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김천 해방구 (3)
스킬북을 집어 들었다.
【스킬북 – 야만의 시대】
【특이 사항 : 광전사 전용】
【학습자의 마나 스탯이 50 미만인 경우,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 값이 50% 감소합니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왜 이 녀석이 헌터들의 외면을 받았는지 바로 알게 됐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광전사 계열의 헌터가 국내외를 통틀어도 그 비율이 매우 적다는 것.
둘째, 어느 정도 초심자 수준을 탈피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마나 스탯은 50을 넘어간다는 것.
광전사이면서, 낮은 수준의 마나 스탯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에는 유지력에 문제가 생긴다. 마나 총량이 적어 스킬 사용에 애를 먹을 테니.
애초에 조건을 만족시키기 힘든 전제를 두는 형태로 스킬북이 짜였으니 외면을 받을 수밖에.
‘나한테는 너무 좋은데?’
하지만 강후에게는 달랐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힘을 믿고, 지금까지는 마나 스탯에 전혀 투자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과거에도, 지금도, 강후의 마나 스탯은 20을 일정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언젠가 마나 스탯이 올라갈 일이 생길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고, 그렇다면 야만의 시대는 강후에게 정말 효율적인 스킬북이었다.
모든 스킬의 마나 사용량이 절반으로 깎이는데,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킬북을 판매하는 것으로 보이는 판매자에게 물었다.
귀에만 피어싱을 10개 이상으로 한 것이 심상찮아 보였지만, 보고 말 사람이니 신경 쓰진 않았다.
“이건 얼마입니까?”
“어서 오세요! 어떤 녀석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 이 스킬북 사시려고요?”
험상궂어 보이는 외모와 다르게 판매자는 친절한 목소리로 안내를 이어갔다.
역시 외모는 선입견인 모양.
세상 이렇게 호의적인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이런 구역에서 말이다.
“네. 관심이 있어서.”
“내용은 확인하신 거죠?”
“물론입니다.”
“20억 원으로 정가를 잡았습니다. 사실 30억 원 정도가 적정가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시작부터 약을 파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약을 먹고 지껄이는 수준의 내용이다.
이런 녀석들은 흥정의 대응에도 능하다. 애초에 그걸 고려해서 가격도 터무니없이 잡아놨다.
강후가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겠다는 듯, 바로 고개를 돌려 자리를 떠났다.
당장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걷고 또 걸었다.
여차해서 노림수가 안 먹힌다고 해도, 아쉬울 것 같지 않다는 나름의 자신감도 있었다.
그때.
투닥, 다다다닥!
다급히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급했는지, 중간에 발소리가 꼬이기까지 했다.
“저기, 저기 손님!”
“……?”
강후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판매자를 쳐다보자, 그의 낯빛도 자연스럽게 어두워졌다.
그의 가판대에 있는 아이템들이 유독 인기가 없다는 사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처치 곤란한 물품만 골라서 모아놓은 것처럼, 구성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에 관심을 보이는 구매자를 만나 들뜬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바가지를 써 줄 이유는 없었다. 동정이나 연민으로 호구가 될 이유는 없으니까.
“제가 다른 물품이랑 착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이거 정가가 15억…….”
또다시 외면.
아까보다 더 미련 없이 자리를 뜨자, 판매자가 체념한 듯 조정된 금액을 불렀다.
“10억입니다, 10억!”
많이 깎았다.
생각했던 적정가보다 살짝 높은 수준이기도 했다.
아무리 효율이 떨어지는 스킬북이라고 해도, 결국 스킬북은 스킬북이다.
그 이상으로 후려치면 이번에는 판매자가 단념할 가능성이 컸다. 손해 보는 느낌일 수 있다.
하지만 강후는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정말 입꼬리 한 번 떨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입술을 뗐다.
“5억.”
* * *
얼마 후.
“역시 해방구는 이래서 오는 맛이 있지.”
스킬북을 백팩에 잘 챙겨 넣은 강후가 흡족한 표정으로 길을 따라 걸었다.
