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김천 해방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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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현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쭉 듣고 난 강후는 그녀가 왜 무리해서 해방구에 갔는지 이해했다.
물론 뒤를 생각 안 하고 들어간 무모함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기는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민수현은 특정 아이템에 대해서만 히든 효과를 활성화 해 주는 성좌와 계약을 맺고 있었다.
동시에 특정 아이템의 구성 정보와 소유자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김천 해방구까지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신준호가 벗어두었던 장갑을 훔치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하지만 탈출 계획이 그녀의 머릿속에는 없었고, 결국 안에서 갇혀 버렸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손발이 잘 맞기로 유명한 흑골단의 영역 안에 있었으니, 나올 엄두도 못 냈을 터.
강후가 도착했을 때, 그녀가 도망치고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껴 먹었던 비상식량도 바닥을 드러냈고, 탈수 증상도 점점 심해져 답이 없었던 상황이었다.
“멍청한 머리를 쥐어뜯으며 후회하고, 죽을 생각으로 나왔던 때였어요. 그때, 오빠가 온 거죠.”
“멍청한 건 잘 아는 것 같네.”
“보통 멍청한 게 아니죠.”
강후의 때아닌 일침에 민수현이 씨익 웃었다. 스스로도 인정하는 부분이라 기분 나쁘지도 않았다.
그녀로서는 이렇게 인연이 닿아 자신을 구하러 와준 강후에게 고마운 마음만 가득할 뿐이었다.
한편으로는 강후가 선보인 공간 이동 능력이 계속 기억에 남아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겉으로 본 복장이나 무장 상태는 분명 암살자의 모습이 맞는데, 능력 구성이 이상한 것이다.
“어쨌든 안전하게 삼촌에게 인계하고 나면, 내 일은 끝이네.”
“개인적인 감사 표시를 꼭 하고 싶은데요. 당장에는 돈이 없지만, 삼촌에게 부탁하면…….”
“됐어. 그 협의는 내가 알아서 네 삼촌이랑 할 테니까, 괜히 임의로 보상하지 마.”
“겸손하시네요.”
“겸손한 게 아니라,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의를 하려는 내 생각에 네 호의가 방해될 뿐이야.”
“엄청 까칠하시네.”
“비즈니스는 원래 까칠하게 해야 뒤끝이 안 남는 법이거든.”
“삼촌에게 많이 뜯어내세요. 제가 그만큼 삼촌에게 빚을 갚으면 되니까.”
“다음부터는 신중하고.”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에요.”
“꼰대 같은 충고는 이 정도까지만 하도록 하지.”
강후가 백팩에서 꺼낸 생수 한 병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미 두 병이나 비운 그녀지만, 여전히 목이 마른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방금 강후가 했던 말은 절대로 빈말은 아니었다.
이현석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마음의 빚을 지게 만들고, 그를 확실하게 이용할 생각이었기에.
순수한 선의와 마음만으로 세상이 멋지게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안타깝게도 이 빌어먹을 세계는 그렇게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지는 않다.
더군다나 많은 감정이 메마를 대로 메마른 강후에게 있어, 순수한 선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철저히 이익을 추구하고, 그것을 얻어내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착한 사람의 연기를 할 수도 있고, 희대의 인간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열세 개의 별이 딱 그렇다.
그들은 수많은 가면을 바꿔 써가면서, 세상을 교묘하게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할 준비를 한다.
아니, 이미 현재 진행형이다.
당장에 채관형만 해도 정유리에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여성의 인권과 아픔을 적극 변호하며, 성범죄자들 처벌에 함께 앞장서겠다지 않는가?
하나의 얼굴로만 살아갈 생각을 한다는 건, 지금 같은 세상에서는 멍청한 생각이 분명하다.
한편,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현석을 기다리는 게 따분했는지 민수현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 장갑에는 관심이 없나 보네요?”
“내 장갑이 아니니까.”
“그래도 궁금할 수는 있잖아요? 2등급이면 쉽게 구할 수 있는 등급도 아니고.”
“널 죽일 생각이면 관심이 있었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라서 말이야.”
“어…… 그럼 관심 갖지 마요.”
민수현이 몸을 움츠렸다.
레벨만 놓고 따지면, 그녀가 세 배 이상은 되는 상황이지만.
강후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시피 한 그녀는 강후에게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다.
뭐랄까.
처음부터 뇌리에 강렬하게 박힌 인상 때문인지, 강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바로 그때.
“왔군.”
그녀보다 먼저 이현석을 알아본 강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신과는 정반대인 구릿빛 피부와 덥수룩한 수염, 빳빳하게 다려입은 군복은 원작에서 조형해 두었던 이현석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의 조직인 ‘심연’을 상징하는, 눕힌 S 모양의 문양이 그려진 견장이 어깨에서 반짝였다.
“삼촌! 삼촌……!”
민수현이 이현석에게 한달음에 뛰어갔다.
그 모습은 마치 삼촌을 반기는 어린 조카 같았다.
“너, 내가 어디를 가도 통신 라인은 확보하라고 얘기를 했냐, 안 했냐?”
“그게…… 삼촌. 해방구 안쪽은 아예 모든 신호가 방해를 받아서 스마트폰이 먹통이 된 상태였어요.”
“그럼 연락이 가능한 지점까지 나오기라도 하던가!”
“나중에는 스마트폰을 잃어버렸어요…….”
“됐고. 일단 넌 저기로 가서 얌전히 있어라.”
이현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 둘이 민수현에게 인사했다.
아마 이현석을 호위하고, 더 나아가 민수현을 지키는 역할을 하는 경호원들일 것이다.
