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대참수 (1)
* * *
정산은 순식간에 끝났다.
이예린이 굴릴 수 있는 돈의 규모는 강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컸다.
그래서 의뢰 수당에 아이템 판매 가격을 정산받기까지 불과 5분의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잔고 49억 원.
언뜻 보면 꽤 많은 돈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4등급 아이템은 4개를 사면 없어질 돈이고, 3등급 아이템은 살 수도 없는 돈이라서다.
괜히 헌터의 세계가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중위, 상위, 최상위로 올라갈수록 이를 구성하는 경제 관념이 대격변에 가까울 만큼 달라진다.
장시환 같은 최상위의 헌터는 4등급 이하 아이템은 던전에서 얻어도 아예 관심도 갖지 않는다.
‘잡템’이라고 부른다.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하, 이건 정말…….”
앞서 몇 번이고 감탄을 했지만, 이예린은 아직도 자신에게 공태수의 왼팔이 있는 게 신기했다.
그녀도 공태수를 상대로 호각세로 싸우면 싸웠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신체를 훼손할 수는 없었다.
예측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레벨 200대 헌터라는 것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만났을 때 강후의 레벨을 스캔한 적이 있는 이예린이다.
그렇기에 강후의 레벨이 아무리 높게 잡아도 70을 넘기기 힘들다는 것이 그녀의 예상이었다.
레벨 70의 헌터가 그 세 배를 훌쩍 넘기는 헌터를 상대로 부상을 입힌다?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지금껏 강후가 해 온 일들이 불가능하다 여겼던 일들의 연속이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조금씩 원작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
한편 강후는 자신을 향해 아낌없이 반짝이는 눈빛을 보내는 이예린을 보며 생각했다.
사실 원작에서 이예린과 신강후와의 관계는 딱히 이렇게 가깝거나 돈독하지 않았다.
그녀가 훗날 열세 개의 별에 대적할 실력자로 성장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신강후와의 교류가 많진 않았다. 그저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보이지 않게 응원하는 정도.
그런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영입 제안을 할 정도로 이예린의 관심을 듬뿍 받고 있다.
‘원작의 메인스트림은 장시환에 대한 이야기야. 곁가지는 적당히 건드려도 문제없겠지.’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철저하게 주인공인 장시환 위주로 쓰인 원작은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백하게 구성했다.
공태수에 관련된 이야기도 얼핏 지나가는 소식처럼 듣게 된 내용이 원작 언급의 전부다.
【뉴스를 본 장시환이 웃었다.
“울산은 원래부터 저랬지. 그러게 공태수 같은 미친놈은 왜 건드려 가지고 사서 고생을 해?”
어차피 서울에서 벌어진 사고가 아닌 만큼, 뉴스 기사는 마치 휘발성 있는 알코올처럼 머릿속에서 금방 사라졌다.】
바로 이 내용이다.
아마 이번에도 장시환은 뉴스를 통해 울산에서 벌어진 일련의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다만 조금 다른 내용을 읊고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진 않을 듯했다.
‘메인스트림만 조심해서 건드리자. 정화 길드의 관심은 늦게 받을수록 좋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갈무리했을 때.
이예린이 새로이 가져온 의뢰 제안서를 내밀었다.
테두리에 금테 처리까지 되어있는 것이 의뢰의 격이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먼저 운을 뗐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걸 좋아하시죠?”
“물론입니다.”
“암살 의뢰예요. 타깃의 이름은 조구빈. 살인마예요. 그것도 아동 유괴 살인범이죠.”
“…….”
정의 구현에 대한 거창한 신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으로서 넘지 말아야 할 선에 대한 생각은 있는 강후였다. 최소한의 도리 말이다.
하지만 아동 유괴로도 모자라서 살인이라니. 단어의 조합이 끔찍하게 느껴져, 인상이 찌푸려졌다.
“의뢰를 주신 분은 희생자의 아버지예요. 원하는 건 딸과 자신의 복수죠. 조구빈의 죽음.”
