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성좌 시험 (1)
【성좌 ‘기동전의 대가’가 화려했던 당신의 전투를 떠올리며 연신 박수를 칩니다.】
【성좌 ‘정의의 사도’는 권선징악의 뜻을 실현하는 당신을 끝없이 응원하고 있습니다.】
【성좌 ‘교묘한 아첨꾼’이 새로이 바뀐 자신의 계약자가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인정합니다.】
차원 강탈자의 제안과 더불어, 다른 성좌들도 강후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보냈다.
기동전의 대가와 정의의 사도는 꾸준히 후원을 해 오고 있는 성좌들이었다.
다만 아직 계약을 맺지는 못해서 아쉬운 점이 있기는 했다.
후원과 계약은 아주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차원 강탈자라는 대단한 성좌가 메인 성좌로 자리하고 있다 보니, 진입 장벽이 큰 모양.
이왕이면 계약자를 온전히 모두 갖고 싶은 성좌의 욕심이라 할 수 있겠다.
“하루만 좀 쉬죠.”
강후가 휴식을 요청했다.
지금 성좌 시험에 도전했다가는 녹초가 된 몸으로 시작과 동시에 탈락할 가능성이 높다.
시험에서의 탈락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죽음이다. 무리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얼마든지.】
차원 강탈자도 강후를 서두르게 만들지 않았다.
자신의 계약자가 최상의 컨디션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녀는 진심으로 강후를 아끼고 있었다.
분명 강후는 장래성과 잠재력이 최상인 계약자였다.
절대 다른 성좌에게 빼앗기거나 놓치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자신의 계약자여야만 한다.
그렇게 성좌의 시험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보통 헌터들이 레벨 150을 전후해서 성좌 시험을 치르게 된다는 통계로 미루어 본다면.
강후는 한참 일찍 시험을 치르게 된 셈이다.
겨우 레벨 51에서 말이다.
그 말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만큼 차원 강탈자가 강후를 높이 평가한다는 뜻도 됐다.
성좌는 절대 충동적으로 시험을 제안하지 않는다. 지금의 실력이면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 * *
이후.
평택역으로 안전하게 올라온 강후가 안전 호텔 하나를 잡고 하루를 푹 쉬었다.
해가 뜬 아침에 입실했지만, 암막 커튼으로 처리된 방에 입장하니 밤처럼 깜깜했다.
침대에 드러누운 강후는 차소희와의 전투를 가장 먼저 복기했다.
“확실히 쉽지 않았어.”
감각적으로 빈틈을 찾아냈기에 조기에 승부수를 던질 수 있었던 전투였다.
만약 차소희가 조금만 더 신중하고 정교했더라면, 전투는 훨씬 더 길어졌을 것이다.
화염이 정말 큰 부담이었다.
속성 화력을 극대화시킨 상태라서 여러모로 껄끄러웠다.
직격을 한 번도 안 당했기에 상처가 없었지, 조금만 스쳤어도 어디든 녹아 없어졌을 터다.
그 작은 불비 몇 방울 맞은 것만으로 어깨에 흉터가 생긴 것을 보면 더더욱 섬뜩했다.
“차소희가 이 정도면 강동현 같은 놈은 얼마나 더 힘들지 계산하기도 싫군.”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눈높이를 대폭 낮추면, 강후는 두려울 것이 없는 헌터였다.
압도적으로 강한 상태니까.
하지만 끊임없이 위를 올려다보는 강후에게는 절대 만족할 수 있는 구간이 없었다.
차소희를 꺾으니, 바로 강동현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며 목표가 상향 조정됐기 때문이다.
훗날 강동현을 잡을 날이 있다면, 그때는 또 목표가 채관형이나 장시환으로 조정될 것이다.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이 치열한 경쟁심과 목표 의식이 절대 사라질 리 없다.
“메일은 봤나?”
강후가 메일 앱을 확인했다.
너무 이른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그래도 혹시 하는 기대가 있었다.
“읽었잖아?”
수신 확인 내역을 보니 읽음으로 되어 있었다. 심지어 답신도 와 있었다.
[누구냐.]
짧은 답신이지만, 강후는 긍정적인 내용으로 판단했다.
