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성장, 또 성장 (2)
* * *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한 지 약 10초도 채 흐르지 않은 상황.
조금은 넉넉한 마음으로 전투를 준비하던 그레이퍼의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쭉 흘러내렸다.
“…….”
강후의 위치를 특정할 수 없었다.
먼 사거리의 이점을 이용해서, 적이 접근하기 전에 집요하게 저격을 할 생각이었는데.
시작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강후가 환영술과 그림자 걸음을 번갈아 사용하며, 그레이퍼의 시야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시야를 확대하고 확장해도, 도저히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는 분신과 본체.
너무 똑같은 강후가 최소 셋 이상은 보였다. 어디에 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시간이 훅 지났다.
전투라는 것은 매 순간이 선택의 연속이고, 그 선택은 빨라야만 한다.
생각한 시간 만큼, 적이 움직이고 접근한다.
하지만 그레이퍼는 너무 깔끔한 강후의 대응에 필요 이상으로 그에게 시간을 주고 말았다.
타앙!
그렇다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고르고 골라 본체라고 생각되는 타깃에게 정조준한 일격을 날렸다. 파괴력이 상당한 마탄이었다.
강후는 만약을 대비, 신속 회피 스킬까지 활용해가며 지면에 몸을 납작하게 붙여 피했다.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것이다.
물론 그레이퍼의 저격은 본체가 아닌 환영을 노렸고, 허무하게 허공을 관통해 버렸다.
‘거너와 암살자가 확실히 상극이긴 하군.’
거리를 코앞까지 좁힌 강후에게는 여유가 있었다.
당황한 것은 그레이퍼였다.
애초에 원거리 저격에 익숙한 녀석이다 보니, 가까이 있을 때도 조준에 신경을 써야 했다.
FPS 게임을 보면, 조준하지 않고 바로바로 저격할 수 있는 센스가 중요할 때도 있다.
아쉽게도.
던전 레벨 110 수준의 공간에서 미들 보스 역할을 담당한 그레이퍼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강후가 눈앞에 있음에도 기어이 조준을 해서 방아쇠를 당겨야 하는 슬픈 운명이었다.
그래서 손쉽게 그레이퍼에게 시야 강탈과 얕은 혼돈을 걸었다.
녀석이 평정심만 잘 유지했더라도 두 스킬 연계에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상상 이상으로 빠른 강후의 접근에 당황한 그레이퍼의 두 눈에는 당황스러움이 가득했다.
포커페이스도 제대로 되지 않는 셈이다. 이래서는 요리하기 딱 좋은 먹잇감일 수밖에.
그레이퍼는 횡 이동 이후에 연계하는 강후의 후방 공격에 착실하게 난도질을 당했다.
이미 목 언저리에 단검이 꽂혀 들어가는 순간부터 미래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죽게 될까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푸슈슈슛!
결국 혈화와 함께 자신의 몸이 쏘아 올린 피분수와 뒤섞여,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정조준】
스킬 강탈에 성공했다.
정조준.
일종의 망원경 효과다.
특정한 대상을 좀 더 확대해서 고배율로 보고자 할 때, 매우 도움이 되는 스킬이다.
은밀한 공격을 주로 하게 되는 암살자 클래스의 입장에서는 가려운 곳을 확실히 긁어주는 스킬.
꽤 먼 거리에서도 상대를 살피는 것이 가능하니, 활용 가치는 쓰는 만큼 무궁무진해진다.
“시작이 좋네.”
만족한 표정과 함께 강후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컨디션도 좋고, 굳이 숨 돌리며 쉴 필요도 없었다. 바로 최종 구간까지 휘몰아칠 생각이었다.
* * *
얼마 후.
“죄책감을 들게 보스 몬스터를 만들어놨군.”
별다른 사건 사고 없이, 무난하게 메인 보스 구간까지 들어온 강후가 최종 보스를 확인했다.
메인 보스 몬스터, 새미.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보스 몬스터로 정신계 공격에 특화된 몬스터였다.
