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40화 (40/304)

40화 그라운드 제로 (5)

“왜 이리 오래 지켜봐?”

“그냥. 호기심이 자꾸 가서.”

“그라운드 제로에서 쓸데없이 미행하는 건, 오해받으면 바로 싸움이 될 수 있다는 걸 알 텐데.”

“괜찮아. 도망은 잘 가거든.”

“그래서 호기심은 풀렸나?”

“아니, 더 깊어졌어. 도대체 이쪽은 왜 온 거야? 여긴 몬스터도 많지 않고, 길도 복잡한데.”

정유리는 원작에서 설정된 대로 호기심이 많은 여자였다.

윤상미가 치근덕거리는 느낌으로 강후에게 자주 질문을 던지거나 말을 건다면.

정유리는 순수하게 강후라는 인물 그 자체를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눈빛의 느낌이 달랐다.

“봤으니 알 거 아냐? 매드 솔라키움이 필요해서 왔을 뿐이야.”

“그렇구나…….”

정유리가 빤히 강후를 쳐다보았다. 얼굴 하나하나를 기억에 담고 싶은 것처럼.

오랜만에 사람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다.

“어쨌든 이젠 뒤를 쫓지 않았으면 해. 적의가 없다고 해도 썩 좋아하는 그림은 아니라.”

“미안해. 오랜만에 순수한 목적으로 그라운드 제로에 들어온 헌터를 봐서 그랬나 봐.”

사실은 순수한 의도로만 가지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조구빈을 추적하고 처치해야 하는 의뢰도 함께 받아서 들어왔던 것이니까.

녀석과의 싸움이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지는 또 싸워봐야 아는 법이다. 개싸움이 될 수도 있다.

“요즘 세상은 어때? 정화 길드가 여전히 다 해 먹는 중이야? 아니면 심연에서 한 방 먹였어?”

정유리가 화제를 돌렸다.

정화 길드에 대한 얘기가 바로 나오는 것을 보니, 기억하는 대로 그들에 대한 반감이 있는 듯했다.

군벌 심연에 대한 기대감을 갖고 있는 게, 자신과 보는 결이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살짝, 거리감을 좁히기로 했다.

강후에게 있어 정유리는 전략적으로 의미가 꽤 큰 인물이다.

그라운드 제로를 터전으로 삼고 있는 그녀는 상상 이상으로 빠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가깝게 지내두면, 그녀를 나중에 확장성 있게 활용할 수 있다. 무조건 도움이 될 관계다.

그래서.

원래 살갑게 말을 거는 강후가 아니지만, 오늘은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서울 전체가 정화 길드의 관할에 있고. 서울 밖에도 위성 길드가 꽤 많이 생겼지.”

“……심각하네.”

“정화 길드에 개인적인 악연이라도 있나?”

“많지. 아주 많이. 꼭 복수해야 할 사람도 있고. 하지만 지금 여길 떠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그렇군.”

“근데 어디 아파? 왜 이렇게 얼굴에 핏기가 없어? 매드 솔라키움을 먹으면 효과가 있는 거야?”

보는 사람마다 핏기없는 얼굴을 얘기하다 보니, 이제는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태닝이라도 해야 할까 싶은데, 그래도 태생이 하얀 피부가 극적으로 바뀔까 싶었다.

“원래 생겨 먹은 게 그래.”

“암살자치고는 스킬 구성이 흥미롭던데. 좋은 스킬북을 많이 챙긴 거야?”

“착실하게 잘 챙겼지.”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분이 스킬북이 아니라 스킬 강탈을 통해 얻은 스킬이지만, 굳이 정확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 이후로도.

강후는 정유리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눴다.

계획했던 매드 솔라키움을 모두 채집한 마당이라 쉬고 싶기도 했고.

그녀와 어느 정도 유대감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래를 대비한 안배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녀를 간절하게 원한다거나, 치근덕대는 그림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고, 하는 말에 친절하게 답해주면서 질문을 되돌려줬을 뿐.

하지만 그것으로도 정유리는 어느 정도 마음의 위로를 받은 듯했다.

외로움이 그만큼 컸을 터다.

