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팀플레이 (2)
미들 보스, 스포르툴라.
제자리에서 묵직한 대검을 휘둘러 강렬한 폭풍을 사방으로 방출하는 검사형 몬스터다.
같은 자리에서 마나를 무한대로 공급받으며 방출하는 폭풍이기에 중간에 끊어질 염려가 없었다.
게다가 2초 간격으로 사용하기에 빈틈도 거의 없다고 봐야 했고, 타격 범위도 상당히 넓었다.
정리하자면 어느 방향에서 달려들어도 스포르툴라의 검풍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들 보스는 경우에 따라, 잡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인 보스와 달리, 공략이 반드시 강제되지는 않는다.
다만 잡으면 보상이 있으니까 잡을 뿐이다.
‘그건 아쉽지.’
하지만 접근이 까다롭다고 해서 그냥 지나치기는 스포르툴라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이 아까웠다.
녀석에게는 스킬이 세 개 있다.
강철 폭풍.
유체화.
호신 1단계.
강후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호신 1단계였다.
패시브 스킬로 신체를 보호하는 과정에 특화되어 있는 스킬이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적요석을 활용해서 단계적으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스킬이기도 했다.
일단 스포르툴라를 공략할 계획은 나름대로 섰다.
하지만 정유리의 협력이 꼭 필요한 만큼, 그녀에게 물었다.
“괜찮은 생각 있어? 난 이미 생각한 방법이 하나 있는데.”
“왠지 그 방법!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 듯한데 먼저 말해도 돼?”
“레이디 퍼스트.”
“보니까 정면 접근은 어렵겠어. 내가 통로를 열어줄 테니까, 아예 위에서 떨어져 볼래?”
정유리가 해맑은 표정으로 가리킨 것은 스포르툴라의 머리 위였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확인한 강후가 웃었다.
그녀와 같은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정유리는 공간에서 공간을 여는 능력을 가진 헌터다.
거리 제한이 있기는 해도, 어떻게든 거리를 확 좁히는 통로를 열 수 있다.
이런 통로를 연달아서 계속 열 수 있다면, 스포르툴라의 머리 위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폭풍의 범위는 지상으로부터 5m 정도의 높이이므로, 그 위로 쭉 이동할 수 있으면 된다.
“내 생각과 같네.”
“응! 저 녀석의 공격이 매섭기는 하지만, 반면에 방어도 상당히 약해 보여.”
“그럼 부탁하지.”
“지금 바로?”
“시간 끌 것 있나?”
“좋아!”
정유리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후의 앞에 차원문 입구를 열었다.
동시에 사선으로 7m 정도 되는 지점에 차원문 출구를 열었다.
이런 식의 이동인 것이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파앙!
강후가 도약으로 몸을 날리면서 빠르게 차원문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스킬 중복 구현은 불가능하기에 강후가 출구로 나오는 순간, 정유리가 다음 차원문을 열었다.
우선은 강후의 고도를 확실하게 높여주려는 듯, 초반에 세 차례의 차원문이 위로 계속 이어졌다.
이렇게 세 번 반복하니, 어느새 강후의 위치가 지면으로부터 15m 정도 되는 높이에 있었다.
딱 공포감을 느끼기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강후는 아래를 내려다보고도 표정 한 번 변하지 않았다.
파앙!
그 사이에도 스포르툴라가 방출하는 검의 폭풍이 매섭게 지면을 훑고 지나갔다.
그때마다 바위가 돌멩이가 되고, 돌멩이가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정말 위력적인 공격이었다.
“계속 문을 열을게!”
“지금 좋아!”
강후가 정유리에게 엄지를 치켜들어 보였다.
그녀가 고도로 집중하고 있다는 것은 강후도 잘 알고 있었다.
육체와 정신에 빠르게 과부하가 쌓이는 중일 터다. 공간 활용 스킬을 연속으로 시전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엄청난 무리를 요구하는 작업이다.
100m 달리기를 하고 나서, 또 100m 달리기를 하라고 하면 몸이 버틸 수 있겠는가?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하지만 정유리는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걱정을 덜어주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기에 강후 역시 지금의 상황에 전력을 다했다.
파앗!
또 차원문이 열렸다.
이제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는지, 조금씩 고도가 낮아지는 형태로 길을 뚫었다.
공중에서도 도약 스킬은 얼마든지 쓸 수 있기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차원문에 몸을 날렸다.
그 순간부터 마치 기계처럼, 딱딱 입구와 출구가 만들어졌다.
접근은 순식간이었다.
지름길이 계속 열리니, 100m는 족히 넘어가던 스포르툴라와의 거리도 코앞까지 다가왔다.
어느새인가 강후는 스포르툴라의 정수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자리한 상태였다.
‘그냥 문지기 콘셉트구나.’
그제야 알아차렸다.
스포르툴라가 사방으로 방출하는 폭풍은 어떤 정해진 입력값에 따라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녀석은 머리 위에 강후가 자리를 잡고 있음에도, 상단을 겨냥한 폭풍을 만들지는 않았다.
슈욱!
목표 지점에 도착한 강후가 먼저 연습용 단검을 스포르툴라를 향해 날렸다.
힘을 가볍게 실은, 공격이라기보다는 자잘한 견제에 가까운 공격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스포르툴라를 지키는 패시브 스킬인 호신을 걷어내기 위해서다.
아니나 다를까.
샤아아아.
연습용 단검이 스포르툴라에게 닿는 순간, 호신이 활성화되면서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멋진 방어였지만, 동시에 빈틈이 생겼다.
【대참수】
강후는 더 잴 것도 없이 곧바로 대참수 스킬을 사용하며, 그대로 수직 낙하했다.
위치가 너무 좋아, 중력에만 몸을 맡겨도 충분히 스포르툴라의 정수리를 꿰뚫을 수 있을 듯했다.
