의 높고 낮음이 절대적이다.
고스란히 스탯과 스킬의 차이가 되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박상오가 본격적으로 이 바닥 생활을 하기 전인 듯했다.
박상오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동안에는 데스 매치를 찾아다니며, 제법 많은 돈을 벌기 때문이다.
한데 정보 판매자들이 언급하는 정보 얘기를 들어도, 박상오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그 말은 판매자들에게도 생소한 참여자라는 얘기다. 없는 정보를 갖다 팔 수는 없는 셈이다.
장내 방송이 시작됐다.
- 곧 특설 경기장에서 금일 메인 이벤트인 데스 매치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케낙스의 관리 아래, 데스 매치는 지금까지 사고율 0%를 자랑하는 스포츠로 자리 잡았습니다.
모든 판돈의 수수료와 배당, 배분에 대한 관리는 헌터 치안청의 공식 승인을 받습니다.
안심하시고 배팅하세요. 일확천금의 꿈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 지금부터 각 매치업과 배당률이 공개됩니다. 주목해 주세요!
방송이 끝나자마자 전광판에 각각의 매치업과 실시간 배당이 바로 표시됐다.
[전국선 1.2 vs 박상오 3.0]
“와! 개꿀 매치업 떴다! 저 매치는 닥치고 전국선 아니냐? 최근에 기세가 엄청 좋은데?”
“전국선, 쟤 말야! 지난 매치에서는 레벨이 35나 높은 녀석도 재끼지 않았냐?”
“재낀 정도가 아니라, 쟤 완전 미친놈이야. 데스 매치만 찾아다니는 새끼라고!”
헌터의 관심이 일제히 쏠린 것은 박상오와 다른 헌터의 매치업이었다.
기대 승률을 반영하듯, 배당이 확 갈렸다. 당연히 모두의 관심은 전국선의 배당 값이었다.
“무조건 먹고 가는 20%인데 이걸 포기할 수가 있나?”
“30분 안으로 이자 20%가 무조건 들어오는 매치업을 포기하면, 그게 병신이지.”
“야, 배당 더 떨어지기 전에 묻자. 이건 못 먹을 수가 없는 매치업이잖아.”
“근데 박상오가 누구냐?”
“알 게 뭐야. 죽지 못해 안달 난 머저리 새끼인가 보지.”
“레벨도 전국선보다 50이나 낮네. 그냥 죽으려고 온 거구만?”
“이거 케낙스 놈들, 판 짜려다가 돈 세게 잃을 각인데? 배당 빨리 후려쳐야겠는데?”
헌터들이 앞을 다투어 특설 경기장 앞에 마련된 배팅 전용 테이블로 향했다.
장내 방송대로, 헌터 치안청의 승인 과정이 있기에 약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그만큼 배팅한 돈에 대한 안전성이 보장되므로, 모두 부담 없이 큰돈을 걸 수 있었다.
‘미래를 알고서 돈을 건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강후가 속으로 웃었다.
물론 아주 낮은 확률로 자신이 계산한 미래가 바뀌어서 박상오가 죽을 수도 있다.
원작의 내용이 틀어지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만한 깨달음의 수업료로 60억 원을 지불해야 한다면 크게 아까울 것 같진 않았다.
이후 같은 실수만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돈이야 열심히 벌면 그만이다.
베팅 테이블로 간 강후가 주변 헌터들과는 전혀 다른 선택을 했다.
“박상오에 60억 걸겠습니다. 전용 계좌 알려주세요.”
“에? 저, 저기 돈 버리는 친구 하나 나왔네.”
강후가 박상오에게 돈을 걸자, 헌터들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강후를 쳐다보았다.
최근 기세가 좋다 못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전국선을 무시하고 반대에 돈을 걸다니.
일확천금을 노리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무모해도 이렇게 무모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강후는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의 9할 이상을 박상오에게 걸었다.
“전국선! 빨리! 야, 돈 모았다가 어디에다가 쓰게! 그냥 묻으라니까! 묻으면 무조건 20% 먹는다고!”
“박상오에 걸긴 왜 걸어? 돈이 남아도냐? 빨리, 그냥 묻지 마로 가! 얼른!”
배팅금이 과도하게 몰리는 탓에 전국선의 배당이 계속 떨어지자, 헌터들이 더 급해졌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박상오에게 거꾸로 찔러보는 헌터가 몇몇 나오기도 했지만.
그래봤자 몇백만 원, 진짜 많아야 천만 원 정도를 거는 것이 그들의 최대 배포였다.
그런 와중에 강후가 60억 원을 떡하니 박상오에게 걸었으니……. 다들 아까워할 수밖에 없었다.
“훗.”
하지만 딱히 다른 생각이 없는 강후는 팔짱을 낀 채, 데스 매치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 * *
그로부터 1시간 후.
“와……. 저 친구, 그럼 60억에서 180억. 거기에 360억까지 쭉 불린 거야?”
“박상오에 두 번 연속으로 걸었어?”
“어……. 그것도 몇억도 아니고, 60억, 180억을 그대로 갖다 박았다고.”
“올인 두 번인가?”
“그렇지. 돈이 썩어 넘치는 건지 아니면 미래시라도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진짜 미쳤네.”
“어이, 도대체 뭘 믿고 박상오에게 다 건 거야? 박상오 친척이야? 어떻게 된 거야?”
“영업 비밀. 다들 수고하쇼.”
강후가 통장에 정산되어 들어온 금액을 확인하고는 현장을 떴다.
잔고는 366억 원이 됐다.
