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그라운드 제로 (2)
안영호에게 적당히 답장을 보냈다.
때가 되면 연락할 테니, 잘 지내고 있도록 하라는 뻔하지만 적당히 기대감을 주는 멘트였다.
‘도착하면 밤이겠군.’
강후가 슬슬 서쪽 하늘 너머로 사라지려 하는 오후의 해를 보았다.
대다수의 헌터가 밤에 이동하는 것을 꺼리지만 강후는 아니었다.
【야시(夜視)】
가진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밤이 좋았다.
시각이라는 정보에 의존하는 것은 비단 헌터 뿐은 아니니까. 몬스터도 마찬가지다.
이제 그라운드 제로로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바짝 긴장하고 돌아다녀야 한다.
이곳은 야생이다.
온갖 변수와 돌연변이가 가득한 곳이기도 하고.
잠깐의 방심과 잘못된 확신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는 곳이기도 하다.
뚜둑. 뚜둑.
강후가 미리 손목과 목 근육을 풀어가며, 언제든 전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예열하기 시작했다.
현장에 도착하면 이리 몸을 풀 시간도 없을 것이다.
경의중앙선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는 동안, 부지런히 몸의 감각을 끌어올릴 생각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는 정말 오감 하나하나가 중요하다.
* * *
2시간 후.
임진강역에서 내려 한참을 올라온 강후가 그라운드 제로에 도착했다.
정확하게는 경계 철조망과 출입 검문소가 위치한 곳으로부터 1km 떨어진 위치였다.
“개판이군.”
분위기는 예상대로 나빴다.
일단 출입 검문은 헌터 치안청이 아니라, 치안청의 위임을 받은 길드에서 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 길드다.
꽤 거창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딱 출입 검문소의 철문을 열고 닫는 역할만 하는 녀석들이었다.
인근에 만들어진 유흥과 쾌락의 거리, 그곳에서 벌어진 모든 일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온통 홍등가와 유흥주점 일색이기에 다툼과 싸움이 잦지만, 개입하는 인력은 전혀 없었다.
살인이 벌어져도 시체와 핏자국을 치우고 끝낼 뿐이다.
헌터 치안청의 치안관은 당연히 올 일이 없고, 새로운 세계 길드의 헌터도 관심이 없다.
깨진 가로등.
마음대로 버려진 오래된 차들.
제멋대로 쌓인 쓰레기봉투의 거대한 산까지.
슬럼화된 이곳에는 꿈도 희망도 미래도 없어 보였다.
심지어 오래된, 버려진 건물 안에는 서울에서 쫓겨난 노숙자들이 저마다 자리를 깔고 살았다.
누가 주인인지 다투는 것이 무의미하거늘, 강후가 온 시점에 이미 칼부림이 나고 있었다.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려다가, 결국 칼로 배를 가르고 만 것이다.
“…….”
한편 누가 봐도 뻔한 홍등가를 앞에 둔 강후는 귀찮은 호객에 시달리고 싶지 않아, 일부러 거리를 우회해서 돌아갔다.
여기선 홍등가 앞이 주요 길목이라 그런지, 한 블록 옆으로 오니 바로 주변이 어두워졌다.
그때.
으슥한 골목 안쪽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있던 헌터 다섯과 눈이 마주쳤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이곳에 일반인이 올 일은 없기에, 다섯은 헌터라고 확신했다.
“어이. 잠깐 멈추지?”
강후가 조용히 무시하고 지나가려고 했을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을 건다는 것은 무조건 시비를 걸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외는 하나 뿐이다.
홍등가에서 호객을 하는 ‘언니’들이 손님을 부를 때다.
그 외에 헌터에게 관심을 갖는 일은 이 지역의 무법성을 빌미 삼아 나쁜 짓거리를 할 때뿐.
“멈추라고 했잖아, 새끼야.”
강후의 무시에 바로 자극을 받은 헌터가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갈 길이나 갔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거기서 한마디씩 더 할 때마다 한 놈씩 죽는다. 갈 길 가자. 좋은 말 할 때.”
강후가 짧고 굵직한 경고를 날리고 다시 발걸음을 앞으로 내딛으려 할 때.
