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성좌 시험 (4)
* * *
바로 두 번째 성좌 시험이 이어졌다.
어차피 할 거면 하루라도 더 빨리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강후는 피하지 않았다.
2차 시험이 바로 진행되어서인지, 지켜보는 성좌의 수가 전보다 50%는 더 늘어났다.
‘판이 제대로 커졌군.’
지켜보는 성좌는 당연히 많을수록 좋다.
그중에 한둘만 건져내도 무조건 이득이니까.
【괴수 ‘디나토’를 제거하시오.】
“음?”
앞서 도전했던 첫 번째 성좌 시험과 달리, 두 번째 성좌 시험은 안내 문구가 너무 단순했다.
도대체 괴수 디나토라는 녀석이 어떤 녀석이기에 이렇게 메시지가 간략해진 것일까?
그 순간, 강후는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생겨나는 오색영롱한 실루엣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앞서 상대했던 플라젤룸 같은 인간형이 아니었다.
아파트 15층 크기는 족히 넘어가는 초대형 괴수였다.
“…….”
강후의 입꼬리가 말렸다.
차원 강탈자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션을 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런 변수를 만들 줄이야.
초대형 괴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강후가 해왔던 전투와는 궤를 완전히 달리 하는 것이었다.
특히 암살계는 초근접의 전투가 필수인데, 몸집이 큰 녀석일수록 접근이 매우 부담스럽다.
재수 없으면 깔려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압사(壓死)라는 말이 생소하지 않게 된다.
‘심판의 지옥 공략 건을 생각하면, 한 번쯤은 필요한 연습이기도 하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가까운 시기에 정화 길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대형 이슈가 있다.
바로 심판의 지옥 공략.
참여 인원만 무려 1천 명인 대규모 레이드로 유일하게 외부에서 용병을 구한다.
초대형 던전이라는 콘셉트에 맞게 미들 보스도 정말 많고, 내부 비밀 지형도 많은 곳.
그곳에 가면 디나토 같은 녀석은 밥 먹듯이 나온다. 미리 체험해둬서 나쁠 건 없다.
물론 이게 단순히 연습이 아니라, 목숨을 건 성좌 시험의 장이라는 것이 유일한 문제이지만.
【계약자인 내게서 지급될 네 번째 특혜는 이번 시험까지 완료되어야 연동될 것이다.】
“일부러 화나게 하려는 건가?”
【후후. 당황하지는 말라는 뜻이다. 선지급을 해 줄 수는 없는 부분이라서 말이다.】
“짓궂네, 참.”
강후가 혈루를 역수로 움켜쥐었다. 이런 괴수를 상대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쓸데없는 탐색전을 피하고, 무조건 머리를 노리고서 녀석의 몸을 ‘등반’하는 것이다.
백날 두꺼운 발목이나 허벅지, 몸통 따위에 단검을 박아 넣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인간형이면 치명상이 될 타격이 괴수에게는 가벼운 생채기 정도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메인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머리를 노려야만 한다.
제아무리 강철 같은 피부를 가진 괴수라고 해도, 머릿속에 든 뇌까지 단단한 것은 아니니까.
카득!
매드 솔라키움을 씹었다.
남은 물량은 3개.
그라운드 제로에서 구해 온 여섯 개 중에서 벌써 절반을 먹었다.
구하기는 어려운 데, 쓰는 것은 이렇게 헤플 수가 없는 녀석이다.
하지만 매드 솔라키움의 효과가 일반 솔라키움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확실한 만큼.
강후는 전략적으로 보유한 이점을 누리기로 했다.
이럴 때 쓰려고 매드 솔라키움을 구한 것이기도 하고.
구오오오!
강후를 발견한 디나토가 집채만 한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다 가려질 것 같을 정도로 넓고 묵직한 발이기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반격? 말도 안 되는 선택지다.
무조건 피해야 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자동차를 막거나 받아칠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디나토의 발이 딱 그랬다.
푸욱!
후방으로 도약하면서 거리를 벌렸다가, 전방으로 몸을 다시 날린 강후가 첫 번째 자리를 잡았다.
디나토의 종아리 부분에 단검을 꽂아 넣은 것이다.