“위치 파악은?”
“최종적으로 확인된 것이 그라운드 제로에요. 이후 나온 기록은 없다고 해요.”
“비겁한 놈.”
강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 그라운드 제로에는 범죄자들이 많이 산다.
워낙에 위험한 곳이다 보니, 헌터 치안청에서도 수색하러 가기를 꺼린다. 변수가 너무 많아서다.
“성공 보수는 10억 원. 딸의 유품이나 혹은 시신이라도 회수하면, 추가 협의 보상금이 있어요.”
“금액대는?”
“최소 10억 원 이상은 될 거예요. 여기에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더 담기게 되겠죠.”
“추가 사항은 없습니까?”
“보상 지급 전에 전제되어야 할 조건이 있어요. 조구빈이 죽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는 겁니다.”
“영상 통화 같은?”
“그렇죠. 녹화된 영상이 아니라 실시간 영상을 원하는 거죠.”
“이를 악물고 딸의 복수를 위해 하루하루를 참고 있을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 같네요.”
“그 아픔을 얼마나 가늠할 수 있겠어요. 단지 가슴이 아플 뿐.”
이예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후 역시 생각이 많아졌다.
단순히 악인 단죄의 느낌이 아닌, 악마를 처단하기 위한 의로운 여정처럼 느껴졌다.
‘조구빈을 쫓으면, 자연스럽게 매드 솔라키움을 얻을 수 있는 그림도 나올 것 같네.’
어차피 매드 솔라키움도 필요했던 차였다.
그라운드 제로에 한 번은 다녀올 생각이었으니, 이참에 볼 일을 다 보고 와도 될 듯했다.
게다가 조구빈이 어디 숨어 있을지, 얼추 예상되는 장소도 있었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공간을 설계한 것이 바로 원작자인 자신이 아니던가. 역추적은 어렵지 않다.
* * *
그 무렵.
“꿈 한 번 기분 나쁘네.”
악몽을 꾸는 바람에 잠에서 깬 장시환이 대충 큰 컵에 담은 레드 와인을 쭉 들이켰다.
거칠게 들이킨 레드 와인이 피처럼 입가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요 근래 자꾸 악몽을 꾸고 있는 장시환이었다.
누군지 얼굴을 볼 수는 없는데, 자꾸 자신을 찾아와 다짜고짜 공격을 하는 것이다.
무서운 것은 그 녀석이 워낙에 신출귀몰해서 움직임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앞인 줄 알고 보면 뒤에 있고, 아래인가 싶으면 위에 있는 그런 식이었다. 귀신 같은 느낌이랄까?
TV를 켰다.
일반 채널은 다 지우고 헌터에 관련된 채널만 따로 추려 띄워놓는 것이 장시환의 오래된 습관.
오늘도 항상 그랬듯이 국내와 세계의 헌터 소식을 훑었다. 정보 업데이트는 필수다.
그때, 국내 소식 중 관심이 가는 이야기가 있어 시선을 집중했다.
울산에서 붉은 피 조직과 그 대장인 공태수를 노린 일전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언제 한 번 날 잡고 사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했는데. 공태수 놈이 그걸 또 노렸네?”
흐름은 예상대로였다.
공태수가 설계한 큰 판에 꼬인 용병들이 대거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태수가 왼팔을 잃었어?”
정작 판을 짠 공태수도 큰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이었다.
마법사에게 있어 정교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양팔, 양손의 유무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공태수가 주로 쓰는 것으로 알려진 왼팔을 잃었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다.
게다가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간 헌터의 정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뒷모습을, 그것도 꽤 낮은 프레임의 오래된 CCTV 영상으로 확보한 것이 전부였다.
이래서는 뒤통수만 겨우 확인하는 꼴인데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위에 다 지켜보는 놈이 있었네.”
장시환이 피식 웃었다.
어떤 녀석인지는 몰라도 참 대단한 일을 해냈다.
불과 2초 만에 공태수의 왼팔을 잘라내고 유유히 전리품으로 챙겨갈 수 있었던 헌터는 누구일까.
