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그라운드 제로 (4)
그래도 징벌자에게는 나름의 근성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떻게든 버텨내고 반격하기 위해 애썼다.
이를 꽉 깨물었고, 고통을 잊기 위해 노력했고, 강후에게 반격을 하기 위해 전력으로 몸을 돌렸다.
초인적인 힘이었다.
다른 몬스터였다면 진즉에 피를 토하고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매드 솔라키움을 어떻게든 지키겠다는 신념이 징벌자에게 괴력을 짜낼 수 있게 만들었다.
탁!
안타깝게도 징벌자의 투지는 강후가 튕긴 손가락 한 번에 수포로 돌아갔다.
혈화가 발동된 것이다.
그러자 강풍에 휘말린 종이 인형을 보듯, 징벌자의 몸이 쉴 새 없이 들썩인 뒤 앞으로 쓰러졌다.
콸콸 쏟아지는 피를 매개로 터져버린 혈화는 견딜 수 없는 대미지를 한 번에 선사했다.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티는 징벌자라고 한들,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는 압박을 버틸 수는 없었다.
“후.”
강후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혈화가 없었다면, 처치하기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녀석의 저항이 거셌다.
긴장하게 만들었달까.
오랜만에 승리에 대한 확신이 100%가 아닌, 90%, 아니 그 이하로 떨어질 뻔했다.
어쨌든 징벌자가 죽으면서, 더 이상 매드 솔라키움을 지킬 존재는 사라졌다.
도약을 활용해 암벽을 타고 오르는 한편, 중간중간 돌부리를 잡고 버티며 시간을 벌었다.
도약을 연속으로 계속 쓰면 과부하가 오기 쉬우므로, 약간의 텀을 두었던 것이다.
향상된 근력 덕분에 한 팔 혹은 두 팔로 몸 전체의 무게를 버텨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과거에 청명 수용소를 탈출할 당시의 자신이었다면 꿈도 꿀 수 없었을 버티기.
하지만 착실하게 근력 스탯을 올린 지금은 가벼운 팔굽혀펴기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이내 암벽의 중간에 도착한 강후가 드디어 매드 솔라키움과 마주했다.
같은 솔라키움 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외형이 달랐다.
그냥 솔라키움이 알로에와 유사한 외형을 가졌다면, 매드 솔라키움은 튤립과 가까웠다.
사전 지식 없이 두 녀석을 비교한다면, 전혀 동류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없을 터다.
쑤욱!
손에 살짝 힘을 준 것만으로도 매드 솔라키움이 쭉 뽑혔다.
“드디어.”
강후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30분 동안 강후를 완전하게 만들어주는 녀석이다. 모든 구속과 걱정에서 해방시켜 준다.
물론 30분이 지난 후에는 진정의 시간 동안 무리한 만큼 후폭풍이 오게 된다.
하지만 30분을 아무 걱정 없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컸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마나 수급에 대한 걱정을 없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즉, 매드 솔라키움이 있으면 30분 동안은 마나 무한인 셈이라는 얘기다. 스킬 무한과도 동일하다.
“이 작은 꽃 하나가 1억 원이라니……. 금괴보다도 더하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물론 팔 생각은 없다.
그리고 매드 솔라키움을 적극적으로 찾는 헌터가 썩 많은 편도 아니다.
매드 솔라키움보다 차라리 마약과 같은 약물이 훨씬 더 고통 경감 및 각성 효과가 뛰어나서다.
더 나아가 가격 면에서도 억 단위로 가는 매드 솔라키움보다 훨씬 ‘가성비’가 좋았다.
어쨌든 첫 번째 매드 솔라키움을 얻었다. 아직 얻어야 할 꽃이 5개가 더 남아 있는 상황.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응?”
그때,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죽은 징벌자의 몸에서 뭔가가 불쑥 솟아올랐다.
초록색 마석이었다.
1억 원의 가치다.
마석 벌이도 꽤 쏠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마석을 보는 일이 흔치 않은데, 음기가 강해진 그라운드 제로의 특성이 반영된 듯했다.
그만큼 헌터의 손길이 덜 닿은 지역에 와 있다는 뜻이다.
던전도 그렇고, 이런 외부 공간도 그렇고 공략이 덜 된 곳은 그만큼 보상이 좋기 때문이다.
