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43화 (43/304)

43화 팀플레이 (1)

* * *

다시 되돌아 나오는 길.

강후는 바로 서울로 돌아가기보다는 의뢰도 빨리 끝난 김에 정유리를 보고 가기로 했다.

그래서 방향을 왔던 길 그대로, 거꾸로 잡았다.

그녀의 활동 반경이 얼추 예측이 됐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길.

침묵을 즐기면서 걸어가는 가운데, 차원 강탈자가 말을 걸었다.

【성좌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지?】

성좌.

원작에서 성좌는 사실 주인공인 장시환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만든 의미가 전부였다.

성좌에 관련해서 어떤 디테일한 구상을 해 두고 글을 썼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해질 수단 중에는 성좌도 있고, 그런 성좌가 장시환에게 꼬이고 있다…… 정도였다.

어찌 보면 설정 중에 허술한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차원 강탈자가 넌지시 성좌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을 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생각해 보지 않았어.”

솔직하게 답했다.

차원 강탈자가 소설의 설정적인 측면을 물어보려고 했던 것은 당연히 아닐 테니까.

다만 이 시점에 운을 띄우는 것을 보니, 자신과 좀 더 깊은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은 분명했다.

【너도 알다시피 성좌의 시험을 통과하게 되면, 성좌와 계약자의 운명은 하나가 되지.】

“그렇지.”

【왜 계약자의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다가 성좌의 운명을 연결한 걸까?】

차원 강탈자의 질문은 의문이라기보다는 강후에게 한번 생각해 보라고 화두를 던져주는 쪽이었다.

“단순히 헌터의 세계, 시스템의 영향이 인간 문명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건가?”

【계약자와 성좌를 운명 공동체로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계약자만의 전쟁이 아니라서다.】

“그러면 성좌의 전쟁이라는 건가?”

【그렇지. 성좌가 이 세계의 관리자가 아니라는 거다. 성좌도 구성 요소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위의 존재는?”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해. 난 평범한 성좌로 사라지고 싶지 않다.】

힘주어서 말하는 차원 강탈자의 중성적인 목소리에는 의지가 잔뜩 실려 있었다.

차원 강탈자가 말을 덧붙였다.

【너를 보고 있으니 자꾸 욕심이 난다. 마음이 두근거린다. 너라면 무엇이든 해낼 것 같다는 확신이 점점 들고 있다!】

강후가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또 강력한 성좌라고 생각하는 차원 강탈자.

그런 성좌의 격한 감정이 담긴 인정을 받으니, 강후 역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느낌.

사람에게 칭찬을 받은 것과 전혀 다른 성취감과 쾌감이 온몸에 전율로 느껴졌다.

잠깐이지만.

헌터의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확장되어 성좌의 세계, 더 확장되어 그 이상의 세계로 향했다.

어디가 끝인 걸까?

장시환과 열세 개의 별을 제압하는 것만로는 이 세계의 엔딩을 볼 수 없는 걸까?

그렇다면 마왕도 구성 요소들 중의 하나인 건가?

대답을 들을 수 없는 질문이기에 그의 머릿속에서 한참을 맴돌다 말았다.

【곧, 너를 시험할 것이다. 나를 기쁘게 해 줄 너의 도전을 기대하겠다.】

“나 역시도. 기대 만발이야.”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차원 강탈자와는 이 세계에 빙의를 한 순간부터 한배를 탄 사이다.

다른 사실과 미래는 뒤바뀔 수 있을지언정, 차원 강탈자와의 관계는 바뀔 리 없을 것이다.

잠깐의 대화.

진지하게 임했던 차원 강탈자와의 대화는 강후에게 새로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처음에 빙의했을 때는 신강후의 삶을 살아가며, 부역자 엔딩을 막는 것이 목표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부역자 엔딩이라는 키워드에 사로잡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놓쳤던 주제를 차원 강탈자가 다시 인지시켜 주었다.

오랜 여정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는 동안 강후는 정유리와의 만남을 끝내는 대로 이동할 장소를 정했다.

바로 광주송정역.

일전에 헌터 치안청으로부터 1개월 임대권을 받은 던전이 광주송정역의 3번 출구에 있었다.

