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강동현과의 조우 (2)
* * *
한서연은 보기 좋게 깨진 분위기 덕분에 안전(?)히 파자마로 갈아입고 방으로 향했다.
뭔가 가져오려는 것이 있는 모양. 강후는 거실에서 풍기는 은은한 커피 향을 느끼며 앉아 있었다.
사실 본능에 충실하려면 얼마든지 충실할 수 있었다.
감정은 메마르고 무디어졌을지 몰라도, 욕구는 선명하고 충만하기 때문이다.
성욕? 당연히 있다.
미친 세상을 그럴듯하게, 정상적으로 살면서 헤쳐나가려면 성욕 역시도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하게 욕구를 채우자고 그녀의 마음을 이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달리, 한서연에게는 비즈니스적으로 가볍게 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것은 원작의 신강후에게 빙의하면서 자연스럽게 덧씌워진,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몇 번이고 지워보려고 해도, 너무 깊이 박혀 있어 절대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도장과도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았다, 라는 말과 함께 한서연이 제법 두꺼운 종이 묶음을 가지고 다가왔다.
“오빠, 이거 봐봐.”
“뭔데?”
“나는 알잖아. 오빠가 어떤 병으로 고생하는지.”
“그렇지.”
한서연은 강후의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강후가 헌터로서의 능력을 각성한 순간부터 지독하게 시달렸었던 병이기 때문이다.
서로 열렬히 사랑했던 때가 있었기에, 그녀가 그의 병을 알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전부터 꾸준히 알아봤었고, 요즘은 더 다방면으로 병을 치료해 줄 사람이 있나 찾아봤었어.”
“없을 거야. 불치병이야.”
그녀에게 단언하듯 말했지만, 아예 기대가 없지는 않았다.
단,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만큼,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가능성을 낮게 보는 쪽에 가까웠다.
“루마니아에 각성한 후, 희귀병이 발병한 헌터에 대해 집중적으로 조사해 온 사람이 있어.”
“루마니아?”
“미하이 반쿠(Mihai Bancu)라는 연구자가 있어. 그 사람도 헌터고, 동시에 포션 과반응증으로 고생했던 사람이야.”
“포션 과반응증이라…….”
흔한 불치병은 아니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어감이 생소하지 않았는데, 한 번쯤 생각해 본 적이 있는 병이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짚이는 바가 있어, 그녀에게 바로 되물었다.
“포션을 마시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건가?”
“응, 맞아. 그래서 체력, 마력 포션을 절대 마실 수가 없는 사람이야. 냄새만 맡아도 거부 반응이 있다고 해.”
“흥미롭네.”
무미건조하게 말한 흥미로움과 달리, 강후는 자신이 과거에 구상했던 증세와 똑같아 내심 놀랐다.
이 역시도 무의식의 구현인 것이다. 요즘 자주 만나게 되는 현실의 형태다.
“외피 증식증이나 선천성 무감각증에 대해서는 연구뿐만이 아니라 해결한 사례도 있어.”
“치료를 했다는 건가?”
“맞아. 그게 한 달 전의 일이야. 얼마 안 된 일이지. 이게 인터뷰 번역본이야.”
한서연에게 넘겨받은 자료를 보자, 과연 불치병이 치료된 사례가 있었다.
3류 언론의 찌라시 기사가 아니라, 공인된 헌터 언론에서 꼼꼼하게 작성한 양질의 기사였다.
“진짜 치료가 됐군. 후속 기사에 재발병이나 남은 흔적이 없다고도 적혀 있고.”
“맞아! 이 사람을 오빠가 꼭 한 번 찾아가 봤으면 좋겠어. 많이 힘들어했잖아. 현재 진행형이고.”
“음…….”
마스터 케이만이 유일한 해결책인가 싶었는데, 국외로도 시선을 돌릴 필요는 있어 보였다.
하지만 신중할 필요도 있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사라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통증만 핀셋처럼 걷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자체가 사라지면, 자신의 가장 큰 장점까지 같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고마워, 서연아. 굳이 날 위해서 이렇게 신경 써 줄 필요가 없는데, 고생이 많았네.”