검증된 통계이기도 하다.
“…….”
다만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쪽을 지켜보는 눈이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 시선의 주인이 나무 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그 과정에서 소리도 나지 않았고, 조용히 위치만 바꾸고 있을 뿐이었다.
강후에게 야시 능력이 없었다면, 누가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후가 딱히 대응하지 않은 것은 일정한 거리를 상대가 확실하게 유지하고 있어서였다.
적의가 있는 것 같진 않고, 호기심의 영역에 더 가까워 보였다. 지켜보기만 하는 느낌이랄까.
‘뭐, 때가 되면 알아서 하겠지.’
강후가 별생각 없이 다음 포인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필요하다면 본인이 먼저 모습을 드러낼 것이고, 싸울 거라면 거리를 좁혀오겠지.
그때 상황에 맞게 대응하면 그만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 * *
깊은 밤.
어둠이 짙게 깔린 그라운드 제로는 침묵과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이따금 몬스터나 헌터의 비명이 들렸지만, 그 소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몬스터가 죽었구나, 헌터가 죽었구나 하면서 남의 일처럼 생각하고 넘길 뿐이었다.
애초에 그것도 주변에 헌터가 있을 때 얘기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덕분에 강후를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던 ‘그녀’는 오롯이 그에게만 시선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정유리.
레벨은 250으로 그라운드 제로에서 산 지는 꽤 되는 헌터였다.
야생에서 사는 것에 대한 부담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어떤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범죄도시에서 사는 것보다 이게 훨씬 더 안전하다고 여겼다.
게다가 햇빛을 싫어하다 보니, 수풀과 나무가 울창한 그라운드 제로의 환경이 취향에도 맞았다.
강후를 조심스럽게 쫓는 것도 딱히 어렵지 않았다.
변형 능력을 가진 그녀는 자신의 몸을 인간 형태에서 검은 연기의 형태로 바꾸는 게 가능했다.
그러면 중력에 대한 압박을 걷어내고, 가볍게 공중을 이동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여차하면 공간 활용 능력을 이용해서 지름길을 열 수 있기도 했다.
‘저 사람은 지치지도 않는 걸까? 까다로운 징벌자를 상대로 빈틈도 전혀 없는 것 같고.’
강후는 매드 솔라키움을 얻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계속 징벌자와 싸웠다.
그 전투를 모두 지켜본 정유리는 강후의 실력이 놀라웠다.
징벌자는 누구에게나 까다롭다. 상대의 실력과 경지에 맞춰 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징벌자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허를 찌르는 기발한 전략이 필수였다.
아무리 실력 좋은 헌터라고 한들 응용할 수 있는 스킬에는 한계가 있는 법.
하지만 강후는 계속 상황에 변수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눈으로 확인한 스킬만 해도 벌써 10개가 족히 넘어갈 정도.
이 정도쯤 되려면 레벨은 무조건 200은 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 스킬이 1, 10, 20, 30, 40, 50, 100, 200에 맞춰 8개가 주어지고.
자기 직업군에 맞는 스킬을 추가로 3개쯤 얻었다손 치면 11개쯤 되기 때문이다.
지금 정유리가 보유한 스킬이 총 10개였다. 그러니 얼추 자신과 비슷한 레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공수전환이 깔끔해.’
정유리가 가장 눈여겨본 것은 강후의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다 보니 공격과 방어 전환이 자유롭고, 무엇보다 동선과 동작의 낭비가 없었다.
요 근래 그라운드 제로에서 본 헌터들 중에서 가장 수준급의 실력을 보유한 헌터였다.
‘도망 온 사람은 아닌 듯하네.’
정유리는 확신했다.
범죄를 저지르고 이곳으로 숨어들어온 범죄자가 아니라, 용무가 있어 찾아온 외부의 헌터라고.
그래서인지 더 관심이 갔다.
마치 내부 지도라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떻게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곳만 딱딱 찾는 걸까.
“…….”
정유리가 다시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기며, 거리를 두고 강후의 뒤를 쫓았다.
아직 동이 트려면 시간은 꽤 많이 남아 있었다.
* * *
30분 후.
‘이제 땀이 좀 흐르네.’