워낙 이슈가 많은 세계이다 보니, 어지간한 소식은 금방 잊어버리기 마련이지만.
이 소식만큼은 후속 내용을 주의 깊게 살피고 싶어졌다. 범상치 않은 놈 같았기 때문이다.
장시환이 바로 전화를 걸었다.
정화 길드의 정보 전략팀.
헌터 치안청의 내부 데이터 베이스까지 활용하는, 수집력이 뛰어난 정보 팀이었다.
그들이라면 아주 작은 가십거리라도 꼼꼼하게 찾아내 보고를 올릴 것이다.
- 네, 말씀하십시오.
“울산 공태수 사건. 녀석의 왼팔을 잘라갔다는 헌터에 대한 모든 소식을 내게 수합 해서 올려.”
- 알겠습니다.
바로 지시가 내려졌다.
이제 저 헌터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 장시환의 책상에는 그에 관련된 서류가 쌓여갈 것이다.
* * *
조구빈을 찾기에 앞서, 강후는 먼저 수원역부터 들렀다.
대참수 스킬을 학습하기 위해 필요한 던전이 온누리 길드의 소유였기 때문이다.
거점은 바로 수원역. 그래서 이예린을 평택역에서 만나고 올라오는 길에 수원역에 들른 상태였다.
‘분위기가 다르네.’
서울만큼은 아니지만, 수원역 일대는 치안이 꽤 안정되어 있었다.
역 앞에서는 축제 같은 것도 하고 있고, 온누리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 캠페인도 하고 있었다.
수원 - 클린 헌터 캠페인.
이름이 좀 거창하긴 한데, 헌터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원역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수원역 일대를 꽉 잡고 있는 온누리 길드의 영향력 덕분인지, 확실히 역의 분위기는 좋았다.
게다가 다수의 중소 규모 길드들이 자유롭게 길드원을 모집하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다른 지역이었으면 진즉에 칼부림이 났을 현장이다. 평화적인 경쟁이 허용되지 않아서다.
강후가 바로 온누리 길드의 전용 빌딩을 찾았다.
역 앞에 보란 듯이 세워져 있는 15층 빌딩이 바로 ‘온누리 빌딩’이었다.
빌딩 안으로 이동한 뒤.
“던전 라이센스 대여 관련해서 담당자와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로비에서 담당자를 찾았다.
여기에 내용을 좀 더 덧붙였다.
“돈은 이 정도 있으니까, 간 보기는 안 해도 될 겁니다.”
피차 소모적인 대화를 막기 위해, 가진 돈을 인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강후는 필요에 따라서 10억 원 정도는 충분히 쓸 생각으로 왔다.
대참수를 페널티 없이 학습할 수 있다는 특혜를 생각하면…….
돈 아까운 장사는 절대 아니다.
페널티가 없는 대참수는 완벽한 ‘한 방’ 스킬이다.
일종의 필살기 개념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여성 안내원이 정중하게 강후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담당자의 지시가 있었을 터다.
‘역시.’
미리 가진 돈부터 인증한 덕분인지, 당신이 뭔데 대여를 하느니 마느니 같은 소리는 안 나왔다.
이게 돈의 힘이다.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속단하거나, 괜한 문전박대로 얼굴을 붉히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13층.
최상층에서 2층 아래인 곳에서 담당자를 만났다.
붉게 염색한 스포츠 머리가 인상적인 담당자.
그는 바지 주머니에 왼손을 밀어 넣은 채, 무척 껄렁껄렁한 자세로 강후를 맞이했다.
“온누리 길드 던전 관리팀의 총괄팀장 한승혁입니다.”
한승혁이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기가 무섭게.
“온누리 길드 소유의 발트만 던전. 1회 공략 라이센스 대여를 받고 싶습니다. 제시 가격은 10억. 두 번 협상은 안 합니다.”
강후가 바로 생각한 조건을 가지고 들이받았다. 협상의 여지를 차단하는 일방적인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