뒤통수를 노려보는 시선이 왠지 느껴지는 듯도 했지만, 이미 거래가 끝난 마당이라 신경을 껐다.
생각보다 훨씬 더 싸게 샀다.
해방구는 일반적인 가격대가 아니라, 이 구역에서의 필요에 따라 가격이 요동치는 만큼.
지금처럼 기존 가격보다도 훨씬 싸게 살 가능성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아마 이 스킬북이 서울역에 있는 마켓에서 판매됐다면, 정가 10억 원이었을 것이다.
적당한 배짱과 입을 놀린 대가로 5억 원이나 아낀 셈이다. 수지맞은 거래가 됐다.
이렇게 된 이상.
발트만을 이용해서 꼼수로 학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대참수 스킬을 학습했던 방법 그대로.
온누리 길드와는 일전에 안면을 터 뒀으니, 다시 찾아가면 협상할 여지는 충분할 듯했다.
어차피 돈만 준다면야, 잠깐 던전의 공략 라이센스를 대여해 주는 것이 문제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여차하면 다음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편하게 협상할 여지는 있었다.
“음.”
강후가 어느덧 깊숙하게 들어온 해방구 주변의 면면을 살폈다.
시끌벅적하면서도, 그래도 밝은 느낌이 물씬 풍겼던 입구의 풍경과는 다르게.
지금 이곳은 해가 질 무렵의 석양에 물든 황색 배경과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세상이 황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어둠이 자리한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림.
전세혁에게 전달받은 정보에 따르면 민수현이 해방구에 온 것은 납치가 아닌 자의적 판단이었다.
왜 그런 ‘미친’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방향으로 이해해보려고 한다면, 호기심이라는 이유로 설명이 가능하기는 하다.
해방구는 분명 일반적인 세계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에 녹슬고, 피에 찌든 건물이 풍기는 묘한 악취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을 함께 자극한다.
시야를 가리는 그림자는 언제든 그 안에 잉태한 죽음, 시체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다.
어쩌면 그 두근거림이 궁금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죽음이 일상이 된 세상, 바로 해방구.
아마 민수현은 모종의 이유로 깊숙하게 들어왔다가, 일이 꼬여 나오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클 듯했다.
이를테면 중요한 물건을 훔쳤다거나, 해방구 중심의 비밀 시설에 접근했을 수도 있다.
해방구에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조직된 ‘관리체’는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통 해방구 중심에 위치한 마석 광산이나 핵심 던전의 이득을 독식하며 번영을 이룬다.
하필 그곳에서 건드려선 안 될 관리체의 역린을 건드려버리게 된 것일 수도.
짚이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원작에서 다수의 해방구가 에피소드의 배경으로 쓰인 적이 꽤 많은 만큼.
핫 플레이스가 될 만한 위치는 강후의 머릿속에 이미 있다.
하지만 그것만 믿고 무작정 들어가 보기에는 해방구라는 공간이 주는 불확실성이 너무 컸다.
일이 꼬이면 민수현을 구하기는커녕, 탈출을 긴급하게 고민해야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바로 그때.
“한 푼……. 도움을 주십쇼.”
방금까지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던 을씨년스러운 골목길에서 구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딘가 자리를 꿰차고 있던 거지가 누군가의 접근을 알아차리고는 구걸을 시작한 것일 터.
‘헌터네.’
거지인 척하고 있지만, 마나를 숨기지는 못했다. 거지 행세를 하고 있는 헌터인 것이다.
왜 위장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보기 좋게 꾸며놓은 그의 주변 자리를 보니, 여기에 자리를 튼 지는 오래된 듯했다.
거지의 앞에 접근해서는 속주머니에서 꺼낸 5만 원권 10장과 함께 말을 꺼냈다.
“혹시 길을 잃어서 방황하거나, 혹은 누군가의 추격을 받는 여자 헌터를 본 적이 있습니까?”
강후가 전세혁에게서 받은 민수현의 사진을 거지에게 보여 줬다.