“너는 뭔데, 깝…….”
마지막 인내를 날려버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그 순간에 가속과 도약을 연속으로 활용한 강후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목소리의 주인공, 그 녀석의 등 뒤였다.
마지막에는 횡 이동까지 썼기 때문이다.
스아아악!
“끅!”
뒤에서 목 앞으로 단검을 가져다 댄 강후가 앞뒤 잴 것 없이 목을 그어버렸다.
방어구 아이템의 보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하기에 어떻게 버텨낼 재간도 없었다.
확실히 목숨을 끊기 위해 혈화를 연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자 이미 굵은 선이 그어져 있던 목에서 연속 폭발이 일어났다.
“씨, 씨발……. 뭐야, 이거.”
남은 넷이 모두 경악했다.
목을 한 번 긋는 것으로 머리까지 분리하는 연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찌저찌 버텨볼 수 있다는 계산이 아니라, 스치면 죽는다고 생각하니 공포가 엄습했다.
“으아아!”
그동안 입으로 열심히 털어대던 전우애를 찾아볼 겨를도 없이 나머지 넷은 모두 도망갔다.
“…….”
강후가 한심한 표정으로 그들의 뒷모습을 보고는 죽은 헌터에게서 아이템을 챙겼다.
쓸만한 아이템은 없지만, 전부 수합해서 팔면 1억 원은 챙길 수 있을 듯했다.
가성비 좋은 저가형 아이템만 잔뜩 두르고 있는 시답잖은 헌터라서 그런지 별 감흥은 없었다.
솔라키움 20줄기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 생겼구나 하고 말 뿐이었다.
* * *
출입 검문소 앞.
강후가 입장 신청을 하고, 명부에 가명을 적었다.
아무 이름이나 써도 되는 무의미한 절차였다.
딱 한 가지만 확실하게 하는 절차가 있는데, 바로 레벨 스캔 절차였다.
“에헤이, 풋내기네.”
관리자가 스캔이 끝난 강후의 레벨 정보를 보고는 피식 웃으며 휙 쳐다보았다.
초면에 풋내기라고 무시하는 것부터가 이미 강후를 한참 깔보는 눈치였다.
그래서일까.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꼬장을 부렸다.
“지금은 입장 대기가 잔뜩 밀려 있어서 2일 정도는 대기해야 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통성명을 한 적도 없는데, 대놓고 말부터 놓는다.
딱히 욱하는 감정이 올라오지는 않았다.
하찮은 벌레가 앞에서 앵앵거려봤자,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시하는 느낌이랄까?
그럴 가치도 없다고 여기니, 지껄이는 말이 아예 들리지 않았다.
주변에 입장 대기 중인 사람도 없고, 누가 봐도 뻔히 들어갈 여유가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관리자가 저런 개소리를 한다는 것은 보통 주머니 사정이 아쉬울 때 나오는 얘기다.
강후가 백팩에서 꺼낸 5만 원 뭉치 하나를 그에게 휙 던졌다.
100장. 500만 원이다.
“오호?”
“열어.”
짧게 요구하는 바를 말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관리자가 바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태세를 전환했다.
“어이쿠. 형님. 명단을 보니 마침 오늘 안 들어간 헌터가 하나 있네요. 바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차라리 돈에 솔직해서 보기에는 좋았다.
이상하게 꼬장만 부리는 녀석이었으면, 앞서 목이 날아간 녀석과 같은 신세가 됐을 테니까.
본인은 알까.
처신을 잘한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것을.
물론 모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저러다가 호되게 누군가에게 당하겠지.
다행히 오늘은 아닐 듯했다.
안으로 들어간 강후는 정신없이 움직이기보다는 높은 나무 하나를 선택해서는 그 위로 쭉 올라갔다.
해가 완전히 저문 밤이라 주변을 밝히는 조명은 하나도 없었다.
그라운드 제로 내부에는 별도의 가로등이나 조명 시설이 일체 갖춰져 있지 않아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원래 있었지만, 고장 나고 소모된 이후로 고치고 교체하지 않은 것이다.
멀리까지 살피니, 손전등을 활용해 이동하는 것으로 보이는 헌터의 움직임이 보였다.