“이제 이동해야겠군.”

“생각지도 않게 이야기를 길게 했네. 그라운드 제로에서 이런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원래 인연이라는 게 그런 거지. 생각지도 않게 이어지기도 하고, 끊어지기도 하고.”

“나중에 한 번 더, 여기에 찾아와줄 수 있어?”

“왜?”

“그냥. 당신은 순수해 보여. 뭐랄까. 대화를 하는 내내, 나에게만 집중해주는 게 보였달까?”

“다른 헌터는 다른 모양이지?”

“내 몸만 훑어보기도 하고, 은근슬쩍 은밀한 분위기로 몰고 가기도 했고…….”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라운드 제로에 오는 헌터들의 질이 좋을 리 없으니까.

싸우지나 않았으면 다행이다.

그런 이유로 ‘상대 평가’에서 자신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은 모양이다.

“그리고 슬퍼 보여. 뭔가 마음이 자꾸 가는 얼굴이야.”

“울상이야?”

“아니, 그런 사람 있잖아. 눈빛부터 슬픔에 잔뜩 잠겨 있는 사람. 우수에 잠긴 사람.”

설정을 이길 수는 없나 보다.

신강후라는 캐릭터는 늘 부정적인 감정이 깊게 깔려 있는 인물로 조형이 되어 있다.

그래서 아닌 척하려고 해도, 눈빛이든 행동이든, 혹은 말투에서든 다 티가 나는 듯하다.

“그래. 또 들르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강후가 날짜에 대한 확답을 주진 않았지만, 다시 오겠다는 약속은 꼭 해 뒀다.

정유리는 그럴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나중에 여러 갈래로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꼭, 다시 와.”

“응. 다만 할 말이 없어서 어버버하진 않았으면 좋겠군.”

“참고할게.”

“죽지 말고.”

강후가 무심한 듯, 정유리에 대한 걱정 한 마디를 남기고는 신속하게 자리를 떠났다.

어느덧 강후가 사라지고 혼자만 남겨진 자리.

“…….”

정유리가 아직 강후의 온기가 남아 있는 나무를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많은 생각이 교차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 * *

동이 트기 전.

적당히 눈을 붙일 만한 동굴을 찾아 2시간 정도 잠을 잔 강후는 개운한 몸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수면 시간만 보면 정상보다 터무니없이 짧은 시간이지만, 컨디션은 생각보다 많이 올라왔다.

그라운드 제로 전체 특유의 충만한 마나와 대자연의 기운이 알게 모르게 힘을 주는 듯했다.

강후는 조구빈이 있을 만한 지점을 미리 특정해 둔 상태였다.

그라운드 제로에 대해 사전 지식이 없는 헌터면,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이 식량 확보다.

뭔가를 캐 먹거나 해 먹는 작업이 힘들기에 야생에서 잡아먹을 만한 몬스터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식용으로 쓸 수 있는 몬스터가 분포하는 장소는 한정적이다. 그래서 특정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강후에게 강산성의 액체를 뿜어낸 해바라기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되는 식물이다.

먹는 순간.

식도부터 마비되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해독할 여지 없이 말이다.

결국, 식용 몬스터가 있는 제한적인 장소까지 빠질 것이 분명한데, 그곳이 이 근처였다.

조구빈이 마지막으로 확인된 장소가 임진강역이라고 했으니.

강후는 자신이 예상하는 장소에 반드시 그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예측 불가능한 야생인 이곳에서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돌아다닐 담력은 없을 것이다.

그라운드 제로를 잘 아는 강후도 껄끄러울진대, 조구빈 같은 놈이 머리 비우고 다닐 리 없다.

이동하는 동안, 강후는 의식적으로 험한 지형이나 비탈길을 따라 움직였다.

헌터들이 주로 다니는 ‘안전 루트’에서 자라는 솔라키움은 당연히 진즉에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헌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는 야생의 솔라키움이 자라고 있을 확률이 컸다.

덕분에 솔라키움 몇 개를 더 보충했고, 총 10개의 여유분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

강후가 이예린으로부터 넘겨받은 조구빈에 대한 자료를 다시 한번 살폈다.

