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에밀리아 로즈(2)
* * *
에밀리아와의 대화는 오늘 처음 봤다는 사실이 무색하게 꽤 깊어졌다.
강후의 입장에서는 왜 에밀리아가 자신을 앞에 두고 이런 얘기를 하나 싶을 정도였다.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이 두렵지 않으니, 아무 얘기나 꺼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위협이 되지 않는 상대에게 몇 마디를 더 한다고 해서, 딱히 약점이 될 것도 없기 때문이다.
“악을 더 이해하기 위해 악성향의 성좌와 손을 잡는다. 그럴듯하지 않아요?”
“연쇄살인마가 이 세상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주장하는 것만큼 허황된 소리로 들리네요.”
“난 그래요. 순수한 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요.”
“살인마를 이해하기 위해서 사람을 죽여봐야 한다는 것과 똑같이 들려요.”
“호호. 예상한 반응이에요.”
강후가 에밀리아의 말에 반박을 하긴 했지만, 말투 자체는 평온했다.
그녀가 하는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원작대로라면 에밀리아의 열세 개의 별 합류는 확정적이야. 하지만 변수가 있다고 볼 수도 있지.’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방금 에밀리아가 했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괜한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다.
하지만 만약에, 아주 만약에 악에 대한 호기심으로 열세 개의 별에 들어갔다면?
처음부터 부역자가 되기를 꿈꿔왔던 장시환이나 채관형과는 결이 다른 사람으로 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자신의 명예와 부귀영화를 위해서 열세 개의 별이 되었을 수는 있지만.
마왕의 부역자가 되겠다는 신념 하나로 열세 개의 별이 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어떤 것도 속단할 수 없다.
다만 다른 가능성이 존재할 확률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미래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흥미로운 게 뭔지 알아요?”
“뭐죠?”
“난 내가 두 눈으로 보는 모든 헌터의 잠재력을 정리된 하나의 수치로 확인할 수 있어요.”
“오호.”
솔깃한 말이었다.
에밀리아에 대한 원작의 설정이 아주 디테일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모르는 부분도 있다.
잠재력을 간파할 수 있는 성좌가 있다니. 강후도 군침을 저절로 흘리게 되는 성좌였다.
“왜 제가 많은 인파 속에서 유독 당신, 정선규 씨에게 관심을 가졌을까요?”
“잠재력이 높아서?”
“높은 정도가 아니에요. 성좌가 제게 알려준 당신의 잠재력은 무한대예요. 한계가 없다는 거죠.”
“…….”
자화자찬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 성좌는 제대로 자신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 맞다.
미래를 예측하고 예견할 수 있고 스스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자신 아니던가?
성장 가능성과 그 루트가 무궁무진하기에 잠재력을 무한대로 보는 게, 이상할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던 거예요. 단순히 그냥 잠재력만 높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신의 그런 높은 잠재력을 스스로도 깨닫고 있는 사람인가?”
에밀리아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녀는 중간중간 몇 번이고 강후에게 정신 제어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리아는 미련이 남았는지 이따금씩 시도를 했다.
그리고 막힐 때마다 쓴웃음을 지었다.
강후가 자신의 노림수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힘으로 찍어누른다면, 얼마든지 강후를 억누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니까.
그렇지만 에밀리아는 헌터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한대의 잠재력이 궁금했다.
자신을 그토록 아낀다는 성좌도 자신을 수치화된 잠재력으로 표시하는 판국에.
유일하게 강후에게만 무한대의 판정을 내린 것이다. 쉽게 말하면 측정 불가라는 뜻이다.
에밀리아가 말을 이었다.
“결론은 후자예요. 당신은 나를 보고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모두 들여다보듯 행동하고 있잖아요?”
“좋아해야 되는 겁니까?”
“호호. 그건 자유죠. 어쨌든 스스로의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보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리고 제 분수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확실히 알죠.”