“고생은 무슨. 그냥 운 좋게 알게 된 거야.”
“그렇다고 하기엔 쌓아놓은 자료가 너무 많은데.”
강후는 한서연이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그녀의 성격상, 꾸준히 알아봤을 것이다. 직접 발품까지 팔면서 찾아다녔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헌신적이고, 자신보다 남을 더 위하는 사람.
강후가 말을 덧붙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 자료의 대가를 지불하고 싶어. 거절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흥. 됐어. 돈은 나도 많아.”
한서연이 웃으며 답했다.
빈말은 아니다.
그녀도 헌터로서 재주가 좋은 사람이고, 정화 길드에 영입되면서 거액의 계약금도 받았을 터다.
“그래도 공짜는 싫은데.”
“그럼 내가 원하는 것 하나만 들어줘. 그러면 난 받아서 좋고, 오빠는 공짜가 아니니 마음 편하고.”
“뭐지?”
“그냥 오늘 하루. 딱 하루만 같이 시간을 보내줘. 예전처럼. 딱 한 번만.”
“…….”
말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며, 강후도 생각이 많아졌다.
과거의 감정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고 되새길 수는 있다.
한서연이 원하는 보답이 그것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연기가 아닌 진심을 담아서 말이다. 뜨거웠던 그 시절의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
강후가 짧게 말을 받았다.
길게, 말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니까. 그래서 눈빛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덧 서쪽 하늘로 해가 지고 있었다.
곧 찾아오게 될 밤.
이 세상에서 눈을 뜬 이후, 가장 길지만, 한편으로는 외롭지 않은 밤이 될 듯했다.
아주 잠깐만큼은.
과도하게 통제하는 이성의 끈을 벗어 던지고, 감정과 본능에만 충실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모든 감정을 절제하는 것만이 정답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조용히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시간은 깊게, 뜨겁게, 그리고 밀물처럼 빠르게 흘러갔다.
* * *
다음 날 저녁.
강후는 클럽 하데스를 500m 정도 앞에 둔 지점까지 도착해 있었다.
일전에 대규모 유혈 사태와 납치 사건이 있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번창하는 중이었다.
해가 지기도 전에 몰려들기 시작한 손님들이 그 증거였다.
금요일 밤의 쾌락과 유흥을 마음껏 즐기기 위해, 젊은 영혼들이 삼삼오오 입장하고 있었다.
물론 손님의 대다수가 이클립스 소속이거나, 일반인 위주일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이클립스가 범죄 조직이기는 해도, 일반인은 건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상품성이 없어서 무시하는 쪽에 더 가깝기는 했다.
그들은 마나를 다룰 줄 아는 헌터를 주로 납치한다. 그리고 수용소로 보내, 마석을 캐게 한다.
즉, 마나를 쓸 줄 아는 일꾼이 필요한 거지 밥만 축내는 일반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내부 구조가 바뀌었을 수 있다는 것.’
지난번에 한 차례 전투가 있었기에 내부 구조가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층계의 위치가 바뀌진 않았겠지만, 가는 길이 예전과 다를 수는 있는 것이다.
은신 상태에서 무영으로 기척을 숨기고 들어가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적절하다.
다만 은신을 마냥 오래 유지할 수도 없기에 강후의 셈이 살짝 복잡해지려는 찰나.
“여기서 뭐해요?”
“……?”
갑자기 누군가가 옆에서 툭, 강후의 어깨를 쳤다.
대전역에 있을 지인이라고는 한서연밖에 없는데, 도대체 누가 자신을 알아본 걸까?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파격적인 하데스의 분위기에 맞춰 몸에 쫙 달라붙는 원피스를 챙겨입은 여자가 보였다.
메이크업의 방식부터 모든 것이 평소와 달라 바로는 못 알아봤는데, 자세히 보니 윤상미였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는데?”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오빠는 여기 왜 있는데요? 그리고 옷이 그것밖에 없어요?”
“놀러 온 건가?”
“당연히 놀러 온 거죠! 오빠 같은 사람이 클럽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고. 싸우러 왔어요?”