지금부터는 마치 암벽을 등반하는 것처럼 디나토의 몸을 차근차근 오를 필요가 있었다.
문제는 녀석이 바보가 아니라는 것.
귀찮은 위치에 자리 잡은 강후의 모습을 확인한 디나토가 먼저 반대쪽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려운 부분을 긁어내려 하듯이 반대쪽 발가락으로 강후를 걷어내고자 했다.
“젠장.”
강후가 디나토의 종아리에 꽂았던 단검을 회수하고, 몸을 사선으로 미끄러지듯 옮겼다.
무리해서 올라가기보다는 전략적으로 후퇴를 할 요량에서였다.
【성좌 ‘황야의 전략가’가 당신의 신중한 회피 결정에 고개를 끄덕입니다.】
【일부 성좌가 당신의 전략적 판단 능력이 상당히 빠르고 우수하다는 평가를 연이어 내립니다.】
딱히 대단한 퍼포먼스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성좌들의 반응이 좋았다.
‘어차피 시간에 쫓길 이유도 없는데.’
문득 든 생각에 강후가 성좌 시험을 대하는 발상의 방향을 바꾸었다.
디나토를 죽이기까지의 과정에서 큰 위기를 겪지 않을 자신이 충분히 있다면.
적당한 연출을 섞어가면서 녀석을 상대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수많은 성좌 앞에서 이렇게 자신의 모든 모습을 보일 기회는 정말 흔치 않다.
아니, 성좌 시험 때만 주어지는 특별한 상황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렇지 않을 때는 대부분의 성좌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만을 살핀다.
세상에 헌터가 한둘도 아니고, 강후에게 모든 성좌의 관심이 쏠릴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좀 더 극적인 장치와 연출을 추가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칫 실수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성좌 시험이지만, 그래서인지 더욱 생각이 과감해졌다.
‘그래. 분명히 미쳤어.’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매드 솔라키움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마음이 너무 진정된 나머지, 이제는 겁을 상실한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닐까 하는 재밌는 상상.
어차피 올라가야 할 경로는 명확해진 만큼, 디나토의 견제만 잘 피할 수 있으면 될 듯했다.
그리고 반대쪽 발을 이용한 첫 번째 견제는 강후가 예상했던 것보다는 느렸다.
푸욱!
다시 디나토의 몸에 혈루를 꽂아 넣고.
“후우.”
심호흡을 한 뒤.
다시 녀석의 몸을 오르기 시작했다.
2보 전진, 1보 후퇴.
녀석의 머리까지 올라가기 위해 절대 잊어선 안 될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 * *
중간중간.
디나토의 몸을 오르는 과정에서 등장했던 뜻밖의 변수에도 강후는 능숙하게 대응했다.
이를테면 디나토의 사타구니 주변을 지날 때,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던 기생체가 있었다.
괴수의 몸에 붙어사는 작은 몬스터 같은 것이었는데, 사람 크기만 한 지네였다.
물론 전광비도 같은 원거리 일격 스킬이 있기에 대응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일반적인 암살계라면 불가능했을 원거리 대응.
하지만 강후에게는 충분히 활용 가능한 선택지였기에 굳이 무리한 접근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강후는 이런 식으로 변수를 신속하게 차단하고.
때로는 의도적으로 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뜸’을 들였다가 대응을 하면서.
자신을 지켜보는 성좌들의 관심과 긴장을 빠르게 고조시켰다.
어차피 대다수의 성좌가 지켜보면서 후원의 개념으로 제공하는 것은 극히 미량의 성력이었다.
그들에게는 푼돈 개념으로 성력을 후원하는 것이었지만, 수령하는 강후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일종의 ‘짜투리 후원’을 모으고 모으다 보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버프가 만들어진 것이다.
2차 시험에서 후원으로 얻은 경험치 보너스만 무려 55%에 달했다.
경험치 보너스는 당장의 순간만 보면 체감이 크게 되지 않는다.
하지만 충분한 시간이 흘러서 누적이 되고 나면,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를 체감하게 된다.
