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임밸런스 포인트 (2)
* * *
“경험치 버프 때문인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올랐다.”
강후가 훌쩍 수십 단계를 뛰어넘어버린 자신의 레벨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재 강후의 레벨은 85였다.
처음에는 70에서 75 사이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경험치가 더 많이 들어온 것이다.
물론 레벨이 낮으므로 경험치에 따른 상승폭이 높은 것도 있겠지만, 그래도 엄청난 급성장이었다.
아득해 보이던 레벨 100의 구간이 순식간에 가시권 안에 확 들어와 버렸다.
【황야의 전략가가 특이한 성장 루트를 알고 있는 당신의 지식에 특별함을 느낍니다.】
【정의의 사도가 이런 성장 방식은 비록 정석은 아니지만, 대단히 기쁜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장을 지켜본 성좌들이 관심을 보인다. 신기할 것이다. 남들과 다른 성장 방식을 알고 있으니.
【네가 이런 것을 알고 있다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겠지. 상당히 흥미롭구나.】
차원 강탈자도 말을 보탰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지식을 강후가 갖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사실 강후와 처음 계약을 했을 때부터 그에게서 특별함을 느껴 왔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태생의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많은 것을 꿰뚫어 보는 그녀지만, 강후의 빙의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 군데 더 찾아갈 거야.”
기억 속에 아직 네 군데의 임밸런스 포인트가 더 있다.
그중 두 군데는 위치를 어렴풋이 알고, 나머지 두 군데는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머릿속에서 구상만 해 뒀던 상태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는 얘기다.
기억이 있는 두 군데는 각각 제주도와 일본에 자리를 잡고 있는 포인트였다.
일본에 있는 임밸런스 포인트는 안영호를 만나러 가게 될 때, 한 묶음으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든든하네.”
강후가 폭발적인 레벨업을 통해 얻은 보너스 포인트를 전부 체력에 투자했다.
매번 한 번씩 클릭해서 올리던 스탯을 수십 번을 연달아 클릭하니, 그 나름의 쾌감이 있었다.
“후우.”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듯, 마나가 쭉 빨려 나간 느낌에 강후가 대충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나무숲만 울창할 뿐, 몬스터나 채굴의 거리가 될 만한 것이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멀리 시야를 확장해 봐도, 헌터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대전역을 한 번 가기는 해야겠네. 베니한테 얘기도 들은 마당에 하데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이후의 계획을 떠올렸다.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이 있다는 것을 안 이상, 클럽 하데스를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웠다.
입장보다 퇴장을 걱정해야 하는 던전이기는 하지만, 리스크를 감수할 만큼의 가치는 충분했다.
“마스터 케이(K)도 한 번 보러 가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전에도 몇 번 염두에 두었던 적이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마스터 케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솔라키움을 직접 키울 줄 알며, 많은 것을 연구한 헌터이다.
백발의 노인이고, 동시에 학자의 느낌도 가진 사람이다. 일종의 현자 포지션이랄까?
깨달은 바가 많은 인물이나, 자기 세력은 없다.
원작에서는 어떤 거대한 세력의 뒷배경인 것처럼 냄새만 풍겨뒀을 뿐, 그 이상의 내용은 없었다.
강후가 마스터 케이를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명확했다.
바로 선천성 마나 과민증 때문이다.
솔라키움에 대해 연구해온 그라면, 마나 과민증에 대한 해결법도 알지 않을까 싶어서다.
매드 솔라키움은 수급하기가 어렵고, 일반 솔라키움은 고통을 완벽하게 억제하지는 못한다.
결국은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한데, 마스터 케이에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신강후의 아이덴티티와도 같았던 이 병을 과연 해결할 수 있을까? 이게 없으면 신강후가 아니라는 표현까지 원작에 적었었지.’
떠오르는 원작의 내용에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독자들도 신강후를 보면, 항상 창백한 얼굴로 힘겹게 싸우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했었으니까.
하나의 상징과 같은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쉽게 해결될까 싶은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한다.