오늘의 데스 매치는 이렇게 끝났고, 박상오는 2연승으로 주가를 대폭 높였다.
아마 박상오에게 오늘처럼 3배당, 2배당이 잡힐 일은 앞으로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전국선이 그랬던 것처럼, 짜디짠 낮은 배당을 갖고 갈 가능성이 높다.
떠돌이 용병 생활을 하면서, 데스 매치에서 전승 가도를 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회성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단숨에 큰돈을 벌어들였다. 지금까지 번 돈 중에서 가장 쉽게 얻은 불로소득이었다.
공돈은 가끔 벌 때 가장 재미있는 법이다.
100억 원을 쓰고.
순식간에 300억 원을 벌어 떠나는 현장. 어느 때보다도 강후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홍천 해방구의 명물인 먹자골목에 접어들자, 각양각색의 음식이 강후를 반겼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조합 중 하나인 떡볶이와 순대를 잔뜩 시킨 강후가 젓가락을 막 들려는 찰나.
전화가 걸려왔다.
이예린이었다.
“네, 예린 씨.”
- 통화 괜찮아요?
“괜찮으니 받았죠.”
- 박민성이라는 헌터에 대한 정보를 찾아달라고 했죠? 국내에서 실종된 박민성 헌터.
“맞아요.”
- 가족을 찾은 것 같아요. 근데 좀 인적 사항이 특이해요. 예상과는 다른 정보거든요.
“어떻습니까?”
- 어렸을 때, 영국으로 입양이 됐어요. 그래서 현재 부모 두 분이 모두 영국인이에요.
“입양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는 이슈 아닙니까?”
- 그런데 부모가 둘 다 영국에서 잘나가는 네임드 헌터예요. 영국에서는 실종신고가 됐더라고요.
“그럼 국내에 부모 몰래 왔다가 실종이 됐다, 이 말입니까?”
- 정황상으로는 그래요.
“부모에 대한 정보를 보내주고, 그 부모님과 접촉을 해 주면 좋겠는데요. 시신이라도 빨리 찾아갈 수 있도록 말이죠.”
- 알겠어요. 바로 연락을 넣어볼게요.
“수수료는 두둑이 챙겨드리겠습니다.”
-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이번에는 완전한 제 호의로 진행하는 일이라고요. 됐어요. 아무튼 끊어요!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처음에는 그라운드 제로까지 와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헌터의 가족이나 찾아줄 생각이었는데.
거기서 파생된 그림이 영국, 그것도 네임드 헌터까지 흘러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조건 없이 품었던 선의가 좋은 보답으로 돌아오는 걸까?
다행인 것은 그라운드 제로의 특수 환경 덕분에 시체의 부패는 생각보다 늦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부모가 최대한으로 빨리 와줬으면 했다.
그때.
쿠궁! 쿠궁! 쿠궁!
강후가 앉아 있던 플라스틱 의자는 물론, 주변의 모든 구조물이 흔들릴 정도의 진동이 느껴졌다.
작은 충돌 따위에서 비롯된 진동이 아니라, 제법 큰 폭발이 있을 때 느껴질 법한 세기였다.
“뭐야?”
“어디 뭐 터졌어?”
강후만 진동을 느낀 것이 아니기에, 다들 자리에서 일어섰다.
헌터라면, 이런 상황과 연결될 법한 몇 가지 사건 사고를 알기 때문이다.
그 순간.
콰과과과!
연쇄 폭발이 일어나면서 엄청난 폭음과 함께 충격파가 주변의 모든 것을 거칠게 덮쳤다.
강후가 본능적으로 보호 결계를 펼치지 않았으면, 속절없이 휘말렸을 정도로 강한 충격파였다.
‘던전 폭발이군.’
강후는 현장을 직접 본 것이 아니었지만, 충격파의 세기와 패턴을 깨닫고 상황을 바로 파악했다.
던전 폭발.
원인은 다양하지만, 보통 오랜 시간 던전이 공략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을 일컫는다.
쉽게 비유하자면.
냄비를 센 불 위에 올려놓고 뚜껑을 꽉 닫아놓았다가, 찌개가 흘러넘치는 상황을 예로 들 수 있다.
던전도 주기적으로 공략을 해서 내부 에너지를 해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부에 꽉 찬 에너지가 외부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현상이 바로 던전 폭발이었다.
보통 던전은 쌍방향이 아닌 일방통행이라 내부에 있는 몬스터가 절대 밖으로 나올 수 없다.
하지만 폭발이 일어나면, 쌍방향으로 구조가 바뀌기에 몬스터들이 출몰하게 된다.
헌터 치안청의 관리하에 있는 던전은 체계적으로 모니터링이 되므로 이런 일이 거의 없다.
하지만 영향권 밖에 있는 던전은 결국 해당 던전을 소유한 세력의 관할이 된다.
안타깝게도 홍천 해방구의 관리 조직인 케낙스의 던전 관리에 허점이 있었던 모양이다.
‘수습 입장에서는 지옥이지.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기회잖아?’
한 차례의 충격파를 잘 버텨낸 강후가 혈루를 쥐고, 폭발의 진원지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수습할 의무가 있는 케낙스에게는 전력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리스크가 큰 상황이 맞지만.
홍천 해방구의 손님인 강후에게는 날뛰게 될 모든 몬스터가 경험치였다.
던전 에너지를 잔뜩 머금고 세상에 나온 몬스터는 일반 몬스터보다 보상이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다.
일전에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에서 상대했던 몬스터처럼 말이다.
위기는 곧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