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자 다 해 먹는 천재 암살자-38화 (38/304)

38화 그라운드 제로 (3)

물론 대비를 했기에 이득을 보는 장사가 된 것이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고 앞을 지나갔다면, 목숨이라는 가장 큰 자산을 잃었겠지.

이래서 그라운드 제로는 모험을 좋아하는 헌터도 어지간해서는 잘 오려고 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종잡을 수 없어서다.

그러니 내일이 없는 범죄자들만 득실거리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만이 그라운드 제로를 누비고 다닐 수 있다.

한편 주변을 둘러보니, 슬슬 백골이 보이기 시작했다.

돌연변이 해바라기가 아니더라도 헌터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는 요소는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의 무정함을 느낄 수 있는 증거가 백골에 남아 있었다.

원래의 주인이 착용하고 있었을 아이템이나 지갑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누군가가 아이템만 챙기고, 수습 없이 홀연히 떠났다는 뜻이다.

물론 그런 일이 비일비재한 곳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았다.

거대한 공동묘지를 연상케 하는 백골의 끝없는 향연을 보며, 좀 더 안으로 들어갔다.

5번 지역까지는 아직 1km 정도가 더 남은 상태였다.

그라운드 제로가 워낙에 넓다 보니, 하나의 구역을 빠져나가는 것만 해도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제초나 벌목 작업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잘 자란 수풀이 많은 것도 문제였다.

어쨌든 5번 지역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점까지 쭉 들어왔을 때.

강후는 뭔가 이상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지?’

바위 근처에 헌터의 시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살짝 부패가 진행된 것이 죽은 것은 틀림없었다.

한데 붉은 빛이 감도는 단검을 손에 움켜쥔 채로 바위 근처에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변에 제법 보이는 백골은 옷가지조차 없어졌을 만큼, 모든 것을 뜯긴 상태인데.

유독 저 시체만 상태가 양호했다.

시간은 며칠 지난 것이 틀림없는데, 손을 댄 흔적이 없다.

여기서 옳다구나 하고 시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면 형편없는 하수다.

그렇다고 겁을 잔뜩 먹고 무시하고 지나간다면, 중수다.

현명하지만 너무 무난한 선택이다.

‘검은 인도자군.’

강후는 바로 본질을 꿰뚫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죽어 있는 시체의 불룩한 옷 안쪽에서 미량이지만 마나의 흔적이 느껴졌다.

다른 헌터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마나 추적 능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함정이다.

죽은 헌터가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다른 헌터를 유혹하는 설계다.

그리고 이에 이끌려 가까이 접근한 헌터를 순식간에 덮쳐, 그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식이다.

“포기하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향을 정반대로 돌렸다.

누가 봐도 부담을 느끼고, 현장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는 영락없는 ‘겁쟁이’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굵은 나무를 끼고 돌면서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꾸려던 그때.

사아아!

그림자 걸음을 썼다.

곧바로 강후에게서 분화되어 나온 그림자가 크게 우회하는 경로를 그리며 시체에게 달려갔다.

파앗!

타이밍을 정확하게 맞춘 강후가 그림자와 자신의 위치를 바꿨다.

순식간에 나무 뒤쪽에서 시체의 앞으로 이동한 것이다.

완벽하게 허를 찌르는 움직임이었다.

타앗!

바로 시체가 들고 있던 단검을 낚아챘다.

그리고 또 한 번 그림자 걸음을 쓰며, 추진력 있게 먼저 달려나간 그림자와 위치를 또 바꿨다.

“크윽.”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림자 걸음 스킬은 마나도 마나지만, 몸에 과부하가 걸리는 정도가 보유 스킬 중에 가장 높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기 전까지 몸과 정신이 버텨줄 수 있는 임계점이 존재한다.

그 임계점을 넘기는 순간에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는데, 그림자 걸음의 과부하 수치가 가장 높다.

두 번을 연속으로 사용하면 바로 임계점을 돌파하는 것이다. 마나 과민증 상태에 바로 빠진다.

물론 두 번이나 그림자 걸음을 연속으로 쓴 덕분에 방금 같은 재치를 발휘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말이다.