몬스터의 성별이나 나이가 유의미한 것은 아니다.
다만 몬스터가 어린아이의 외형을 하고 있으면, 잠깐이지만 죄책감에 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점을 노리고 원작에서는 노인형, 여성형, 유아형 보스 몬스터를 정말 많이 만들었다.
주인공 장시환에게 심리적인 고민이나 흔들림을 주기 위해서다.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 할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많은 장시환은 원작 내용 중에 노인형 몬스터를 공격하지 않은 적도 있었다.
덕분에 그 회차에서 욕설이 담긴 댓글만 수백 개를 받고, 대대적인 수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새미는 공격자의 죄책감을 유발하도록 만들어진 몬스터임이 틀림없었다.
천전난만한 일곱 살 어린아이의 모습을 그대로 가져다 놨다. 해맑게 웃는 것은 덤이다.
“바꿔 생각하면 돼.”
간단하게 생각했다.
보스 몬스터들이 어떤 외형을 하든 간에, 자신을 죽이려는 것이 최우선의 목적임은 변함이 없다.
죽기 싫으면 죽여야 한다. 단순하게 판단하면 된다. 외형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파팟!
바로 전투에 돌입했다.
새미에게 강후가 강탈하고자 하는 스킬은 ‘환각’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게 만들거나, 경험하지 못한 감각을 느끼게 해서 착오를 만든다.
즉, 지금 강후가 조심해야 하는 새미의 공격이 환각이라는 얘기도 된다.
‘대응은 간단하지.’
정신계의 공격은 가장 대응하기 어렵기에 헌터들이 기피하는 형태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강후에게는 달랐다.
원작 설정상, 환각에는 심플하면서 직관적인 대응 방법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환각으로 유발될 환상보다 더한 망상을 하고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예린의 알몸이라던가, 타락하고 퇴폐적인 모습이 되어버린 한서연이라던가.
평소에는 해 볼 것 같지 않은 상상이지만 무의식의 영역에는 있을 법한 생각을 끌어 올린다.
그렇게 되면 새미의 환각 유발이 정신에 만들어낼 변동성과 의외성이 큰 힘을 갖지 못한다.
이미 망상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는 환각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잉?”
그래서일까?
어지간한 경우였으면 환각 공격에 바로 초점이 흐려지며, 자신의 수족이 되었어야 할 적.
그 적수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재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것을 보고 새미가 놀란 소리를 냈다.
‘이 던전의 보스는 순진한 구석이 많네. 최선이 안 되면 차선, 차선이 안 되면 다음을 가야지.’
한심했다.
보통 이런 케이스는 첫 번째 공격이 상대에게 잘 먹힌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항상 첫 번째 방법이 통해서, 굳이 그다음 옵션을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거에는 다양한 선택지를 생각해 두었었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무디어지는 셈이다.
앞서 미들 보스 그레이퍼가 그랬고, 새미도 마찬가지.
환각을 유발하는 작업이 완벽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녀석의 시선이 흔들렸다.
“에잇……!”
결국 새미는 뒤늦게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필살기를 곧바로 꺼내 들었다.
강후도 새미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새미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중요한’ 패를 얼마나 빨리 쓰게 만드냐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전투 시작 10초 만에 나왔다.
카드 게임으로 보면, 시작과 동시에 포커페이스가 무너진 그림과 같다.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빠르게 판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끝까지 자기 계획대로 벗겨 먹을 수 있다.
두두두두!
새미가 제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정신계 공격을 주로 쓰는 보스 몬스터가 이런 이상 동작을 할 때는 이유가 있다.
그 자체가 공격의 어떤 수단과 과정이 될 때다.
하지만 강후는 새미에게 접근하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게 새미가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거리를 벌리거나 피하면, 그만큼 녀석은 시간을 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훨씬 더 강한 압박으로 정신 공격을 밀어붙일 것이다.
그때는 단순한 망상만으로 버텨낼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즉, 첫 번째 결과를 학습하고, 보완된 두 번째 결과를 내놓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때.