당연한 선택이기는 하지만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가장 위험한 선택이기도 하다.
저 불빛이 수많은 몬스터와 짐승, 그리고 다른 헌터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흠.”
강후가 바로 움직이지 않은 이유는 하나.
그라운드 제로 안에서 유일하게 신경이 많이 쓰이는 존재가 하나 있어서였다.
몬스터, 검은 인도자.
다른 별칭으로는 사신으로도 불린다.
일종의 망령 집합체로 죽이거나 벨 수 없는, 영혼에 가까운 특성을 가진 녀석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가깝게 접근하더라도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검은색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밤에는 더욱 알아차리고 보기가 힘들었다.
무서운 점은 몸 전체가 검은 인도자에게 휘말리면 시각을 잃어버리고.
그다음은 정신 착란 증세를 일으켜 자살에 이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스스로 인지하기도 전에 정신을 통제당하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는다.
눈 떠보니 저승이 되는 셈이다.
그때.
야시 능력으로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던 강후에게 뭔가 이상한 모습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손전등으로 길을 밝히며 나아가던 헌터 하나가 갑자기 방향을 직각으로 튼 것이다.
그러더니 바로 앞에 있는 뾰족한 돌부리에 몸을 날려서는 그대로 이마를 들이박고 쓰러졌다.
몸 한 번 팔딱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그 상태로 즉사한 것이 틀림없었다.
‘갈까.’
강후가 나무에서 내려왔다.
검은 인도자들은 영역이 확실해서, 다른 동족의 영역을 침범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침입자 하나를 죽음으로 인도하고 나면, 별도의 냉각기를 갖는다.
마치 살인마가 살인 후에 휴식기를 가지듯이 말이다.
앞서 죽은 헌터의 ‘희생’이 강후에게는 이동에 대한 확신을 준 셈이다.
촤르륵.
땅으로 내려온 강후가 형광 처리가 된 내부 지도를 펼쳤다.
GZ-5. 11. 13. 19. 24. 45.
핵심 포인트가 보인다.
이렇게 여섯 구역에는 매드 솔라키움이 있는 것이 확실하다.
원작자로 살았던 시절에 강후가 로또 번호로 자주 마킹했던 번호이기 때문이다.
그 번호를 따서, 매드 솔라키움이 나오는 구역 번호를 정했었다.
초입에서 가까운 순서대로 숫자가 붙기에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는 구역은 5번 구역이다.
부지런히 움직일 시간이다.
계속 이동했다.
밤인 데다가 요즘 그라운드 제로가 ‘경계기’에 돌입해서인지 헌터가 더 안 보였다.
유독 강해진 음기도 느꼈다. 정말 고개만 돌려도 바로 귀신과 눈이 마주칠 것 같은 느낌이다.
경계기는 안정기에 비해서 몬스터들의 능력이 좀 더 강화되는 시기이기에 위험하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경험치와 보상이 훨씬 더 짭짤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인 셈.
강후는 오히려 지금 시기가 마음에 들었다.
대응만 잘하면 평소보다 2배의 이득을 볼 수 있다.
그때.
“음.”
누가 봐도 부자연스럽게 꽃잎을 오므리고 있는 해바라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항상 활짝 펴있어야 할 해바라기꽃의 비정상적인 모습이다.
그냥 꽃이 아니다. 몬스터화가 된 꽃이다.
언제든 헌터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라는 얘기다.
강후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다가, 해바라기와 일직선이 되는 지점에서 확 몸을 뒤로 날렸다.
그러자 오므리고 있던 해바라기 꽃잎이 활짝 펴지며, 안에서 연녹색의 액체가 쏟아져 나왔다.
치이이익!
강산성의 액체였다.
닿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녹았다. 바위고, 수풀이고 할 것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말 야생이군.”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동안 착실하게 모아둔 액체를 상실한 해바라기를 단칼에 베어버렸다.
끼잉…….
허무한 죽음.
돌연변이 해바라기는 강후에게 푸짐한 경험치와 파란색 마석 하나를 제공하고는 생을 마감했다.
천만 원 가치의 마석!
꽃 하나를 벤 노력으로 보면 이만큼 수지맞는 장사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