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68화 (68/304)

68화 강동현과의 조우 (1)

* * *

생각은 처음부터 확실했다.

친분을 만든다.

조카의 목숨을 빚진 마당에 은원 관계를 확실히 하는 이현석은 절대 제안을 외면할 수 없을 터.

제안은 티타임 한 번이라는 작은 이슈로 시작하지만, 강후는 거기서 관계를 쌓을 생각이었다.

“그걸로 되겠습니까?”

“이현석 님 같은 분을 사적으로 볼 수 있다면, 수십억 원이 아니라 수백억 원의 가치를 하지요.”

“허허. 이런 제안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요. 조카를 구해 준 대가치고는 너무 적지 않습니까?”

이현석의 말이 강후가 노린 점이었다. 그로 하여금 미안하면서도 빚진 듯한 마음을 들게 한다.

그것이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생각하기 나름이지 않을까요?”

“좋습니다. 그러면 조속한 시일 내에 차 한 잔 마시면서, 조금 더 건설적인 얘기를 해 보죠.”

“감사합니다.”

“구두 약속은 아무 의미가 없으니 이걸 드리겠습니다.”

이현석이 품속에서 꺼내어 강후에게 건넨 것은 ‘피의 증표’라고 불리는 작은 명패였다.

붉은색의 바탕에 심연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이현석의 서명이 음각으로 새겨진 증표.

이것이 있으면 언제든 그와 만날 약속을 잡을 수 있고, 독대가 가능하다.

보통 친분이 깊은 사람들에게만 피의 증표를 건네곤 하는데, 이것을 받은 것이다.

아마 전세혁도 피의 증표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현석과는 막역한 사이니까.

“조만간 연락드리죠.”

“자, 번호도 여기.”

이현석이 명함을 내밀었다.

자신의 개인 번호였다.

금테까지 두른 명함으로 건네는 것을 보니, 아마도 일대일 연락처인 모양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정말 전화번호를 줘야 할 사람에게만 개별적으로 주는 번호라는 얘기다.

만약 강후에게 명함과 함께 건넨 전화번호 끝자리가 0001이라면.

다음에 명함을 받는 사람에게 주는 번호는 0002인 셈이다.

이럴 경우, 0001의 번호가 외부에 유출되면 무조건 강후의 소행이 된다.

한마디로 이현석은 강후에게 신뢰를 보이면서, 동시에 신뢰에 대한 테스트도 같이한 셈이다.

이 명함의 번호로 다른 누군가의 전화가 걸려오면, 그 즉시 강후에 대한 신뢰는 끊어질 터다.

“곧 연락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수현이는 다음에 직접, 정식으로 감사 인사와 사과의 말씀을 드리도록 단단히 교육시키겠습니다.”

“꼭 그러실 필요는 없지만, 사양은 않죠.”

강후가 웃으며 답했다.

어쨌든 이렇게 이현석과의 확실한 인연의 고리를 만들었다.

어지간한 헌터라면 만날 기회는커녕, 가까이서 얼굴 보기도 힘든 남자와의 독대라니.

전략적 가치가 큰 인물과 교류하게 된 만큼, 앞으로 미래를 설계하는 맛이 더 클 듯했다.

‘이제 대전역으로 가야겠군.’

강후의 시선이 KTX 포항역으로 향했다.

이제 기차를 타고서 대전역으로 갈 시간이다.

클럽 하데스. 지하 7층의 비밀을 찾으러.

* * *

그 시각.

흑골단 대장 신준호는 급히 소환한 남자를 만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장갑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어. 훔쳐 간 년이야 조사하면 알게 될 테니 그것도 괜찮아. 다만 이 새끼는 꼭 잡아서 죽이고 싶군.”

“일단 영상으로만 봐서는 누군지 알 수 없겠군요…….”

신준호의 말을 들은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골 가면으로 얼굴 반 이상을 가린 신준호와 달리, 남자는 딱히 그런 위장은 없었다.

대신 얼굴이 좀 이상했다.

표정이나 초점이 없는 느낌이랄까? 마치 감정이 없는 기계의 가짜 얼굴을 보는 느낌이었다.

신준호를 비롯해 이 남자를 아는 사람은 그를 이름이 아닌 ‘해결사’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의뢰 성공률 99%.

보수는 비싸지만, 일단 맡기면 어지간한 의뢰는 반드시 답을 얻어내는 실력자였다.