딸을 조구빈에게 잃은 아버지가 직접 작성했다는 자료집.

그 안에 손으로 직접 쓴 내용은 글자 하나하나에 원망과 분노, 슬픔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따금 보이는 눈물 자국에서는 살인마에게 허무하게 딸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절망도 느껴졌다.

딸의 복수를 두 눈으로 지켜보기 전까지 절대 죽을 수 없는, 그래서 죽지 못해 사는 느낌이랄까.

추정 레벨 150.

마법계, 주 능력은 빙결.

상대하기 쉬운 구성은 아니다.

빙결이라는 능력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대단히 위협적인 옵션이 될 수 있어서다.

그때.

이예린에게 문자가 왔다.

【선규 씨에게 지정 의뢰가 들어왔어요. 의뢰자는 공태수 건을 맡겼던 사람이에요.】

【선규 씨에 대한 의뢰자의 신뢰가 매우 커요. 꼭 맡기고 싶다는데 수락하시겠어요?】

지정 의뢰.

잘 들어오지 않는 의뢰다.

그만큼 의뢰꾼의 실력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확신이 없다면 하지 않는 의뢰기도 하고.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그렇기에 상당히 많은 보수가 약속되는 의뢰기도 했다.

보통 이전보다 상위 개념의 의뢰를 주는 만큼, 최소 25억 원 이상이라는 예상도 가능해진다.

【간략한 의뢰 정보와 금액을 아는 게 우선일 것 같군요. 지금은 바빠서 나중에 보겠습니다.】

바로 답을 보냈다.

어차피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예린이 몸이 달았으면 달았지, 강후가 아쉬울 건 없었다.

앞으로 의뢰 쪽은 걱정할 일 없을 듯했다.

지정 의뢰 고객이 쌓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원하는 종류의 의뢰만 골라서 먹는 게 가능하다.

【현 지점, 300m 북쪽 지점부터는 더 이상 대한민국의 관할이 아니게 됩니다.】

【북한령 그라운드 제로는 사실상 관리 주체가 없는 만큼, 모든 사건 사고에 유의하십시오.】

경고 팻말도 보였다.

북한 땅도 장기적으로 보면 가치가 높은 땅이다.

북한에 위치한 던전은 공략이 체계적, 규칙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데다가.

헌터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던전이 상상 이상으로 많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 땅에 있는 던전으로 알려진 던전은 실제 개수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다만 마음대로 그라운드 제로 외의 북한 땅을 갈 수는 없고, 헌터 치안청의 승인이 꼭 필요하다.

‘원작에 떡밥으로 북한 땅에 뿌려놓은 내용이 너무 많았어. 생각해 보니 거의 회수를 안 했네.’

강후가 원작자로서 살았던 삶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떡밥을 너무 공격적으로 뿌리다 보니, 완결까지 회수한 떡밥이 절반도 안 됐다.

그래서 사실 부역자 엔딩과 맞물려, 부실한 떡밥 회수도 질타당하면서 욕을 배부르게 먹었다.

‘소설로 따지면, 떡밥만 회수하려고 해도 초 장편 감이네. 빙의한 내 삶이 소설이 된다면 완결 내기 정말 어렵겠군.’

강후가 불가능한 상상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북한을 배경으로 던전 스토리만 써도 몇 권은 뚝딱 써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아주 적은 양이지만 마나의 일렁임이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마나 과민증으로 극대화된 감각은 물론, 마나 추적 능력까지 연계해서 얻은 단서였다.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이쯤부터는 조구빈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강후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나무를 타깃으로 삼아서 횡 이동으로 모습을 숨겼다.

지금은 재빠른 이동이나 위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확실한 은신이 중요하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충분히 상대 얼굴과 외형을 파악할 수 있는 거리까지 좁혀갔을 즈음.

“킬킬. 진즉에 그라운드 제로로 왔어야 했네. 뒤치기해서 죽여도 누군지도 모르고 말야. 클클!”

세상 사악한 목소리가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을 배경으로 두고 음침하게 울려 퍼졌다.

‘찾았다.’

조구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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