키헤에엑! 키헤에엑!

약이 바짝 오른 검은 인도자가 악마의 형상과 비슷한 외형을 만들어내며 강후를 뒤쫓았다.

하지만 체력과 정신력으로 버텨내면서, 이동 스킬을 연달아 활용한 강후를 따라잡진 못했다.

결국, 검은 인도자는 성난 표정으로 굵은 나무 하나를 휘감아 말려 죽이고는 추격을 포기했다.

안전해진 것을 확인한 뒤.

시체로부터 챙긴 단검의 옵션을 확인했다.

【학살의 경계 - 무기】

【등급 : 4등급】

【근력 +100】

【탐식자의 추적 능력을 부여받습니다. 해당 무기에 피해를 입은 상대는 기척을 감춰도 1분간, 탐식자의 흔적이 남습니다.】

“좋네.”

쓸만한 무기다.

물론 영원히 쓸 ‘졸업’ 무기는 아니고, 3등급 단검 아이템을 사기 전까지의 징검다리용이다.

지금 쓰고 있는 창공의 환희보다는 훨씬 좋은 옵션과 스탯, 등급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나중에 3등급 단검을 살 수 있는 견적이 나오면, 창공의 환희와 학살의 경계를 팔면 될 듯했다.

어쨌든 기연 아닌 기연이 됐다.

4등급 무기도 값어치로 따지면 10억 원은 족히 되기 때문이다.

“음. 다시 돌아가 볼까.”

강후가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 되는 단검을 들고 다녔을 정도면 실력이 제법 되는 헌터였을 것이다.

범죄자였을 수도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시체의 위치를 파악해 두고 유품을 챙겨도 괜찮을 듯했다.

헌터 라이센스나 스마트폰, 신분증 같은 것들 말이다.

어쩌면 헌터 공식 커뮤니티에서 가족 또는 지인들이 찾고 있는 실종자일 수도 있다.

범죄자에 현상금이 걸리듯, 실종자에게도 포상금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 자리에 검은 인도자는 없었다.

미끼로 쓸 아이템을 강후가 가져갔으니, 더 이상 시체를 이용해 먹을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

그래서 강후는 손쉽게 시체로부터 유품들을 챙길 수 있었다.

“박민성. 아는 이름은 아닌데.”

죽은 헌터의 본명을 확인했다.

시체를 제외한 나머지를 수습했으니, 나중에 서울로 돌아가는 대로 한 번 확인해 볼 생각이다.

* * *

이동하는 내내, 수시로 환영술과 그림자 걸음을 번갈아 쓰며 변수를 대비했다.

어둠을 벗 삼아 모습을 숨기고 있는 몬스터가 그라운드 제로에는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몬스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다.

하지만 몬스터들이 똑똑한 것은 아니라, 강후의 환영이나 그림자에 낚여 달려드는 녀석이 많았다.

덕분에 강후는 이동하는 동안에 착실하게 경험치를 획득하고 있었다.

내심 첫 번째 매드 솔라키움을 찾기 전까지 레벨 40을 찍길 바랐는데, 바람이 현실이 됐다.

딱 해당 지역을 코앞에 둔 시점에 레벨 40을 달성한 것이다.

【신속 회피】

【스킬 숙련도 : Lv. Max】

【동서남북의 방향으로 최대 5m 거리를 회피할 수 있습니다.】

【숙련도 최대 효과로 ‘신속’ 효과가 적용되었으므로 즉각적인 회피 기동이 가능합니다.】

【회피 기동 중에는 저항의 장막 효과가 활성화됩니다. 스킬에 대한 회피율이 상승합니다.】

‘숙련도 최대 특전은 볼 때마다 새롭네. 기본 스킬이랑 효율이 달라도 너무 다르잖아.’

강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일단 이름부터 달라졌다.

원래 암살자 클래스의 레벨 40 기본 스킬 이름은 ‘회피’다.

하지만 숙련도 최대 효과를 얻으면서 ‘신속 회피’가 된 것이다.

가속 찌르기 스킬이 출혈 찌르기 스킬로 업그레이드되면서 바뀌었듯이 말이다.