“맞아요. 그걸 느꼈던 거예요. 오만하지는 않지만, 자신감은 충만한. 딱 그 경계의 사람.”
“칭찬을 조금 더 들으면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인데.”
“정선규 씨. 시간이 되면 나중에 파리에 있는 에밀리아 타워로 와요. 우리 한 번 더 만나죠.”
“스카우트 제안입니까?”
“헌터 대 헌터로의 호기심 정도로 해 두죠. 당신 같은 사람은 백날 영입하려고 해도 안 온다는 것을 난 알거든요.”
에밀리아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경험이 말해 준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리고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헌터들은 절대 누군가에게 함부로 소속되지도 않고, 쉽게 자신의 옆을 내어주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예속되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여지를 주지도 않는다. 가까이 두려고 하면 멀리 날아간다.
에밀리아는 강후에게도 똑같은 분위기를 느꼈고, 이는 정확히 꿰뚫어 본 것이었다.
“얼굴 정보만 한 번 등록할 수 있게 해 줘요. 그러면 언제든 제지 없이 출입 가능하니까.”
졸지에 이뤄지게 된 얼굴 촬영.
강후는 거절하지 않았다.
이름이 팔리는 것도 아니고, 뻔한 얼굴이 팔리는 것 정도야 신경 쓸 것도 아니기에.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좀처럼 접점을 만들기 힘든 열세 개의 별과의 인연이 이런 식으로 생길 줄이야.
우연은 소리소문없이 찾아온다더니, 오늘 에밀리아와의 만남이 딱 그랬다.
즉흥적으로 홍천 해방구에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다.
* * *
다시 해방구의 시가지로 돌아온 강후는 바로 쇼핑에 나섰다.
이미 혈루라는 좋은 녀석을 갖고 있기에 무기는 관심 대상에서 제외했다.
착용하고 있는 아수라의 흉갑 역시 효율이 좋아서, 4등급 이상이 아니면 볼 일이 없을 듯했다.
그렇게 딱히 교체가 필요 없는 부분을 제외하다 보니, 관심 부위가 추려졌다.
옵션이 괜찮다는 가정하에 목걸이와 팔찌가 바꿀만하다는 계산이 섰고.
특히 여유가 남아 있는 반지 쪽이 가장 부담 없는 부위일 듯했다.
스탯의 방향성은 명확했다.
체력, 항마, 맷집.
강후는 딱 세 가지 분야에만 관심을 뒀다.
‘항마 95, 맷집 320.’
스탯을 재차 확인했다.
그래도 아이템을 착실히 잘 착용한 덕분에 두 스탯의 수치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방어 쪽 스탯을 챙기기가 대단히 어려운 암살자 직업군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비슷한 레벨대의 암살자를 생각하면 높은 게 사실이지만, 내 기준으로는 낮다.’
강후는 만족하지 않았다.
왜냐면 점점 실력 좋은 헌터들과 꼬일 만한 일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에 오늘도 에밀리아를 만나지 않았던가? 직전에는 강동현과 교전도 치렀고 말이다.
이런 헌터를 상대로는 100% 회피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피한다고 한들, 일부는 공격에 노출될 계산을 반드시 해야 했다.
결국, 한두 방은 맞을 수밖에 없다. 상대도 바보는 아니니까. 매번 수 싸움을 이길 순 없다.
그렇기에 타격을 당하더라도 몸이 버틸 수 있게 하는 스탯인 항마와 맷집은 정말 중요했다.
‘스킬을 써서 막는다는 것 자체가 방어자 입장에서는 턴을 한 번 빼는 거니까.’
방어자 입장에서 최고의 그림은 잘 막는 것이 아니라, 맞아도 버틸 수 있는 것이다.
강동현이 무서운 존재인 이유가 바로 맷집 때문이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맞아도 끄떡없기에 공격자 입장에서 방어로 인한 공백이 계산되지 않는다.
자신의 공격이 성공해도, 그것이 상대의 공세를 늦출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는 것이다.