신준호가 말을 이었다.

“이년을 도와준 이 새끼를 반드시 잡고 싶어. 죽이고 싶은 게 아니라, 능력이 너무 궁금해.”

“이 위치에서 해방구 밖으로 한 번에 사라졌다, 이 말이죠.”

“그렇지. 티끌만큼의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 그 뒤로 해방구 내에서 CCTV에 잡힌 게 없고.”

신준호는 의문의 복면 남자에 대한 분노와 관심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전후 상황을 파악한 결과, 엄청난 거리를 이동하는 스킬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여서다.

신준호가 계약한 성좌는 헌터의 인육을 먹으면, 일부 능력이나 스킬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 말인즉, 강후를 찾아내 그를 ‘먹으면’, 저 공간 이동 능력을 얻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까짓거 2등급의 장갑 아이템은 잃은 셈 쳐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후가 민수현을 구하는 과정에서 쓴 능력은 가치가 상당한 것이었다.

시간, 공간을 다루는 능력은 파급력이 클수록, 부르는 게 값이기 때문이다.

얼추 앞서 있었던 상황의 흐름과 맥락을 모두 파악한 해결사가 입을 열었다.

최소한으로만 입을 움직여 목소리를 내는 것이 확실히 사람답지 않은 이질감을 풍겼다.

“일단 기존 보수로는 힘들겠습니다.”

“하여간 빌어먹을 돈 귀신 같은 새끼…….”

“의뢰를 받을지 말지는 제가 정합니다. 좋은 대답은 아닌 것 같은데요.”

“기존 보수로는 힘든 이유나 들어보자. 왜?”

“남자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잖습니까. 공간 이동 능력을 빼고는 파악된 능력도 없고.”

“어차피 우리 흑골단에서 지원을 붙여줄 텐데, 그걸로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거냐?”

“쓸모없습니다.”

다른 헌터가 이런 말을 신준호에게 지껄였다면, 진즉에 머리와 땅이 딥키스를 나눴겠지만.

실력 좋기로 유명하고, 동시에 흑골단에 제법 많은 도움을 준 해결사이기에 그렇지 못했다.

신준호가 체념한 듯 말했다.

“그래. 어떻게 해 줄까?”

“보수는 선금입니다. 견적을 내드릴 테니, 먼저 입금하십쇼.”

“그래. 그러지.”

“잠시.”

해결사가 강후가 머물렀던 자리를 따라서 천천히 걸으며 두 눈을 감은 채, 뭔가를 느꼈다.

해결사에게는 마나의 흔적을 쫓고 교감하는 능력이 있었다. 일종의 영적(靈的) 능력이기도 하다.

성좌에게서 비롯된 능력이지만, 타고난 천성도 있어 시너지가 정말 좋았다.

“허허.”

해결사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보였다. 강후가 이 자리에 남기고 간 흔적과 그 강렬함이.

“뭐가 보여?”

“아주 듬직한 성좌가 뒤를 지켜주고 있군요. 무서운 건, 이놈은 그 성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미친놈이냐?”

“미친 것과 대단한 것은 한 끗 차이. 제 느낌에는 후자인 것 같군요. 재밌겠어. 재밌겠는데…….”

썩은 미소를 지으면서 호기심을 표출하는 해결사의 모습은 불쾌한 골짜기를 보는 듯했다.

신준호도 여자를 구출한 그 남자의 능력이 보통이 아님은 일찌감치 느끼고 있었다.

차라리 잘 됐다.

이것을 기회로 삼아서 해결사가 녀석을 잡아 오면, 그 능력을 착실하게 취하면 된다.

지금껏 늘 그래왔고, 그것이 신준호를 흑골단의 대장이 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김천 해방구가 흑골단의 손에 들어온 이유이기도 하고.

“강한 이끌림이 느껴진다.”

시종일관 무표정했던 해결사의 입꼬리에 미소가 걸렸다.

흥미가 가는, 강자의 냄새가 풍기는 그런 존재가 아니면 절대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그간 해결사가 관심을 보인 헌터가 얼마나 상당한 실력자였는지를 잘 아는 신준호이기에.

갑자기 달라진 해결사의 표정에 그 역시 흥미가 동했다.

도대체 어떤 놈인 걸까?

“입금해 주십쇼. 바로 쫓게.”