만약 이현석이 메일을 허무맹랑한 것으로 생각했다면, 읽고 무시했을 것이다.
‘읽씹’ 말이다.
하지만 누구냐고 되묻는 건 정보는 그럴듯한데, 출처가 모호하다고 느껴서일 것이다.
바로 답장을 보냈다.
[문유석을 조심해. 어차피 부하 단속은 당연히 하는 거잖아? 당신도 문유석을 90%만 믿어 봐.]
구구절절 설명을 달지 않았다.
이현석이 작정하고 문유석에 대해 조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녀석의 빈틈은 생각보다 많다.
쓸만한 눈 몇 개만 붙여도 며칠 안에 그의 배신에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터다.
“진짜 피곤하군.”
답장을 보낸 강후가 스마트폰을 침대 끝으로 던지고는 이불을 이마까지 쭉 끌어올렸다.
지금은 죽은 듯이 잠만 자고 싶었다.
차소희와의 전투는 가뜩이나 예민한 자신의 몸에 많은 과부하를 일으켜버렸다.
푹 자야 한다.
“아차.”
강후는 문득 스친 생각에 다시 스마트폰이 있는 위치까지 기어가서는 음악 앱을 켰다.
【음악의 아버지】
【클래식 음악을 들으면 체력 회복 속도가 5배 상승합니다.】
“성좌는 알차게 써먹어야지.”
회복에 도움을 주는 성좌 때문이었다.
이왕 쉬는 거, 클래식 하나 트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윽고 감미로운 선율이 귓가를 휘감으며 꿀맛 같은 휴식이 시작됐다.
* * *
같은 시각.
강동현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자신만의 공간에서 영상 하나를 보고 있었다.
죽은 차소희의 시신에서 회수한 영상이었다.
그녀가 입고 있던 스포츠 브래지어 앞부분에 달려 있던 초소형 장치에 촬영된 영상이었다.
현장에서 확보된 영상은 강후와 차소희가 열차 플랫폼에서 만났던 시기가 전부였다.
그 이후에는 차소희의 화염 공격에 CCTV와 회로가 전부 타버려서 남은 것이 없었다.
항상 강동현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선물한 아이템이나 장신구 따위에 촬영 장치를 심어놨었다.
오래된 역사였다.
자신의 충직한 사냥개들이 죽는 것은 딱히 아깝지 않았다.
잃을 때 잃더라도, 정보 수집용으로 끝까지 어떻게든 써먹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안배인 셈이다.
강동현은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장치에 담긴 강후와 차소희의 전투를 전부 살폈다.
그리고 영상의 끝에서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차소희가 질 수밖에 없었군.”
패배는 예정된 결과였다.
시간의 문제일 뿐, 강동현은 길게 싸웠어도 차소희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강후가 활용하는 스킬의 레퍼토리가 생각 이상으로 다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움직임도 자유도가 매우 높고, 스킬 구성도 암살자에 한정되지 않았다.
“레벨 10이었던 헌터 수용자가 밖에 나간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이렇게 바뀔 수가 있는 건가?”
강동현이 입에 문 담배를 쭉 빨아들였다.
독한 담배라서 한 번 피울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지만, 포기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강후의 성장세는 보통 성장세가 아니었다. 초특급 유망주? 그러한 표현으로도 수식하기에 부족하다.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두각을 드러낸 헌터들 중에서도 이렇게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한 케이스는 드물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헌터들은 하나같이 유명한 헌터가 됐다.
미국의 포르투나 길드의 케이시 렉스 같은 케이스 말이다. 엘리트 코스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이건 참을 수가 없는데.”
강후가 대단한 실력을 가진 것은 차소희의 죽음으로 증명이 충분히 됐다.
하지만 직접 영상까지 보니, 강후에 대해서 단념하려고 했던 욕심이 다시 치솟아 올랐다.
잘 다듬기만 하면 보석이 될 수 있는 원석을 뻔히 두고서는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앞서는 사냥개를 풀어 집요하게 강후의 뒤를 쫓고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가는 전략을 쓰려고 했다면.
이제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접근을 할 생각이었다.
강동현이 버튼 하나를 누르자, 대기실에 있던 사람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네이비 컬러의 긴 생머리에 빨간색 머리띠가 무척 인상적인 여자였다.
