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에밀리아 로즈 (1)
“믿을 만하답디까?”
“피차 얼굴 한 번 안 본 사이에 믿을 건덕지가 뭐가 있어? 실력이 곧 신뢰지.”
“하기야 이예린이 칭찬만 열심히 쏟아낸 용병이 정선규 말고는 없었다죠, 아마?”
“그 깐깐한 여자가 필터링을 했는 데도 이 정도 칭찬이라면 믿어도 될 거다.”
김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예린과 안면을 터고 지낸 지는 오래됐다. 그녀는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말만 붙여줬다. 미사여구 없이.
그렇다면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듯이 의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김수경은 딱 한 가지가 마음에 걸렸다.
암살계열의 헌터면 초근접전을 해야 하는데, 과연 전방에서 버텨내 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결국 전종두의 앞에 가장 가까이 몸뚱이를 들이대야 하는 것은 강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암살계 헌터의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았다. 멀리서 상대의 목숨을 날로 먹을 수는 없다.
“빨리 시간이 흘렀음 좋겠군.”
벌써 두근거렸다.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강후지만 기대가 됐다.
그것은 울산의 도살자 공태수의 왼팔을 깨끗하게 날려버린 실력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 * *
“여긴 그래도 좀 낫네.”
홍천 해방구로 들어설 입구 근처에 도착한 강후가 여유롭게 주변을 살폈다.
초입에서부터 마약초를 태우는 매캐한 냄새가 났던 김천 해방구와는 달리.
홍천 해방구는 가로수로 심어둔 아카시아의 꽃향기가 물씬 풍겨오고 있었다.
게다가 늦은 밤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가로등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주변이 전부 밝았다.
이상한 것은 보통 입구에서는 작은 다툼이든 시비든 왁자지껄한 분위기여야 하는데.
마치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원래부터 사람이 없었다기보다, 뭔가에 이끌려서 사람이 어디론가 쭉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다만 피비린내라던가 격렬한 마나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선, ‘전투’는 아닌 듯했다.
흔적을 쫓는 것은 쉬웠다.
아직 남아 있는 열기와 마나의 흐름은 결국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에는 강후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인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수많은 헌터에게 둘러싸여 열렬한 사인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여성 헌터 한 명이 보였다.
‘에밀리아 로즈?’
강후가 그녀를 바로 알아봤다.
호박색의 눈동자.
은회색의 긴 머리에 C컬이 잔뜩 들어간 머리카락 끝자락의 웨이브.
여기에 올 블랙의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은 셔츠와 일자형의 바지까지.
원작에서 에밀리아 로즈라는 이름으로 설계된 네임드 헌터였다.
옆에서 보는 콧날이 무엇이든지 베어버릴 것처럼 날카롭기 때문에 더 잊을 수 없는 이미지였다.
‘성좌 정보에서부터 답 없네.’
강후가 스캔된 성좌 정보의 목록을 보고는 혀를 찼다.
단순 비교하면 장시환이 보유하고 있는 성좌의 수와 같았다. 30개의 성좌가 함께하는 것이다.
물론 그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하게 있는 이유는 단지 성좌가 많아서는 아니었다.
‘열세 개의 별이니까.’
그녀의 미래 때문이다.
현재 강후가 직접 마주하거나 혹은 소식을 통해 접한 적이 있는 열세 개의 별은 총 네 명.
장시환. 채관형. 유청화. 케이시 렉스. 여기에 이제 다섯 번째 인물이 추가되는 셈이다.
물론 지금 이 시점에 에밀리아 로즈가 열세 개의 별에 소속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원작에서 본격적으로 직접 등장하는 시점은 지금보다는 한참 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잠재적인 적수를 눈앞에서 마주하게 된다는 건,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맛이 있었다.
‘정신계. 마법계. 여기에다가 성좌 능력 덕분에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도 언어적 교감이 가능하지.’
에밀리아의 특징이다.