라이센스가 넘어올 때가 된 것이다.

던전의 변화와 맞물려 총 4개의 스킬 강탈이 가능한 만큼,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이었다.

다른 일들은 뒤로 미룰 수 있어도, 스킬을 새로 추가하는 일만큼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

그때.

“벌써 왔군.”

강후가 빠르게 가까워지는 마나의 흐름을 느끼고는 바로 정유리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는 그녀의 성좌 정보도 표시되었다.

“엄청 일찍 왔네?”

“볼일이 금방 끝나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정면이 아니라, 저 멀리 위, 나무 꼭대기에서였다.

목에 힘을 주어 말하지 않았다면, 의사소통이 힘들었을 만큼 충분히 먼 거리였다.

그녀는 확실히 특이한 능력을 가졌다.

공중에서 공간을 이동할 때, 검은 연기의 형태처럼 변해서 위치를 바꾼다.

저런 능력을 보통 변형 능력이라고 부르는데, 당연히 흔한 케이스는 아니다.

게다가 검은 연기로 변형된다는 것은 그 상태에서 물리적인 공격에 면역이 됨을 뜻하기도 한다.

정유리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이기도 한 셈이다.

애초에 원작에서도 그런 인물로 설정이 되어 있다.

이예린이나 안영호와 같은 부류다.

“마침 잘 됐다! 나, 꼭 들어가 보고 싶은 던전이 있는데 하필이면 인원 제한이 걸려 있어서.”

“……음?”

“사람이 필요해! 나 혼자서는 아무리 들어가려고 해도 안 들어가져. 시체도 안 되나 봐.”

말끝에 예시로 든 단어가 섬뜩하긴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에 시체야 흔하니 이상할 건 없었다.

“괜찮겠나? 내 입장에서야 들어가서 나쁠 건 없는데, 던전 주인은 내가 아니니까.”

“뭐, 어때? 내부 공략이 의무도 아니고, 같이 둘러보다 해 볼 만하면 끝을 보는 거지!”

해맑은 정유리의 반응에 강후도 달리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강후의 입장에서야 무조건 땡큐인 제안이었다.

안에서 미들 보스든, 메인 보스든 처치하기만 하면 스킬 강탈은 확정이기 때문이다.

정유리와 앞서 만들어뒀던 인연의 덕을 보는 셈이다.

물론 던전이 어떤 곳일지는 들어가 봐야 아는 만큼, 미리 속단하지는 않았다.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참에 그녀가 가진 능력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두는 것도 괜찮을 테니까.

‘첫 팀플레이인가?’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니, 누군가와 던전을 같이 공략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어지간해서는 솔플을 추구하는 강후지만, 이번엔 손님의 입장이니 끼워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던전은 일반적 경우와 다르게 두 개의 커다란 나무줄기가 얽히고설킨 틈에 입구가 있었다.

주변이 온통 나무 천지라 햇빛이 거의 닿지 않는 데다가.

입구의 색깔 자체가 검은색이라서 스치듯 봐서는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입구였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고, 일렁이는 공간의 흐름을 봐야만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던전 데이트(?) 비슷한 흐름으로 공략이 시작됐다.

규모가 큰 던전도 아니었고, 전반적으로 몬스터의 총량이 풍부한 던전도 아니었다.

1이 메말라 있고, 10이 넘치도록 풍부한 수준이라면, 이 던전은 2.5 정도 되는 던전이었다.

그래서 이따금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몬스터를 여유 있게 호흡을 맞추는 형태로 잡았다.

던전 레벨은 200 정도.

지금의 강후가 홀로 공략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정유리와 함께라면 화력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2인 1조.

입장할 때의 콘셉트에 맞춰, 강후는 정유리와 손발을 맞추는 모든 작업에 정신을 집중했다.

꼼꼼하게 그녀에 대해서 분석을 진행한 것이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성장을 따로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변형 능력에 마법 활용 능력.

여기에다가 공간에서 다른 공간을 열어주는 공간 활용 능력까지.

강후처럼 여러 옵션의 활용 수단을 갖고 있는 정유리는 공격 레퍼토리가 꽤 많았다.

그녀는 이곳처럼, 자신만 알고 있는 던전이 열 군데나 된다고 했다.