경험치 버프가 전혀 없는 헌터와 100%의 버프를 가진 헌터는 성장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1, 2일 단위로 본다면 극히 작은 격차지만, 1, 2년 단위로 보면 말도 안 되는 차이가 나게 된다.
‘계속 후원하라고. 어차피 잔돈 모아서 어디다 쓸 건데?’
자신감이 확실하게 붙은 강후가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이며, 디나토의 몸을 계속 올랐다.
위기에 빠진 척 일부러 떨어져 보기도 하고, 아슬아슬하게 디나토의 공격을 피하기도 했다.
모든 상황이 간발의 차이인 것처럼 보였지만, 강후는 그 안에서 충분한 여유를 누렸다.
【성좌 ‘황야의 전략가’가 성력을 초대량으로 소모하여 상당량의 버프를 후원합니다.】
【경험치 증가 +15%】
‘좋아.’
그리고 쉴 새 없이 쌓여가는 경험치 버프를 보면서, 더할 나위 없는 흡족함을 느꼈다.
황야의 전략가처럼 작정하고 후원을 시작한 성좌는 아예 묵직한 버프를 선물로 내어놓았다.
그렇게 차곡차곡 누적으로 쌓인 총 경험치 보너스가 +150%를 가리키고 있었다.
보너스가 없는 헌터가 같은 몬스터를 잡고 10의 경험치를 얻을 때.
강후는 무려 25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독식에 특화된 강후로서는 150%,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 버프 수치였다.
그 사이.
쿠후. 쿠후. 쿠후.
강후는 어느덧 디나토의 목젖이 있는 위치까지 도착해 있었다.
후웅! 후웅!
두 개의 손이 강후를 노리고 날아들었지만, 횡 이동으로 어렵지 않게 후방 회피를 성공시켰다.
‘딱 이 녀석 정도 콘셉트를 가진 괴수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름의 견적도 세워졌다.
빠른 기동 구조를 가지지 않은 괴수라면, 얼마든지 자신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움직임이나 대응 수준이 2할 정도만 더 향상되어도 꽤 까다로울 듯했다.
이 모든 것이 강후가 가진 가속 스킬 덕분이었다.
필요에 따라, 신체를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붙이면서 최대 속도를 낼 수 있어서다.
아마 가속이 없었다면, 진즉에 무장해제가 되었을 것이라고 강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그때.
파아앗!
목젖 언저리에서 힘차게 도약에 돌입한 강후의 몸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디나토의 콧구멍 속으로 망설임 없이 그대로 몸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디나토에게는 완벽한 지옥이 시작됐다.
한없이 더러운 공간이지만, 그래서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는 약점.
강후는 디나토의 콧속을 사정없이 가르고, 안구를 찢어냈으며.
더 나아가 모든 신경을 끊어버리고, 두부만큼 연하기 그지없는 뇌를 후벼 파 버렸다.
아무리 초대형 괴수라고 한들, 머릿속이 완전히 헤집어진 상황에서 버텨낼 재간은 없었다.
꾸어어어…….
그렇게 시종일관 성좌들의 후원을 위한 강후의 ‘놀잇감’이 되어버린 디나토의 숨이 끊어졌다.
괴수에게 고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차원 강탈자의 예상과 달리.
강후는 자신이 가진 수많은 스킬의 조합을 활용해서, 오히려 너무 쉽게 괴물을 극복해 버렸다.
【제법이구나.】
차원 강탈자의 짧고 강렬한 메시지가 전해졌다.
별것 아닌 표현 같아도, 그녀에게는 상당한 칭찬이자 인정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았다.
“이 정도쯤이야.”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시험에서 낙오할 것 같았으면, 애초에 도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은 있었다.
단지 100%의 확신만 없었을 뿐이다. 99.9%의 확신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는 거니까.
【사전에 예비 시험을 해 보았을 때, 이 시험의 생존율은 15%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구나.】
이어 들려온 차원 강탈자의 말을 듣는 순간.
“……?”
강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십중팔구 죽는 것으로 계산된 시험을 자신에게 줬단 말인가?
전부터 짓궂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독할 줄은 몰랐다.
저 말이 농담은 아닐 텐데.
차원 강탈자.
설마…… 날 죽일 생각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