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성좌 시험 (2)
* * *
이예린과 헤어지기 전.
강후는 박민성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요청했다.
박민성은 그라운드 제로에 갔을 때, 단검 ‘학살의 경계’를 얻을 수 있었던 시신의 주인이었다.
이 정도 되는 단검을 들고 다녔을 정도였기에 실력이 제법 되는 헌터로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헌터 라이센스나 스마트폰, 신분증 같은 유품을 챙겨두고 시신의 위치를 기억했었다.
헌터 공식 커뮤니티에서 가족 또는 지인들이 찾고 있는 실종자일 수도 있으니까.
범죄자에 현상금이 걸리듯, 실종자도 사례금이 있기에 한 번 짚어보는 중이었다.
이예린에게 착수금을 넉넉하게 주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그간 강후가 의뢰를 시원시원하게 잘 처리해 온 것이 있으니, 이번 일은 무상으로 해 주겠다는 것.
그랬다. 호의였다.
굳이 호의까지 거절하고 싶진 않았기에 강후는 기쁘게 그녀의 제안을 받았다.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직접 준 호의이니 나중에 갚으려 할 필요도 없을 터다.
성좌 시험 도전에 앞서.
강후는 기분 전환이나 할 요량으로 평택역 인근에 위치한 모던 바로 향했다.
이왕이면 가장 마음을 안정시킨 상태에서 성좌 시험을 치르고 싶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즐겨 마시는 칵테일, 솔라키움 버스트에 딱히 안정, 진정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바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성과 음악은 늘 생각을 환기시켜 주는 부분이 있었다.
일종의 루틴 같은 것이었는데, 고집이 크게 없는 강후가 절대 포기하지 않는 부분 중 하나였다.
바로 향하는 길.
그래도 다른 지역에 비해 꽤 안정적인 평택역 인근은 전반적으로 문제없이 잘 관리되고 있었다.
보통 으슥한 골목에만 접어들어도 핏자국이나 쓰러진 사람을 보는 일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우범지대가 될 법한 곳에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태우고 속닥거리는 헌터들이 있기는 했지만, 시비를 걸지는 않았다.
‘성좌 시험 자체는 어차피 도전하는 헌터의 레벨에 맞춰서 설정되니까, 레벨이 중요하진 않지.’
레벨 부담은 없었다.
만약 성좌 시험이 특정 레벨에 맞춰서 설정되어 있었다면, 모두 레벨을 높여 도전했을 것이다.
그러면 성장을 충분히 한 헌터에게는 부담 없는 시험이 됐겠지.
하지만 맞춤형이다 보니, 언제 도전해도 체감하는 난이도는 항상 같았다.
진짜 어려웠다.
괜히 성좌들이 ‘불량 계약자’와의 계약을 없애려고, 낚시성으로 성좌 시험을 제안하는 게 아니다.
생존율 50%라는 데이터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자신과 계약한 성좌와 더욱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헌터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는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결국 성장은 멈출 수밖에. 필수불가결이랄까.’
지금에 만족하지 않으려면, 계약한 메인 성좌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끈끈해져야 한다.
시험을 통과하고 개방할 수 있는 성좌의 네 번째 특전?
그 역시도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차원 강탈자 같이 격이 높은 성좌는 제공할 수 있는 특전의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다.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들어온 바의 테이블.
조금은 구석진 곳이지만, 유독 조명이 예쁜 자리 위에 강후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자 스모키 메이크업이 인상적인 바텐더가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어떤 걸로 드릴까요?”
“솔라키움 버스트 한 잔.”
“어?”
“음?”
그때, 강후와 바텐더의 시선이 마주친 채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익숙함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그 이유를 찾았다.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강후였다.
“베니?”
“클럽 하데스! 마지막 손님!”
“신기하군.”
“와! 그날 무사하셨어요?”
“덕분에.”
클럽 하데스에서 대규모 납치 사건이 일어났던 그 날.
강후에게 마지막으로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 클럽에서 도망쳤던 바텐더 베니였다.
혼자서 어떻게 됐을까 어렴풋이 걱정은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잘 탈출했던 모양이었다.