푸슛!
‘산성구였나.’
새미에게서 초록빛의 구체 하나가 출발했다.
누가 보기에도 독성과 산성이 그득해 보이는 구체다.
신속 회피를 이용해 쉽게 피했다.
한 개의 구체를 피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우니까.
하지만.
푸슛! 푸슈슛!
‘설마?’
이번에는 두 개가 출발했다.
그래서 아예 원래 위치에서 넉넉하게 이탈하는 것으로 피했다.
강후의 좌우 기동폭을 예상하고 날린 듯,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이건 또 무슨 지랄이지.’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번에는 네 개였다.
마치 슈팅 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점점 기동의 폭을 신경 써가며 피해야 하는 느낌이었다.
적극적으로 환영술과 그림자 걸음을 썼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림자와 위치를 바꿀 일이 많을 듯하고.
동시에 환영으로 타깃을 특정하기 어렵게 해야, 좀 더 공간을 넓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여덟. 열여섯.
그리고 서른둘. 예순넷!
극한의 회피 센스를 요구하는 새미의 공격이 매섭게 날아들었지만, 강후는 모두 피해냈다.
그간 착실하게 쌓아 올린 감각과 스킬의 승리였다.
단언컨대, 자신에게 스킬이 하나라도 부족했다면 지금 저승 구경을 하고 있었을 것 같을 정도.
어쨌든 그 틈을 뚫어내고, 강후는 원했던 대로 단검을 꽂아 넣는 데 성공했다.
공격에 심취해 있었던 새미는 방어는커녕, 강후가 코앞까지 접근한 사실도 모른 채 당했다.
“너는 정신 공격이 아니라, 차라리 이 산성구 공격을 메인 콘셉트로 하는 게 좋겠다.”
“크에엑…….”
진심을 담은 강후의 조언(?)과 함께 새미의 숨통이 끊어졌다.
어떻게든 피해냈기에 다행이지, 실패했으면 강후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던 공격이었다.
강후의 등을 잔뜩 적신 굵은 땀방울이 순간순간의 긴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레벨이 49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레벨 49.
다음에 던전에 오면 그때는 레벨 50은 무조건 확정일 듯했다.
기본 스킬 하나가 더 추가됐다.
항상 그랬듯이 보너스 포인트는 체력에 투자했다.
레벨 비례 체력이 적용되는 장갑 ‘소울메이트’를 위해서라도, 체력 투자는 계속할 생각이었다.
스탯 상태를 한 번 체크했다.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신강후 Lv. 49】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120】【민첩 85】
【체력 438】【마력 20】
【항마 45】【맷집 70】
“좋아. 체력 만땅인 상태에서는 마나 과민증이 발동돼도, 최소 7분은 버틸 수 있겠네.”
넉넉해진 체력만큼, 마나 과민증을 몸이 버텨낼 수 있는 시간도 꽤 길어졌다.
몸에 담아둘 수 있는 마력은 적지만, 과민증 덕분에 수급은 어차피 걱정이 없다.
수급이 문제가 아니라, 빠른 수급을 몸이 버텨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체력이 버텨줘야 할 문제고, 솔라키움과 같은 약제로 진정시켜줘야 할 영역이다.
체력은 확실히 높다.
레벨 50 헌터면, 체력에 투자한 헌터라고 해도 보통 이쯤에 체력 200이면 높다고 한다.
애초에 이 정도 레벨에서 괜찮은 아이템 세팅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서다.
던전에서 솔플하는 것은 둘째 문제고, 난이도가 낮은 던전을 다니기 바쁠 때다.
하지만 잘 쌓아 올린 내실과 큼지막하게 벌었던 돈 덕분에 상상 이상의 세팅이 가능했다.
이쯤이면 레벨 100, 아니 130 정도라고 봐줘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 이상일 수도 있다.
그때.
“스킬 강탈은 둘째치고, 횡재가 하나 더 있군.”
강후가 죽은 새미에게서 떨어진 마석의 색깔을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절로 웃음이 나오는 보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