“감사해요! 감사해요, 오빠!”
민수현이 강후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멀어져갔다.
그녀를 다시 볼 일이 있을까?
지금 같아서는 없을 것 같지마는, 혹시 몰라 강후도 어색한 표정으로 손인사를 건넸다.
이현석의 조카니까, 어쩌면 볼 일이 잦아질 수도 있다. 아예 실력이 없는 헌터도 아니고.
그때.
단둘이 남은 자리에서 이현석이 강후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제 조카를 해방구에서 구해주셨다고요.”
“전세혁 님으로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사적으로 받아도 되는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혁이의 눈썰미를 저는 믿으니까, 어떤 분이든 녀석이 맡겼다면 저는 믿습니다.”
“그나저나 오는 길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강후가 온통 피투성이인 이현석의 군복을 보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군복 자체에 아예 붉게 물을 들여놓은 건가 싶어 그냥 지나쳤지만.
가까이서 보니 염색이 아닌, 신선한 피에 물든 흔적이었다.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가 났다.
“아, 이거 말입니까? 내부에 있던 배신자 하나를 막 처리하고 오는 참이라.”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문유석이 처리된 걸까?
그의 보안 메일 주소로 메일을 보냈던 적이 있으니, 인과 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놓고 그에게 문유석을 죽였냐고 물어보기에는 그림이 썩 좋지 않을 듯했다.
메일을 보낸 사람이 자신이라고 밝히면서 생색을 낼 그림도 딱히 아닌 듯했다.
어차피 민수현을 구출한 것만으로도 이미 생색을 낼 여지는 충분히 만들어 두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현석이 궁금증을 해결해 주었다.
“익명의 제보가 하나 들어왔었는데. 아주 가까운 곳에 배신자가 하나 있었더군요. 등잔 밑이 어두웠던 거죠.”
“원래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법입니다.”
능청스럽게 답하며 강후가 속으로 웃었다. 계획은 성공한 것 같다. 문유석이 죽었다.
아마 별다른 이슈가 없다면, 이현석이 한 달 안팎으로 허망하게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원작에서 탄탄대로를 걸었던 장시환의 행보도 지금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이현석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장시환과 정화 길드의 앞길을 막아설 테니까.
그가 다방면으로 ‘어그로’를 끌어준다면 강후로서는 운신할 폭이 훨씬 더 넓어진다.
아울러 자신에게 집중될 수 있는 이목도 일부 분산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이현석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큰 인물이다. 실제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기도 했고.
“우선 수현이를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요.”
“갖고 계신 생각이 있으시겠지요.”
강후가 덤덤하게 말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하는 이현석의 모습은 분명 진심이 담겨있었다.
“뒤늦게 파악한 상황을 들어 보니, 해방구에서 바로 여기로 움직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수현이를 구하러 가기 전부터 계획하셨던 루트인 겁니까?”
“네.”
“실로 믿기 힘든 공간 이동 능력입니다. 일본에서 공간 이동으로 유명한 호사카 켄지도 이 정도 거리는 어려울 겁니다.”
이현석의 말대로였다.
호사카 켄지.
일본의 마법계 헌터로, 공간 이동에 특화되어 있다.
그는 다양한 공간 이동과 위치 전환 스킬을 갖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장거리로 이동하는 스킬이 반경 10km 안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호사카 켄지는 공간 이동 계열의 능력자이자 권위자로 여겨졌다.
한데 강후는 그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의 거리를 단숨에 훌쩍 뛰어넘은 것이다.
물론 하루에 한 번이라는 제한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뭐, 각자 특화된 분야가 있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무장하신 상태를 보니, 암살계통이신 것 같은데. 참 흥미롭군요. 흥미로워…….”
산전수전 다 겪은 이현석이기에 강후가 어떤 스타일의 헌터인지는 첫 만남에 바로 알 수 있었다.
암살자다.
그것도 아주 날카롭게 다듬어져서, 스쳐 가기만 해도 목숨을 거둘 수 있는 실력자다.
이현석은 강후에게 느껴지는 아주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정제된 살기를 느끼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언제든 공수 전환을 할 수 있는 자세를 잡고 있다.
이현석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항상 전투를 염두에 두고 있는 강후의 준비성이.
이현석이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 얘기를 계속 놓치고 있었군요. 자, 감사를 어떻게 표현할지 말씀 나눠봅시다.”
강후는 처음부터 이현석에게 말할 내용을 생각해 두고 있었다.
현상금 즉, 민수현의 구출에 대한 대가로 책정된 금액은 50억 원이었다. 적지 않은 돈이다.
하지만 강후는 이번만큼은 돈에 관심이 없었다. 이현석이라는 사람 자체를 얻고 싶었다.
이현석의 성격을 안다.
그는 은혜를 몇 곱절 이상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고, 또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이를 활용해서 한몫 단단히 챙길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일회성이다. 한 번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그 돈만큼의 가치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치환한다면?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
“저는 좀 단순하게 생각하고 싶습니다만.”
“단순하다고 함은 역시 금액적인 부분이겠지요?”
이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돈이 걸려 있던 의뢰가 아니던가. 강후의 반응은 예상 범주 안이었다.
하나뿐인 조카이자, 유일한 혈육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다. 돈은 얼마라도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현석의 예상과 달리, 강후가 고개를 저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중에 차 한 잔 마실 시간만 내어주시죠. 티타임 한 번이면 만족합니다.”
“예?”
“돈은 필요 없단 얘깁니다.”
목숨값을 돈이 아닌 다른 것으로 받겠다는 강후의 대답.
읽을 수 없는 그의 속내에 이현석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