“우연치고는 너무 신기한데요?”
“인연이라는 게 그렇지.”
“와……. 첫 잔은 제가 살게요! 그날 만들다 만 솔라키움 버스트를 드린 것 같아서, 늘 마음에 걸렸거든요!”
“칵테일은 잘 만들어졌어. 근데 잔이 깨져서 맛을 보진 못했군.”
“아, 정말요?”
“재수가 더럽게 없었지.”
강후가 당시에 어디선가 날아온 재떨이에 산산조각이 났던 칵테일 잔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어지간해서는 벌어질 수 없는 우연이 겹치면서, 보기 좋게 칵테일 잔이 깨져 버렸었다.
기분이 얼마나 나빴던지.
지금도 방금의 일처럼 선명하게 기억이 떠올랐다.
강후가 말을 이었다.
“선물은 사양하지 않지. 대신에 이것은 별도로 팁.”
강후가 솔라키움 버스트 한 잔의 가격만큼을 그녀에게 팁으로 건넸다.
늘 바텐더에게 적당한 팁을 주고, 이런저런 정보를 듣는 과정이 습관이 된 탓이다.
클럽 같은 곳이 아니면, 이런 팁과 정보 공유 문화는 사실 없는 쪽에 가깝지만…….
워낙 음지 생활이 익숙한 강후이다 보니, 그 세계의 질서와 암묵적인 룰도 익숙했다.
“호호. 사양하진 않을게요.”
“건강해 보이니 좋네.”
“그러게요. 운이 정말 많이 좋았어요. 참, 그나저나 그때 말씀드렸던 곳은 가 보셨어요?”
베니가 운을 뗀 ‘그곳’은 바로 클럽 하데스의 지하 7층에 위치한 던전이었다.
그때, 기억에 담아두긴 했지만 딱히 갈 일이 없을 것 같아서 희미해지고 있던 기억이었다.
애초에 클럽 하데스 자체가 이클립스의 소유이다 보니, 접근 가능성이 제로에 가까운 탓이다.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갈 정도일까 싶었다.
그런데 베니가 다시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면,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있는 모양.
“아니. 클럽 하데스에 딱히 연고가 없어서 말이야. 접근이 쉽지는 않겠더군. 뭔가 있나?”
“네. 지하 7층에 있는 던전. 있는 건 맞는데, 들어간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해요.”
“왜지? 그 정도면 눈에 불을 밝히고 달려드는 헌터가 한둘이 아닐 텐데.”
은밀한 위치에 있는 던전은 헌터로 하여금 없던 호기심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이클립스 소유의 클럽이니, 당연히 이클립스에서 헌터를 보내볼 수 있었을 텐데.
이유가 있는 걸까?
“아예 입장이 안 되는 모양이에요. 레벨 제한도 아니고, 인원 제한도 아닌데.”
“들어본 썰이 좀 있나?”
“들어가려다가 실패한 헌터 두 분의 대화를 슬쩍 들은 적이 있는데. 마나 문제 같았대요.”
“아.”
그제야 예상이 됐다.
엄청난 양의 마나를 입장료로서 지불해야 하는 던전인 모양이다.
공식 표현으로는 리미트리스 마나(Limitless Mana) 던전으로 불린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입장하려는 헌터가 대량의 마나를 불어넣어 줘야 문이 열리는 구조인 것이다.
그만큼의 마나를 감당할 수가 없거나, 공급할 수 없는 헌터라면 절대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마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로는 불가능해서, 반드시 헌터의 마나가 필요했다.
‘무의식의 구현이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원작에서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던전 콘셉트 중의 하나였는데, 이것이 제대로 구현된 것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간 모양이에요. 대장도 들어가지 못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흥미로운 얘기였다.
대장이라면 강동현을 얘기하는 것일 텐데, 그도 못 들어갔을 정도라면…….
마나를 최소 500 이상은 요구하는 던전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가능할 것 같은데.’
강후의 눈빛이 빛났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으로 인한 고통만 케어할 수 있으면, 자신은 입장료의 지불이 가능하다.