게다가 회피 기동이 가능한 거리도 1m에서 5m로 대폭 향상되었고.

더 나아가 회피 중에 스킬에 대한 저항성을 높이는 회피율 특전 역시 새롭게 생겨났다.

회피율이 높아진다는 것은 스킬이 빗나가거나 스치듯이 비껴갈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암살자를 더 암살자답게 만들어주는 스킬들.

만족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위치가 참.”

매드 솔라키움 꽃이 피어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강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앞서 환해지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불만 가득한 표정이 되어있었다.

30m는 족히 넘는 암벽 한가운데에 자란 매드 솔라키움 꽃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작에서 설계된 대로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근처에는 이를 지키는 호위자가 존재했다.

정식 명칭은 ‘징벌자’.

임의의 타입으로 징벌자의 성향이 결정되는데, 이곳을 지키는 타입은 암살자였다.

스아아아.

이내 징벌자의 몸에 붉은 기운이 감돌더니,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기운이 한층 강해졌다.

징벌자의 특징은 주변에 존재하는 헌터의 구성과 레벨에 따라 전력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물론 매드 솔라키움으로부터 반경 50m 안에서만 적용되므로, 특수 조건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껄끄러울 건 없었다.

지금껏 강후가 공략한 모든 던전이 늘 자신보다 수준이 두 배, 세 배는 높은 곳이었으니까.

징벌자도 그만큼 강해지겠지만, 예측 가능한 범주 안에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다.

파앗!

역시나 매드 솔라키움을 지키는 수호자답게 먼저 강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암살자 클래스의 기본 신념이기도 한, 선수필승에 충실한 움직임이었다.

【신속 회피】

강후가 바로 신속 회피를 썼다.

지금보다 이 스킬이 더 어울릴 만한 상황도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에 주황빛의 선이 그어질 만큼, 징벌자의 공격은 날카로웠지만.

후웅!

징벌자의 공격은 자리를 재빠르게 벗어난 강후의 잔상만을 훑고 지나갔다.

예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기운도 순간적으로 향상된 회피율에 맞물려 흐트러졌다.

암살자 대 암살자 전투의 구도는 상당히 박진감 넘치게 흘러간다.

공격이 실패하는 순간, 실패자에게는 역공을 당할 수밖에 없는 지옥이 펼쳐진다.

수 싸움이 매우 중요한데 지금은 징벌자의 첫 승부수가 완전히 빗나간 상황.

그래서 강후가 지체 없이 가속에 도약을 섞으며, 징벌자의 정면에서 쇄도했다.

달리 피해 볼 겨를도 없을, 완전히 코너에 몰린 상황에서 맞이하게 되는 역공이었다.

강후는 과부하가 유발된 김에 아예 스킬 하나를 더 이어붙였다.

바로 그림자 걸음.

강후의 등 뒤에서 뻗어져 나온 그림자들은 크게 원을 그리며 징벌자에게로 향했고.

본인은 정직하게 징벌자의 시야를 한 지점에 집중시키며, 그대로 단검을 뻗었다.

그때.

스릉!

품속에서 단검 하나를 더 꺼낸 징벌자가 양 단검을 교차시켜 허공에 X자를 만들어냈다.

‘역시.’

놈은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공격 실패와 맞물려서 이어진 강후의 역공을 또 한 번의 역공으로 반전시키려 했다.

과연 이름에 걸맞은 센스 있는 대응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쇄도했다면, 여기서 강후의 인생도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사아악!

X자의 기운이 전방으로 방출되는 그 시점에 강후의 위치는 징벌자의 뒤로 바뀌어 있었다.

허를 찌르는 위치 전환이었다.

이것까진 징벌자도 예상하지 못한 듯, 강후의 위치를 바로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 순간.

“여기야, 친구.”

푹! 푹푹! 푸욱! 푸우욱!

완벽하게 그의 뒤에 자리를 잡은 강후가 징벌자의 목, 어깨, 뒤통수를 가릴 것 없이 단검을 꽂아대기 시작했다.

지옥은…….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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