이 정도면 리셋에 맞춰서, 던전 공략을 로테이션으로만 돌려도 성장은 계속 이뤄질 터였다.

어쨌든 꾸준히 공략을 진행하다 보니, 레벨이 46까지 쭉 올랐다.

몬스터 레벨이 높아서 경험치가 짭짤했다.

둘이 나눠서 먹는다고 해도, 워낙 강후의 레벨이 ‘낮은’ 탓에 증가폭이 컸던 것이다.

정유리 덕분에 뜻하지 않게 이득을 많이 본 셈이라, 강후는 몇 번이고 감사의 말을 전했다.

상대가 마음을 써준 것에 대한 감사는 확실히 하고 싶었다.

배려에 당연한 것은 없으니까.

이동을 반복하는 동안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강후는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지금 누구보다도 외로움을 많이 타고 있을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말동무였다.

태생부터 순수하게 조형된 그녀의 성격을 믿었다. 정유리는 하얀 도화지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랬어. 공략에 꼭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믿고 따라갔는데. 그렇게 버림을 받은 거지.”

“길잡이로 이용한 것까진 이해가 되는데. 부상을 당하니까 수습할 생각도 안 하고 버리고 가?”

“생각해 보니 이런 능력을 가진 헌터가 많아져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게 채관형의 말이었어.”

“좋아. 백번 양보해 줘서 버리고 갈 수도 있다 치자고. 그런데 옷을 벗기는 건…… 왜지?”

“그냥 죽게 두는 건 아까우니까 그 전에 재미라도 보고 싶다는 게 놈의 말이었어.”

“그래서 비탈길로 몸을 날렸고, 우연히 떨어진 늪에서 이런 변형 능력을 얻은 거군.”

“응…… 맞아.”

정유리로부터 들은 채관형에 대한 이야기는 조구빈은 저리 가라고 할 만큼 더러운 얘기였다.

원작에서는 생략된 그녀의 아픈 이야기를 디테일하게 들을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용병으로 열심히 활동하던 시절의 정유리를 채관형이 팀의 길잡이로서 잘 이용해 먹다가.

그녀가 부상을 입으며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수습해서 치료를 돕기는커녕.

던전에 버려두고 가기로 결정했고, 심지어 그 와중에 몸을 함부로 범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던전에 헌터를 두고 간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던전 공략이 끝나면, 리셋과 함께 던전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라는 뜻이다.

살인과 똑같다.

그러니 정유리가 채관형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정화 길드에 악감정을 갖는 것도 당연했다.

채관형과 함께 했을 ‘팀원’들은 전부 정화 길드의 사람이었을 테니까.

그들이 채관형의 눈치를 봤다고는 해도, 결국 정유리를 버린 공범이 아닐 수는 없다.

“왜 그라운드 제로로 왔는지 알 것 같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보다는 충실히 나만 신경 쓰면 되는 여기가 마음이 놓이겠지.”

“맞아. 그게 내 마음이었어.”

“어떻게 보면 우리는 생각의 결이 같은 듯해. 표현하고 대응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말야.”

강후가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쳐주었다.

사실은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할 수 있게 깊은 포옹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신강후의 메마른 감성에는 그런 스킨십이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 어색하고 오글거리는 리액션이다.

이야기가 점점 무르익어가면서, 서로에 대해 좀 더 깊게 알아가기 시작할 즈음.

쿠아아앙!

정면의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소닉붐을 연상하게 하는 폭발음이 들려왔다.

그 순간.

콰드드드득!

시야를 빼곡하게 가리고 있었던 나무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넘어지며, 줄기가 반토막 났다.

굵기에 관계없이 모든 나무의 중심을 잘라낼 만큼 거칠고 날카로운 검의 폭풍!

누가 봐도 미들 보스의 것이 틀림없는 필살 스킬이 정면에서 날아들고 있었다.

쿠아아앙!

그리고 그 공격은 2초를 채 넘기지 않는 아주 짧은 간격으로 계속 날아드는 중이었다.

‘어떤 보스 몬스터인지 알겠군.’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다.

오늘따라 운이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용한 스킬 하나를 추가할 좋은 기회가 온 듯했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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