시간만 벌 수 있으면, 얼마든지 무한대에 가깝게 마나를 끌어들여 공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나 스탯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마나를 계속 불어넣을 수 있느냐의 문제지.
마나 과민증의 발동으로 사실상 마나의 무한 수급이 가능한 강후에게는 꽤 쉬운 일이었다.
‘기회다.’
느낌이 왔다.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상태의 던전이면, 일단 입장만 하면 추격을 받을 염려는 없을 터.
물론 이클립스 관할 아래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일단 던전에 들어가기만 하면, 안에서는 누군가의 방해를 받을 염려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리미트리스 마나 던전이라면, 전반적으로 보상이 매우 좋을 수밖에 없다.
입장이 제한되다 보니, 내부 공략이 극히 적게 이루어져 전반적으로 보상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괜히 최상위 헌터들이 숨은 던전이나, 남들이 모르는 던전을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첫 공략, 혹은 오랜만의 공략은 그만큼 높은 보상과 경험치를 지급하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좋은 정보네.”
강후가 5만 원권 열 장을 더 내밀었다. 추가 팁이다.
“어머. 이게 그 정도로 팁을 받을 만큼의 정보가 되나요?”
베니가 배시시 웃으면서도 잽싸게 팁을 챙겼다. 변덕스러운 손님의 마음은 언제 바뀔지 모르니까.
강후가 웃으며 답했다.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다르지.”
* * *
다음 날 아침.
성좌 시험을 시작했다.
기분 좋게 푹 자고 난 이후라서 그런지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상태였다.
【네 품격을 증명할 수 있기를 기원하겠다.】
시작과 동시에 차원 강탈자는 강후에게 절제된, 하지만 기대가 잔뜩 담긴 메시지를 보냈다.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사실은 격한 응원에 가깝다.
꼭 성공하라는 뜻이다.
‘수많은 성좌 앞에 서는 첫 데뷔 무대군.’
강후가 거대한 무대 한가운데에 있는 듯한 어색한 느낌에 뒷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주변은 사방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가득해서 어딘가에 온전히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그 빛은 성좌를 상징한다.
즉, 강후가 있는 이곳은 이를테면 잠실 주경기장의 무대 한가운데 같았다.
여기를 수많은 관객 즉, 성좌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쇼케이스인 셈이다.
성좌 시험은 시청 참여를 원하는 모든 성좌가 지켜볼 수 있다.
일종의 공개 시험과 같다.
그래서 이 안에서는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공유된다.
【성좌 ‘기동전의 대가’가 당신의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격한 응원을 보냅니다.】
【성좌 ‘정의의 사도’는 당신의 비범함을 믿습니다. 자신이 서브 후원자임을 당당히 자랑합니다.】
【성좌 ‘혼돈의 싸움꾼’이 재수 없는 계약자지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다고 인정합니다.】
많은 성좌가 지켜보는 탓인지.
강후와 인연을 맺거나, 성좌 강탈로 계약이 예속된 성좌들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냈다.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강후의 실력이 상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말들이었다.
그 덕분일까?
지금도 충분히 눈부신 빛줄기가 훨씬 밝아졌다.
성좌의 시청이 더 늘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후.”
어지간해서는 긴장하지 않는 강후도 숨을 깊게 토해내면서 몸을 다시 한번 풀었다.
지금 성좌들의 눈에 확실히 자신을 각인시켜두면, 앞으로 이득을 볼 일이 많아질 것이다.
중요한 순간이다.
그리고.
【차원 강탈자가 시험을 위해 검은 사념체, ‘플라젤룸’을 소환했습니다.】
성좌 시험의 시작을 알리는 대상이 무대에 소환되며, 동시에 무대 밖의 어딘가를 가리키는 화살표가 활성화됐다.
【붉은 점이 위치한 곳까지 전력으로 달리십시오.】
【도착 전까지 당신은 플라젤룸을 죽일 수 없으며, 그의 채찍은 당신의 영혼을 분쇄할 것입니다.】
“도망자와 추격자.”
콘셉트가 확실한 시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