그녀에게는 소통의 장벽이라는 게 없다. 메인 성좌가 모든 감정과 언어의 교류를 가능하게 한다.
그녀가 무서운 이유는 사실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상대방도 모르게 생각과 신념을 심는다는 것이다. 아주 은밀하고 교묘하게.
원작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열세 개의 별이 직접 나서지 않고도 많은 적을 처리했었다. 비겁하게.
그래서일까.
지금 이 장소에도 그녀의 매력과 유혹에 취한 헌터 무리가 꽤 보였다.
자살을 지시하면, 미련 없이 목숨을 끊을 것 같은 헌터도 상당수 보이고 말이다.
카득.
강후가 주머니에서 꺼낸 솔라키움 하나를 씹었다.
혹시라도 에밀리아에게 정신을 제압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녀의 정신 제어를 피하는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다.
우선 정신 제어를 당하기 전에 전조 현상처럼 드는 기분 나쁜 느낌이 있다.
그때, 그 느낌에서 자연스럽게 벗어나는 방향성만 잡으면 눈 뜨고 당하지는 않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에밀리아가 보이지 않게 매혹 스킬을 쓴다는 점이다.
사방으로 흩뿌리듯이 흩어진 매혹의 기운은 특히 이성에게 강력한 힘으로 작용한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 수컷 사마귀처럼, 이성을 상실하게 되는 셈.
“에밀리아……. 대단해…….”
“이 아이템이라도 주면 사인 한 장이라도 받을 수 있을까?”
“손 한 번만 잡아도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죽어도 좋을 것 같은데, 흐…….”
이미 정신 나간 말들을 지껄여대는 헌터가 상당수였다.
에밀리아도 그런 반응을 즐기는 듯, 도도한 눈빛을 흘리며 갈망을 고조시켰다.
그러던 와중 강후와 에밀리아의 시선이 한 점에서 교차했다.
워낙에 많은 인파가 있다 보니, 스치듯 시선이 마주쳤다가 흘러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에밀리아는 한참을 자신을 바라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느낌이 머릿속을 엄습했지만, 강후는 어렵지 않게 정신 제어를 튕겨냈다.
회피하는 방법을 잘 아는 강후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몰라서 당하는 게 문제지.
에밀리아가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강후를 향해 걸어왔다.
따각. 따각.
옷에 컬러를 맞추어 신은 검은색 플랫 슈즈가 특유의 발소리를 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아주 독한 성좌들만 잔뜩 달라붙은 녀석이구나.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악마들만 붙었다.】
그때, 차원 강탈자가 에밀리아가 계약한 성좌의 면면을 알아보고는 차갑게 목소리를 깔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다시 살피니.
과연 장시환이나 채관형이 계약한 성좌들보다 훨씬 더 악독한 성좌들과 계약되어 있었다.
성좌와의 계약은 보통 계약자인 헌터의 성향이나 본능을 따라가게 되기 마련이다.
에밀리아쯤 되는 네임드 헌터라면, 원하는 성향의 성좌와 계약하는 것은 쉬운 일.
악마에게 끌려가는 순수한 어린 양이 아니라, 직접 악마가 되어가기 위한 조형을 하고 있는 셈.
“저기? 실례지만 대화 가능할까요?”
“와, 저 헌터는 뭔데 갑자기 에밀리아가 가서 직접 말을 거냐?”
“뭔데, 쟤는?”
“역시 얼굴부터 생기고 봐야 되는 건가. 하기야 에밀리아도 우리 같은 오징어에게는 말 걸기 싫겠지.”
“새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반반하게 생겼네.”
에밀리아가 강후에게 직접 말을 걸자, 부러운 눈빛이 칼날처럼 꽂혀 들었다.
애초에 남의 시선 따위야 관심도 없는 강후이니, 에밀리아 말고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강후가 되물었다.
“무슨 볼일인지?”
“괜찮으면 술 한 잔 어때요? 제가 머무는 방에 꽤 괜찮은 술들이 있거든요.”
“와…… 미친.”