윤상미다운 질문이었다.
맞는 말이다.
클럽에서 몸이나 흔들려고 강후가 올 일은 없으니까. 실제로 강후는 심한 몸치이기도 했다.
암살자로서의 움직임은 유려하고 화려하지만, 춤꾼으로서는 뻣뻣한 각목 그 자체다.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어차피 전부 다 알아도 그녀는 들어갈 수 없는 던전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클립스보다 자신에게 백만 배는 더 호의적인 윤상미의 마음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얘기를 듣고 난 윤상미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도 처음 듣는 소식인 모양이다.
“내가 도와줘요?”
“도움이 필요해서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어쨌든 외부에 비공개된 지하 7층을 가야 하는 거잖아요. 혼자는 어려울 텐데?”
“혼자 가나 둘이 가나 똑같아.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거면, 차라리 혼자인 게 속은 편하지.”
“당연히 힘으로 뚫으려고 하면 그렇죠. 하지만 그건 저를 너무 단순하게 본 거 같은데요.”
“그럼 단순하지 않은 방법이 있나?”
“오늘 찐하게 눈 맞은 연인 콘셉트는 어때요?”
“쉽게 설명해 봐.”
“여긴 클럽이잖아요. 지하 6층을 벗어나, 은밀한 공간으로 남녀가 이동하는 게 이상할 것도 없다는 얘기에요.”
클럽을 즐기지는 않아도, 그 안에서 어떻게 청춘남녀의 감정이 고조되는지는 잘 아는 강후였다.
윤상미의 말이 그럴듯했다.
“굳이 왜? 들어가도 나밖에 못 들어갈 텐데. 네가 취할 수 있는 이득이 없어.”
“그냥 오빠가 저한테 빚이나 좀 지게 하려는 거예요. 그런 채무감을 싫어하는 오빠잖아.”
“일부러 빚을 만든다. 크큭.”
웃음이 나왔다.
하루 전, 강후가 이현석을 대했던 것과 비슷한 의도로 윤상미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다 돌고 도는 모양이다.
인연의 끈을 만들기 위해, 상대로 하여금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드는 방법은 분명 효과가 있다.
“도와줘요, 말아요?”
윤상미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손발을 맞춰주면 접근이 좀 더 수월하기는 하다.
지하 6층까지 쭉 들어갈 수 있으면, 은신과 기척 숨기기에 투자해야 할 시간도 그만큼 줄어든다.
게다가 아직은 이클립스 전체에 강후의 얼굴이 팔린 것이 아니었다.
차소희의 죽음을 강동현이 내부 비밀로 묻은 만큼, 극소수의 관계자만 강후의 인적사항을 안다.
오늘이 기회라면 기회다.
“도와줘. 기꺼이 빚을 지겠어.”
강후가 윤상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참, 그녀와의 인연도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사이인 듯했다.
다시 만난 그녀와 또 한 번 하데스에서 호흡을 맞출 일이 생겼다.
과거와는 달리 좀 더 진한 콘셉트로 말이다.
* * *
클럽 하데스에 입장한 후.
충분한 시간이 흐르고.
강후와 윤상미가 지하 7층으로 갈 기회를 잡기 위해, 서로 호감을 느낀 남녀의 연기를 할 즈음.
강후는 곁눈질로 살피던 주변의 시야에 생각지도 않은 사람이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강동현이었다.
“다들 고생 많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다행히 강동현과 시선이 마주치지는 않았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절묘한 시점에 나타난 그.
후우우욱.
강동현이 연초의 희뿌연 연기를 힘껏 뿜어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 순간.
“실례하지.”
강후가 자신과 마주 본 윤상미를 방패로 삼아, 그대로 그녀에게 입술을 포갰다.
간발의 차이로 강동현의 시선이 윤상미의 뒤통수를 훑으며 지나갔다.
남녀의 진한 스킨십과 유혹이 오가는 광경이야 클럽에서는 흔하다 못해 당연한 일이기에.
강동현은 대수롭지 않게 쓱 훑어보고는 어디론가 향했다.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