푸욱!
정확히 목표 지점 안착에 성공한 강후가 단검으로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
신음 한 번 들리지 않을 만큼, 일격에 상황을 종료시켰다.
손잡이만 보일 정도로 깊숙하게 박힌 단검은 스포르툴라의 목숨을 완벽하게 끊었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강철 폭풍】
【유체화】
【호신 – 1단계】
‘호신 1단계.’
다른 스킬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강철 폭풍은 시전 대기 시간이 있어, 초를 쪼개는 단위로 싸우는 강후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방금 스포르툴라에게 확인한 것처럼 2초 정도의 대기 시간을 갖는 것이 강철 폭풍 스킬.
신속이 필수인 암살자의 콘셉트 상, 2초나 여유 부릴 틈은 없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강철 폭풍은 과시용 스킬이지, 전투용 스킬은 아니었다.
아예 후방에서 마법사처럼 강철 폭풍이나 쏴댈 생각이면 모를까.
그리고 유체화는 가속과 메커니즘이 거의 비슷하기에 매력적이지 않았다.
물론 가속과 함께 쓰면 시너지가 있겠지만, 그러느니 가속의 효율을 좀 더 높이는 게 낫다.
【호신 - 1단계】
【스킬 숙련도 : Lv. Max】
【패시브 스킬. 활성화 시, 재활성화까지 1시간이 소요됩니다.】
【호신을 활성화하여 적의 공격을 한 차례 무력화할 수 있습니다. 단, 선택적 무력화는 불가능합니다】
【적요석을 활용해서 2단계로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어쨌든 타이밍을 맞추면 한 번은 절대 회피니까. 내게 가장 요긴한 스킬이다.’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암살자는 클래스 특성상, 자신을 보호하는 스킬을 갖기가 매우 어렵다.
이후 추가될 기본 스킬에도 방어에 관련된 스킬은 없다.
방향성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스포르툴라에게 강탈한 호신 스킬은 두고두고 활용할 가치가 높을 듯했다.
게다가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확장성도 있으니,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하게 늘어날 터다.
스포르툴라가 전리품이 될 만한 것을 드롭하진 않았다.
하지만 경험치 보상이 매우 짭짤했다.
레벨 46의 극초반이나 다름없었던 경험치가 단숨에 거의 끝자락까지 올라갔다.
숫자로 비유하면 46.0에서 46.9는 된 수준이었다. 거의 레벨 업이나 진배없는 셈이다.
“와! 우리 손발 완전 잘 맞는데? 예전에도 이렇게 이동해 본 적 있어?”
“아니.”
“그런데 통로를 이 정도로 깔끔하게 활용한단 말이야? 솔직히 난 백업을 엄청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길을 열어줬는데, 그걸 활용할 줄 모르면 헌터 라이센스 반납해야지.”
“마지막에 정수리에 내려 꽂은 공격은 스킬이지? 약점인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일격에 미들 보스를 끝장낼 줄은 몰랐어!”
“다 네가 짜놓은 판이지. 덕분에 쉽게 공략한 것 같네.”
“무슨 소리야! 그쪽 실력이니까 완벽한 판으로 만들어준 거지, 다른 헌터였으면 아사리판이 됐을걸? 나 완전 개판이었어!”
강후는 일관되게 정유리의 센스를 칭찬해 줬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화제를 돌렸다.
“칭찬이 어색한 모양이지?”
“……사실, 그래.”
“익숙해질 건 익숙해지자고.”
공간계 능력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스킬의 존재 가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쓰레기 취급을 받을 수도 있고.
불리한 전투를 극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정유리의 공간 스킬 활용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후자였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100%는 아니더라도 90% 이상은 신뢰할 수 있었다.
공간 활용 능력은 팀 플레이 시에는 믿음이 있어야만 온전히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신이 있으면 절대 그 효과를 볼 수 없다. 매번 통로에 들어갈 때마다 걱정하게 될 테니까.
‘재밌네.’
신기하기도 했다.
순수하게 서로 실력만 보고 감탄하고,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는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이 세계에서 눈을 뜬 이후 처음으로 부담 없이 전투에 임해 본 첫 번째 경험인 듯했다.
파트너인 정유리가 순수하기 때문인 거겠지.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은 완벽하게 검은 때가 묻은, 까마귀와 같은 존재라고 여겼기에.
* * *
강후는 중간에 자잘한 몬스터들을 정유리와 함께 잡으며, 무난하게 레벨 47을 찍을 수 있었다.
어느덧 기본 스킬을 얻을 수 있는 레벨 50의 시점도 가시권에 들어오는 중이었다.
레벨 50이 되면, 그다음에 기본 스킬을 얻는 시점은 레벨 100이 된다.
50 이후로는 당분간 기본 스킬의 수급이 끊기는 셈이다.
그런 이유로 스킬 강탈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적극적으로 던전에서 스킬을 얻어내지 않으면, 다른 수단으로 스킬을 추가하기가 어렵다.
“근데 쟤는 왜 저러고 있는 거지?”
한편 보스 몬스터의 위치와 정체를 파악한 정유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의 이름은 레간트.
방어구도 무기도 갖춰두지 않은 레간트는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듯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가 보아도 빈틈이 많아 보일 정도면, 그건 보통 함정일 경우가 많은 편인데.”
강후가 살짝 앞서 나가려던 정유리를 손을 뻗어 제지했다.
느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도약 몇 번만 해도 숨통을 끊기 딱 좋을 만큼의 거리에 자리하고 있기는 했지만.
너무 쉬워 보였기 때문이다.
던전 공략에 공짜는 없다.
그때.
강후가 정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가서는 그녀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망쳐. 최대한 뒤로.”
뭔가 짚이는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