설령 결론을 불가능이라는 단어로 얻더라도, 해 보는 게 맞다.
해 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아예 확률이 0%니까.
일단 시도해 보면 확률은 다양하게 바뀐다.
“이제 슬슬 나가는 걱정을 해야겠네.”
라테우스 던전에서의 목적은 모두 달성했다.
자요석도 반세영 덕분에 안정적으로 잘 캤고, 임밸런스 포인트에서 ‘꿀’도 잘 빨았다.
남은 것은 입구에 진을 치고 있을 것이 분명한 칼바람 패거리를 어떻게 따돌리냐의 문제.
“뭐, 재껴야지.”
결론은 항상 간단하다.
막히면 뚫으면 되고, 방해가 되면 치우면 된다. 죽이려 하면 죽이면 되고.
* * *
돌아오는 길.
강후는 생각지도 않았던 루트에서 중간 보스의 흔적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이동로처럼 보이는 길이었는데, 특이한 발자국 하나가 있어서였다.
“데레일라가 여기에 있었네.”
발자국의 주인을 직접 보지 않고도, 강후는 그 이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데레일라.
암살자 계열의 인간형 몬스터로 ‘기교의 장막’이라는 특수 스킬을 가지고 있다.
보스 스킬이다.
기교의 장막을 펼치면, 그 안에서는 어떤 형태로든 은신 감지가 절대 안 되는 특징이 있다.
은신을 감지하는 능력보다 무조건 ‘상위’ 판정을 받기 때문에, 알아차릴 수 없다.
절대 은신 감지 능력 판정이 있어도, 이를 무시하고 감지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데레일라는 특정한 던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하게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형태로 있다.
그래서 데레일라를 만난 헌터들에게는 정말 재수가 없다는 수식어가 꼭 붙고는 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녀석을 낮은 확률로 마주친 것이니까. 이득을 볼 부분이 전혀 없어서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스킬 강탈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 오히려 넝쿨째 굴러들어 온 복이었다.
물론 이 복은 데레일라를 죽여야만 복이 된다. 반대로 당해버리면 독이 되는 셈이다.
“못 참지, 이건.”
데레일라는 무조건 잡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쉽지는 않다.
하지만 라테우스 던전의 데레일라는 조심성이 떨어지는 듯, 발자국이라는 흔적을 남겼다.
영민하고 똑똑한 녀석이었으면 애초에 발자국이 남을 지형을 통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으윽.
횡 이동을 활용해 은신 상태에 돌입한 강후가 은밀하게 발자국을 쫓기 시작했다.
기척을 숨기기 위해 추가로 시전한 무영은 덤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쫓는, 보이지 않는 자의 발걸음이 시작됐다.
* * *
그로부터 2시간 후.
라테우스 던전의 출입구 근처의 언덕가에 자리를 잡은 두 남녀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의 정체는 전세혁과 반세영.
강후가 앞서 만났던 두 인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서로 사촌지간인 관계였다.
각자 볼 일을 마친 두 사람은 앞서 약속한 장소에서 만나고 있던 중이었다.
“세영아. 그 정도만 하고, 어지간해서는 내가 필요하면 날 찾아. 혼자 고생하지 말고.”
“오빠, 그렇게 도움받아 버릇하면 성장을 못 해. 난 반쪽짜리 헌터가 되는 건 싫어.”
“지금도 충분히 반쪽짜리 아니냐?”
“에잇, 오빠! 그러니까 반쪽짜리 헌터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한다는 얘기잖아!”
“하하하. 근데 예전부터 권했지만, 서브 무기 하나는 다룰 줄 아는 게 좋을 거다.”
“……안 그래도 고민 중이야.”
“서브 무기를 조금만 다룰 줄 알았어도, 아까 네가 말한 상황에서 도움받을 이유가 없었겠지.”
“오랜만에 실력 좋은 헌터를 만난 것 같아. 정선규…….”
“정선규라.”
전세혁이 웃었다.