단순 대화 신청이나 데이트 제안도 아니고, 자신의 방에 버젓이 남자를 초대하는 꼴이라니!
강후에게 원망에 가까운 눈빛이 쏟아졌다.
‘수작질은 아닌 듯한데.’
어차피 정신 제어가 안 통한다는 것은 조금 전 보이지 않는 탐색전으로 파악이 끝났을 터.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질을 하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설령 다른 계획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현장을 빠져나올 방법은 많다.
당장에 순간 이동만 활용해도, 세이브 포인트로 즉시 빠져나오는 것은 일도 아니니까.
‘얼굴도장. 괜찮겠군.’
강후가 에밀리아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
그녀와의 독대가 자신에게 손해가 될 것은 전혀 없어 보였다. 왜 술자리를 원하는진 모르겠지만.
* * *
해방구가 전반적으로 위험한 곳으로 불리긴 해도, 프라이빗하면서 안전한 곳은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에밀리아가 머물고 있는 피닉스 호텔은 해방구 안에 있지만, 어느 곳보다도 안전했다.
해방구 전체를 관리하고 있는 관리 조직인 케낙스(Kenax)의 직영 호텔이라 보안은 최고였다.
여길 잘못 건드렸다가는 해방구에서 척살 대상이 되기에 아무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강후는 에밀리아를 따라가는 동안, 딱 한 가지만 신경을 써서 움직였다.
모든 스킬과 능력이 억제되는 구역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감지였다.
마석을 많이 쓰면, 억제 구역을 만드는 것 자체는 언제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마나의 흐름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는 강후에게 그 정도의 흐름을 살피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다행히 오는 내내 함정의 조짐은 없었다. 애초에 에밀리아는 그럴 생각도 없었던 듯했다.
그렇게 들어온 그녀의 공간.
예상은 했지만 피닉스 호텔 최상층 펜트하우스였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미리 잘 닦아두었던 고풍스러워 보이는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섀클턴 위스키에요.”
“기념용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1907년에 남극 탐험을 떠났던 어니스트 섀클턴이 베이스 캠프에 묻어뒀다던 그 위스키죠.”
“맥킨레이의 그 위스키를 말하는 겁니까?”
“맞아요. 그 위스키죠.”
애초에 에밀리아가 운을 뗄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되니 손끝이 제법 떨렸다.
기념용이 아닌 실제 위스키라면 1896년 또는 1897년산, 둘 중에 하나다.
후자로 생각해도 125년이 훌쩍 지난, 역사가 깊은 위스키를 마시게 되는 셈이다.
이 한 잔은 돈으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흘러온 시간 자체로 의미가 깊은 위스키였다.
넉넉히 잔에 위스키를 채운 에밀리아가 강후에게 쓱 내밀었다.
소매를 걷어 올린 셔츠 끝으로 구릿빛 손목을 따라서, 기분 좋은 머스크 향이 났다.
에밀리아가 말을 이어갔다.
“그쪽.”
“정선규입니다.”
“좋아요. 선규 씨. 혹시 제가 누군지 모르나요?”
“잘 알죠. 헌터 생활을 시작하면 무조건 듣게 되는 이름인데.”
“근데 제가 신기하지 않아요?”
“꼭 신기해해야 하나요?”
강후가 되물었다.
네임드라고 불리는 헌터들은 이상한 ‘자존심’ 같은 것이 있다.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감격하거나, 존경스런 눈빛을 보내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일전에 장시환이 무미건조한 강후의 반응에 흥미를 느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내가 유명인인데 모르는 척해? 정말 날 모른다고? 하는 그런 이상한 자존심 자극 말이다.
“뭐, 그런 건 아니죠.”
“결국, 둘 다 같은 헌터일 뿐인데. 당신이라고 특별할 것이 있다 생각하진 않아서.”
“큭.”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날카롭다 못해 뼈가 시릴 만큼 차가운 일침에 에밀리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랄까.
날 이렇게 대한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같은 느낌이랄까? 강후의 말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