“찾으셨나요?”
“응. 네가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지 싶어서.”
“말씀해 주세요. 어떤 일이든 시키시는 대로 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 녀석과 가까워지도록 해 봐. 연인이든 썸이든, 어떤 관계든지 좋아. 가까이 붙어보라고.”
강동현이 모니터를 돌려 그녀에게 보여준 것은 강후의 얼굴과 그에 대한 정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이번에는 사랑인가요?”
“응. 이런 외모의 녀석이면 마음도 좀 동하지 않겠어? 생기기도 잘 생겼고 말이야.”
“확실히 마음이 동하네요. 자칫 진짜 마음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는걸요?”
“상관없어. 장기전으로 가자고.”
강동현이 담배 연기를 후욱, 하고 멀리 뱉어내며 양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은 차고 넘칠 만큼 많다는 그의 여유로운 제스처였다.
* * *
꼬박 12시간을 잤다.
눈을 뜨니, 어느덧 밤이 찾아온 오후 9시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삭제된 셈이다.
체크아웃을 마치고 나온 강후가 이예린을 만나, 차소희에게 얻은 아이템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간 처분하지 못했던 물건들까지 전부 팔아치우니, 총 105억 원의 수입이 생겼다.
잔고 106억 원.
지금 당장 3등급 아이템 하나를 사기에도 문제가 없을 거액이었다.
이예린은 강후와의 아이템 거래가 끝나자마자, 자신에게 들어온 지정 의뢰서를 내밀었다.
일반 의뢰서와 달리, 금테가 둘러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느낌이 들었다.
“앞서 말했었던 지정 의뢰에요. 공태수 건을 맡겼던 의뢰자의 두 번째 의뢰인 거죠.”
“의뢰인의 정보는?”
“농담하시는 거죠?”
실없는 소리를 던져봤던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단의 생명은 신뢰다.
의뢰인의 정보를 함부로 발설하는 용병단은 절대로 유지될 수 없다.
오히려 배척의 대상이 된다.
다른 용병단의 공공의 적이 된다는 얘기다.
그래서 차라리 입 다물고 죽을지언정, 의뢰인에 대한 정보는 캐낼 수 없었다.
그게 가능한 경우는 의뢰인 스스로 자신에 대한 정보 공개를 요청하거나 허락했을 경우뿐이다.
“기본 보수가 35억 원이에요. 여기에 추가 보수가 15억 원.”
“라테우스 자요석 채굴. 특정한 던전에서만 나는 자요석으로 알고 있는데.”
“맞아요. 위치와 지도 정보까지 의뢰인이 꼼꼼하게 첨부해 주셨어요. 상당히 좋은 소식이죠.”
“글쎄요. 동시에 나쁜 소식이기도 한 것 같은데.”
강후가 지도 정보에 표시된 주변 상황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의 이유가 같다.
꼼꼼한 나머지 알고 싶지 않은 정보까지 있는 게 문제.
‘잠깐, 눈에 좀 익은데.’
내용을 자세히 훑었다.
위치 정보를 살피니, 원작과 자연스럽게 연결 고리가 생겼다.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는 임밸런스 포인트(Imbalance Point)일 텐데?’
임밸런스 포인트 혹은 언밸런스 포인트라고도 불리는 장소가 자요석 채굴지와 가까웠다.
아니, 같은 던전 안에 있는 공간이다.
위치만 조금 다를 뿐, 찾아가려면 금방 찾아갈 수 있다.
저런 이름이 붙은 것은 상당히 불균형하다 싶을 정도로 경험치와 특혜를 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장시환의 기연과 관련된 곳이기도 했다.
그에게 성장 동력을 쉼 없이 불어넣기 위해, 원작에서 종종 등장했던 소설적 장치이기도 했다.
‘최소 레벨 20. 포인트에 누적된 불균형함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30도 충분히 오를 수 있어.’
의뢰의 보수도 보수지만, 그 이상을 뛰어넘는 유혹이 강후의 앞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났다.
하물며 그것이 장시환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는 ‘기연’이라면.
반드시 욕심을 내야 했다.
무조건 자신이 차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절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