강후가 시장을 꼼꼼하게 돌아보면서 고르고 또 골랐던 아이템 중 하나를 선택했다.
애초에 팻말에 붉은 글씨로 ‘흥정 불가’라고 되어있는 곳이라 달리 가격 협상도 하지 않았다.
“이걸로 합시다.”
“100억이요. 딱 정가지.”
“그렇긴 하군요.”
강후가 판매자로부터 산 것은 3등급 아이템이었다. 무광택 검은 반지로 특색은 딱히 없었다.
【욕망의 그늘 - 반지】
【등급 : 3등급】
【맷집 + 75】
【항마 + 75】
꽤 괜찮은 반지였다.
양쪽 스탯을 두루 챙기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새 반지의 착용으로 강후의 맷집은 무려 395가 됐다. 400이 코앞이 됐다.
이 정도면, 필살기 성의 공격을 정통으로 얻어맞는 정도만 아니면 ‘즉사’는 면할 수 있었다.
죽는 것과 사는 것은 큰 차이인 만큼, 매우 유의미한 스탯 라인에 올라온 셈이었다.
일반적인 암살자의 성장 곡선을 따른다면, 레벨 300을 찍어도 못 만들 맷집 스탯이기도 하다.
‘버는 건 어려운 데, 쓰는 건 1초면 끝이군.’
강후가 66억 원까지 쭉 내려간 통장 잔고를 보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빙의 직후와 비교하면 경제 단위가 달라진 것이 맞기는 하지만.
장시환이나 채관형 같은 헌터들의 경제 단위를 생각하면,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이나 다름없다.
돈이라는 게 쓰려고 마음만 먹으면, 펑펑 쓸 곳을 찾는 것은 쉽다.
마음 같아선 로또 복권 번호라도 기억하면 좋을 텐데, 원작에서 복권 얘기가 나온 적이 없다.
바로 그때.
해방구 전체로 송출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아무 때나 방송되는 것은 아니고, 해방구의 메인 이벤트가 있을 때만 나오는 전체 방송이다.
그 말은 즉, 곧 데스 매치가 있을 예정이라는 뜻이다.
해방구의 핵심 수입원 중 하나이기도 했다.
참여하는 헌터의 목숨을 걸고서 이뤄지는 데스 매치는 엄청난 금액의 판돈이 몰리기 때문이다.
판을 깔아주는 해방구 운영 당국이 배팅 수수료로만 무려 5%를 갖기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도박이 패가망신하기는 딱 좋지.”
강후가 다른 시장으로 발걸음을 돌리려고 했다.
배당에 따라서 2배, 3배로 돈을 불리는 것도 가능한 것이 데스 매치의 배팅이지만.
반대로 순식간에 몇십, 몇백억 원을 잃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해서다.
뒤늦게 본전 생각이 난다고 한들, 돌려받을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몇몇 헌터가 잃은 돈이 아까워서 행패를 부리다가 목 잃은 귀신이 됐다는 이야기는…….
더 이상 도시 전설 같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장 데스 매치가 벌어지는 특설 경기장 외곽에 있는 수많은 가묘(假墓)가 그 증거였다.
가묘는 돈 달라고 행패를 부리다가, 해방구 관리 조직인 케낙스에게 죽은 헌터의 무덤이다.
바로 그때.
“음……?”
무심결에 대형 전광판에 표시된 데스 매치 참여자의 얼굴을 본 순간 강후의 시선이 멈췄다.
앞부분에 스쳐 간 얼굴은 일면식도 없는 헌터의 얼굴이었지만.
맨 마지막에 나타난 얼굴은 강후의 기억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강후는 그 남자의 이름이 전광판에 표시되기 전, 이미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박상오?”
원작처럼 흘러간다면 절대 지금은 죽지 않을 사람!
그런 사람이 데스 매치 참여자 목록 마지막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확률 100%의 도박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