눈코입은 모자이크 처리가 됐지만, 그녀의 특색인 분홍색 머리카락은 분명 인상적이었다.
흔하지 않은 색깔의 머리를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바로 알아보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기억이 날 것도 같은데.”
거지가 뜸을 들였다.
강후가 5만 원 권 10장을 한 번 더 내밀었다.
“이러면 좀 떠오르시나?”
“어딘가로 비틀대면서 가는 것을 본 적이 있어. 위치가 어디였더라…….”
이번에는 20장을 내밀었다.
거지가 바로 다음 말을 이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모텔이 하나 있기는 해. 그래도 좀 밝은 곳에 있어서 안전한 곳이지.”
“안내 좀 받읍시다.”
모텔이라고 뭉뚱그려 말한다면, 후보가 될만한 건물이 너무 많아 특정하기가 어렵다.
해방구 안에는 버려진 모텔 건물도 너무 많기에 거지의 말은 너무 포괄적이었다.
거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후가 지폐를 좀 더 내밀었다.
이왕 안내하는 거, 확실하게 안내를 하라는 나름의 성의 표시였지만…….
“내 기억이 확실하면 저쪽이 맞수다.”
거지가 안내한 방향은 안타깝게도 좋지 못했다.
정조준 스킬로 확대해 둔 시야에 길목의 끝이 들어왔고, 그 끝에서 핏자국이 일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 내가 너무 쉽게 가려고 했네. 이건 내 잘못이다. 직접 찾는 게 속이 편한 건데.’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받아들였다.
함정이다. 이 녀석들은 행인을 등쳐먹는 놈들이다. 아니, 등쳐먹으면 다행이고 죽이겠지.
강후가 자연스럽게 자신을 사지로 안내하고 있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며, 차분히 답했다.
“그래. 장소만 정확히 안내하면 보상을 크게 해 드리지. 정말 크게 말이야.”
* * *
그로부터 5분 후.
“자기 명줄대로 살지 못하는 놈은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강후는 백팩에 착실하게 챙겨 넣은 3억 원어치의 아이템을 확인하고는 현장을 떠났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템의 주인은 강후를 노리려고 했던 거지와 그 무리들이었다.
아마 이런 식으로 행인을 몰래 노리거나, 기습하는 방식으로 해 먹어왔던 듯했다.
성좌 계약도 없고, 실력도 미진한 헌터들이라 전부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헌터 목숨이 이렇게 파리목숨이어도 될까 싶지만.
힘의 논리가 가장 냉정하고 정확하게 펼쳐지는 곳이 헌터의 세계인 만큼 이상할 것은 없었다.
죽이기 전, 거지가 주절거린 바에 따르면 민수현을 본 적이 있는 것은 맞았다.
다만 방향이 강후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깊었다. 정말 중심지로 향했던 것이다.
해방구의 중심지는 가장 위험한 지역이기도 하다.
게다가 해방구 전체는 의도적으로 스마트폰을 활용할 수 없도록 기지국이 마비되어 있는 상태.
그래서 민수현이 중심지 어딘가에서 몸을 숨긴 채, 사실상 자의로 갇혀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스르륵.
강후의 모습이 사라졌다.
횡 이동을 활용해 연계하는 자연스러운 은신은 몸에 완벽히 익은 터라, 거침이 없었다.
중심지는 허락받은 존재가 아니면, 접근 자체만으로도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런 만큼, 강후도 최대한 기척과 모습을 숨기고 이동할 생각이었다.
일찌감치 준비해 온 복면의 착용도 마쳤다.
눈을 제외한 나머지를 착실하게 가려두면, 나중에 얼굴을 특정 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
아주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한 해방구의 중심지역 깊숙한 위치까지 들어왔을 무렵.
“저년! 저년 잡아!”
“드디어 찾았다!”
하늘의 도우심일까. 아니면 일이 제대로 꼬이려는 조짐일까?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한 오래된 빌딩 사이를 가르며 전력으로 도망치는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찾았다.’
핑크색 머리.
구출 대상, 민수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