반세영에게 들은 설명과 강후를 만난 지점을 교차 체크해서, 이미 앞뒤 상황은 파악한 후였다.
사촌 동생 반세영이 만난 사람은 강후였다. 정선규라고 소개한 이름은 가명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이클립스 내부 정보를 가진 전세혁이기에 강후의 본명을 파악하고 있을 뿐이다.
굳이 반세영에게 강후의 본명을 알려주고 싶진 않았다. 가명을 쓰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에.
“오빠도 만났다 그랬나?”
“응. 오는 길에 만났지.”
서로 이름은 다르게 알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을 얘기하고 있는 상황.
전세혁이 강후가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를 떠올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반세영이 강후에게 준 후한 평가는 절대 과장된 것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였다.
신강후.
전세혁도 오랜만에 직접적인 관심을 갖게 된 헌터였다.
좀 더 알고 싶기에 던전에서 볼 일을 마친 이후에 한 번 더 보자고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
“죽여! 저 자식이다!”
“우리 동료들을 죽인 놈이다!”
“족쳐!”
아까 전부터 던전 출입구 주변을 지키고 있던 헌터들이 우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바람’ 무리였다.
라테우스 던전에 거점을 둔 조직으로 패거리라고 하기에는 제법 규모가 되는 조직이기도 했다.
“어? 선규 오빠인데?”
“볼거리가 생겼구만?”
둘이 동시에 강후를 알아봤다.
잘 됐지 싶었다.
칼바람 무리의 수는 보이는 것만 파악해도 최소 스무 명. 반면에 강후는 혼자다.
수적 열세의 전투일수록 수세에 있는 헌터는 더 많은 변수 창출과 다양한 레퍼토리가 강제된다.
강후의 입장에서야 힘들겠지만,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아주 재밌는 볼거리가 생긴 셈이다.
“말은 바로 하자.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너희 동료들이었어. 내가 먼저 나선 게 아니고.”
“좆 까고, 그냥 뒈져!”
강후의 절제된 대화가 무색하게 칼바람 무리는 저마다 무기를 꼬나쥔 채, 강후에게 달려들었다.
애초에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을 예상한 듯, 강후의 대응도 즉각적이면서 빨랐다.
전세혁이 눈에 힘을 잔뜩 줬다.
강후라면 눈을 깜박이는 순간에도 다른 스킬을 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으어?”
그때, 최전방에서 강후에게 달려들던 헌터 하나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정신 교란 스킬이 있네.”
전세혁이 곧바로 본질을 파악했다.
강후의 얕은 혼돈 스킬에 당한 헌터가 방향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스킬 이름을 파악할 순 없었지만, 발현 기전을 알아차리는 것은 전세혁에게 어렵지 않았다.
“암살자가 정신 교란 스킬을?”
“클래스를 전제 조건으로 놓고, 정선규를 판단하려고 하면 복잡할 거야. 있는 그대로를 봐봐.”
전세혁은 그가 한 말대로 강후를 어떤 직업군으로 단정 짓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재다능이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스킬을 봐도 놀랄 이유가 없었다.
그때.
“하아앗!”
방향을 잃고 헤매던 헌터가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동료를 향해서 훌쩍 몸을 날렸다.
도약에 진심인 자세와 잔뜩 힘이 들어간 무기 상태를 보니, 착각이 아닌 확신이 분명했다.
“환각이군.”
환각 증세다.
아마 환각에 걸린 헌터는 지금의 공격 대상이 동료가 아닌 강후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저렇게 자신 있게 몸을 날리는 거겠지.
그리고 결국.
푸화아악!
“커억! 이, 이 새끼…….”
팀킬이 일어났다.
전투 시작과 동시에 상황이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뭐, 뭐야, 이거…….”
“환각 스킬이 있는 건가?”
절대다수인 칼바람 무리의 얼굴에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압도적인 수적 우위가 분명한 상황이지만, 뭔가 상황이 잘못 흘러가는 것 같았다.
너무 평온해 보이는 강후의 표정에서 극도의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