징벌자를 처치하고, 여섯 번째 매드 솔라키움까지 획득한 강후가 처음으로 바위에 앉아 쉬었다.
여기까지가 강후가 아는 매드 솔라키움의 포인트다.
이후부터는 미지의 영역이다.
찾으러 다닌다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그라운드 제로 전체를 뒤져야 하니 쉬운 작업은 아니다.
매드 솔라키움 꽃 6송이를 보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시간으로 보면 3시간, 한 번 전투를 30분으로 보면, 6번의 전투를 부담 없게 해 줄 녀석이다.
앞으로 전략적으로 써먹을 요소가 많을 것이다. 변수 창출에도 엄청 도움이 될 테고 말이다.
‘레벨 42.’
레벨도 착실하게 잘 올렸다.
징벌자 여섯 명과 자잘한 몬스터 몇을 처리했을 뿐인데, 확실히 주는 경험치가 컸다.
단체로 왔거나, 혹은 지금 같이 음기가 강할 때 오지 않았으면 레벨 41을 겨우 넘겼을 것이다.
솔로 플레이의 강점과 시기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는 강후였다.
스윽.
강후가 높이 솟아 있는 나무 한 그루의 꼭대기를 흘깃 쳐다봤다.
진짜 오래 지켜보고 있다.
중간에 모습을 드러내거나.
혹은 흥미를 잃고 떠날 줄 알았는데, 시선의 주인은 꾸준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장난 좀 쳐볼까?’
강후가 곧바로 환영술과 그림자 걸음을 전개하며, 사방으로 자신의 분신들을 흩뿌렸다.
그러자 쳐다보던 시선도 한 곳에 중심을 두지 못하고, 여러 갈래로 헤매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살피고 있는 만큼 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강후의 외형을 쏙 빼닮은 형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으니.
그 사이.
푹! 푹!
나무에 단검을 힘껏 박아 넣으며, 순식간에 나무를 쭉쭉 타면서 위까지 올라왔다.
도약과 가속을 활용해 움직이다 보니,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서 40m 나무의 끝에 닿았다.
“어이.”
“아앗!”
“뭘 그렇게 놀라?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그, 그건 아니지만!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처음부터. 적의는 없는 것 같아 대응만 안 했을 뿐이야. 그런데 너무 오래 지켜보는 듯한데?”
“암살자인 건 알겠는데, 이렇게 갑자기 나무를 타고 올라올 수도 있는 거야?”
“쓸데없이 호기심이 많네.”
강후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래를 내려보면, 아찔하게 느껴질 만큼 높은 나무 위였지만.
강후도 그렇고, 정유리도 그렇고 걱정 없이 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강후의 눈빛이 반짝였다.
떠오르는 얼굴과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작에서의 묘사와 일치하는 외모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선이 확실하게 느껴지는 얼굴.
특색 있게 스타일을 연출한 올림머리와 오드 아이로 전혀 색깔이 다른 두 눈동자.
옆에서 보면 정말 종이라도 베어버릴 것처럼 오뚝한 콧날에 제법 두툼한 입술까지.
그리고 몸에서 아카시아 향취가 짙게 풍기는 냄새까지. 원작 속에 이와 일치하는 인물이 있었다.
정유리.
그라운드 제로에 살고 있는 여성 헌터로 정화 길드를 극도로 혐오하는 캐릭터다.
안영호보다 감정의 골이 더 깊은데, 정화 길드 소속의 헌터에게 배신을 당한 전적이 있어서다.
사연을 말하자면 길다.
핵심만 말하자면, 훗날 정화 길드의 핵심 인물인 채관형을 죽이기 위해 노력하는 캐릭터다. 그와는 엮인 악연이 깊기에 뿌리 깊은 원망이 사라질 일이 없다.
‘인연이 이렇게도 엮이는군.’
강후가 참으로 묘한 운명과 인연의 진행에 고개를 끄덕이며, 우연을 받아들였다.
원래 사람 사이 만남이라는 것이 그렇다. 항상 필연은 아니다.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중요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뜻밖의 우연도 있는 것이다.
정화 길드의 반대에서 판을 짜고자 마음 먹은 강후에게 있어서, 정유리는 꽤 중요한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