이미 해결사는 잔뜩 몸이 달아 있었다.

* * *

“해방구를 다녀와서 그런지, 대전역 정도는 두 발 뻗고 자도 되는 안전지역으로 보일 정도네.”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해방구에 비해서 확실히 안전(?)해 보이는 풍경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그랬다.

해방구는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헌터의 시체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지만.

적어도 대전역 앞에는 시체가 없었다. 물론 으르렁대는 헌터는 꽤 있었다.

특히 이클립스 소속의 헌터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데스는 이제 이클립스의 통제 아래 있으니까, 확실히 접근이 좀 껄끄럽기는 한데…….’

그래도 가 보고 싶었다.

초대량의 마나가 출입의 열쇠가 되는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

발견해 놓고도 아무도 못 들어간 던전이라면, 안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이득이 꽤 많을 것이다.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나오는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강후에게는 공간 이동이 가능한 성좌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차원 강탈자를 다른 성좌가 대체할 수 없는 이유라고 생각할 정도로 성능이 좋은 능력이다.

바로 그때.

전화가 걸려왔다.

대전역에 온다고 말한 적은 없었는데, 여자의 직감인 걸까?

“응, 서연아.”

한서연의 연락이었다.

* * *

그녀의 집으로 초대를 받았다.

연애하던 시절, 수시로 드나들었던 그녀의 집이라 강후의 입장에서 어색할 것은 없었다.

왜 뜬금없이 전화가 왔나 싶었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녀가 정화 길드에 정식 영입된 것이다.

즉, 위성 길드인 ‘해어화’ 길드에서 실력을 인정받아 일종의 스카우트가 된 셈이다.

프로 스포츠로 따지면 2군에서 1군으로 콜업된 것이니, 감개무량한 것은 당연한 일.

그녀의 기쁜 마음은 백번 이해했지만, 강후의 입장에서는 운명의 장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최대의 적이 될 조직에 소속된 전 여자친구라니.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 있는 걸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무조건 서연이와 싸우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때의 일은 그때 가서 걱정하기로 했다.

한서연의 집에 들어온 강후가 외투를 벗고는 그녀가 건넨 탄산수 한 잔을 마셨다.

마침 갈증이 났던 차라 시원하게 마시고 있으니, 그녀가 웃으며 대화의 운을 뗐다.

“오빠가 못 본 사이에 많이 달라진 느낌이 드네. 여기서도 강인한 마나의 힘이 느껴져.”

“립 서비스가 좋아졌네.”

“아냐! 정말로 그렇게 느낀 거야. 오빠도 알잖아. 내가 제법 마나는 예민하게 반응하는 거.”

“그렇긴 하지.”

“청명 수용소에서 탈출한 그때 만났던 오빠의 느낌과 전혀 달라. 강해진 것 같아. 그것도 엄청.”

“많은 일이 있었지.”

강후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경험한 변화가 가까운 사람에게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연애할 때도 자신의 눈빛 하나하나, 미세한 감정의 흐름까지 읽었던 한서연이다.

그만큼 감각적인 그녀이기에 변화를 알아차리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오빠가 안 올 줄 알았어.”

“왜?”

“오빠는 항상 거리를 두려고 하니까. 그러면 이 집이 오빠에게는 가장 불편한 장소잖아?”

“바꿔 생각하면 어떨까. 거리에 대한 부담이 없으면, 딱히 불편할 것도 없는 장소야.”

“크큭, 가까이 오지 말란 얘기야?”

“우리는 좋은 친구라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는 얘기지.”

강후의 말을 들은 한서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체념한 듯 냉수를 들이켰다.

물론 강후의 말에 상처를 받았다거나,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자신과 강후는 연인 관계가 아니다. 과거에 연인이었던 친구 사이일 뿐이다.

“좋은 친구. 그래. 오빠의 표현이 딱 맞는 것 같아.”

이내 그녀가 수긍하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고 있던 윗옷을 힘껏 벗었다.

의도한 건지.

아니면 정말 성별을 뛰어넘은 ‘친구’라고 생각해서, 편해서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속에 덧대어 입은 티셔츠 하나 없이, 바로 속옷과 속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이었다.

나름 추파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그녀의 신호였지만.

“못 본 사이에 배가 많이 나왔네.”

강후가 가차 없이 분위기를 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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