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맹수의 시간 (2)
【끈질긴 인내 - 반지】
【등급 : 4등급】
【체력 +100】
【평상시에도 항상 고통 경감 효과가 25% 적용됩니다.】
체력을 높이는 것과 동시에 고통 경감 효과를 가진 아주 쓸모 있는 반지였다.
강후는 예전부터 고통을 줄여줄 수 있는 수단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아직까지 치료법을 찾지 못한 선천성 마나 과민증에 대한 차선책이었다.
과민 상태에 빠지더라도 고통을 줄일 수 있으면, 그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어서다.
하지만 지금은 과민 상태에 빠지면 극심한 두통이 몰려오고, 이내 온몸이 망치로 맞은 것처럼 고통에 젖어들기 시작한다.
강후는 여기서도 버틸 힘을 얻고 싶었다.
고통 속에서 버티는 그 시간이 강후에게는 이득이었다.
고통 경감도 아주 유의미한 효과지만, 체력도 무려 100이나 올랐으니 체감은 더 컸다.
몸이 과민증으로 고통받게 되더라도, 착실하게 높여둔 체력은 카운트를 뒤로 늦춰줄 것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100초의 여유를 더 번 셈이다.
전투에서의 100초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가지고 있던 잡템을 모두 처분하고, 필요한 아이템 구매까지 마친 다음.
마켓 밖으로 나온 강후가 다시 원래의 포인트로 돌아가기에 앞서서, 잠시 카페에 들렀다.
값비싼 아메리카노에는 별 취미가 없지만, 잠시 머릿속을 식힐 시간을 갖고 싶었다.
꿀꺽- 꿀꺽-.
“역시 캔커피가 진리인가.”
단숨에 절반을 들이킨 강후가 씁쓸한 혀끝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달달한 캔커피나 첫맛이 강렬한 솔라키움 버스트가 입에 익숙해서 그런지 쓴맛이 영 어색하다.
자주 입에 물게 되는 솔라키움의 진액도 맛이 살짝 달달한 편이기에 더 그랬다.
‘대참수 스킬북을 원래대로 학습해서는 효율이 한없이 낮아지니, 결국 꼼수가 필요한데…….’
강후의 눈빛이 깊어졌다.
자신의 클래스 특성과 일치하지 않는 스킬을 학습하면, 효율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15%가 나온다.
즉, 강후가 대참수 스킬을 그냥 학습하면 명칭만 대참수지, 파괴력은 형편없는 스킬이 생긴다.
하지만 보스 스킬 강탈이 가능한 ‘신강후’의 특성상, 의외의 발상이 가능한 방법이 있었다.
보스에게 스킬을 강제 학습시킨 후, 그 보스를 죽여 스킬을 강탈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보스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다. 그랬으면 진즉에 했을 것이다.
‘국내에서 가능한 곳은 다섯 군데. 그중에 네 곳은 군벌의 손아귀에 있으니 제외하고.’
한 곳이 남는다.
수원역에 있는 던전으로 그 일대에 거점을 두고 있는 온누리 길드가 이 던전을 소유하고 있다.
‘공태수를 처리해 의뢰 수당을 받고 나면, 바로 수원역으로 뛰는 게 좋을 것 같다.’
다음 계획을 정리했다.
늦기 전에 대참수 스킬을 배워, 훨씬 위력적인 공격 스킬을 하나 더 추가할 생각이었다.
헌터의 꽃은 스킬이다. 그리고 다다익선이다. 스킬이 많아서 나쁠 것은 단 하나도 없다.
“……?”
바로 그때.
카페 안에서 유리창 밖을 살피던 강후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전혀 예상 못 한 장소에서 타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공태수였다.
물론 애초부터 그가 던전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밖에 있는 게 놀랍진 않았다.
다만 볼 일이 따로 있던 건지, 아니면 여유가 있었던 건지. 마켓 근처에 와 있었던 모양이다.
【신궁】
【신궁의 투혼이 깃든 당신은 마법, 화살 공격의 명중률이 기존에 비해 5배 상승합니다.】
【탐식의 요람】
【끊임없이 마나를 탐하는 성좌는 마나를 활용한 기이한 체계를 완성시켰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마나 20% 소모해서, 체력을 20% 회복합니다.】
‘확실히 공태수야.’
강후가 그에게서 표시되는 성좌 정보를 확인하고서는 확신을 가졌다.
공태수의 성좌가 맞다.
자체 회복에 자체 명중 보정이라니.
이러니까 헌터의 목숨을 쉽게 빼앗는 것이다.
잘 버텨내고, 잘 죽이니, 실력이 안 되는 적수는 죽어 나갈 수밖에.
당연한 이치다.
이건 시작일 뿐이다.
레벨 100에서 200 사이의 헌터에게는 성좌들이 간을 보며 잘 붙지 않지만.
200 이상이 되고, 안정적이면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죽을 일 없는 ‘안전 자산’처럼 여겨지면서, 계약자의 지속적인 성장과 함께 자신의 격도 더불어 높이려는 성좌가 몰리는 것이다.
이때부터는 앞다투어 성좌의 계약 신청이 늘어난다.
‘허정태도 그렇고 볼 때마다 좀 역겹네.’
강후가 팔짱을 낀 채로 도도한 눈빛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공태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완벽한 여장이다.
앞서 자신의 ‘대역’으로 던전에 들여보낸 가짜도 공태수와 영락없이 똑같이 생겼었는데.
여장을 한 공태수를 보니, 원래 공태수의 얼굴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뭔가 역겹지만, 꽤 예쁘게 여장이 됐다.
물론 원판 덕분이기도 할 터다.
강후가 성좌를 스캔하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 좋은 눈썰미로도 절대 알아보지 못했을 위장이었다.
“…….”
거리를 두고 호위가 있다.
일행이 아닌 척, 모르는 척하고 있지만, 최소 열 명의 헌터들이 주변을 지키고 있었다.
위장을 한 와중에도 호위를 두는 용의주도함이라니.
섣불리 덤벼서는 안 될 듯했다.
바로 그때.
부우우웅.
마을버스가 도착하고.
공태수와 그 호위들이 시간차를 두고 버스에 탑승했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일반인의 모습이다.
같은 버스에 속 편하게 타고 뒤를 밟고 싶지만, 좋은 방법은 아니다.
잠깐의 동행이야 문제 될 게 없겠지만, 공태수와 가는 루트가 전부 비슷하면 의심받을 것이다.
“햇빛은 영 질색인데…….”
강후가 정면에 보이는 건물 옥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유달리 햇볕이 강하게 내리쏟아지고 있는 시간.
직사광선은 피하고 싶지만…….
눈에 덜 띄게 공태수를 쫓으려면 건물 사이를 뛰어넘으며 버스를 추적하는 게 좋을 듯했다.
도심 안이기에 징검다리 삼아서 넘어갈 건물 옥상은 충분히 있었다.
중요한 건 집중력이다.
벌컥벌컥! 탁!
남은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킨 강후가 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또르르르.
컵 안에서 굴러다니던 얼음이 움직임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파팟- 팟- 팟-!
이미 강후는 계단을 따라 빠르게 옥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우우웅.
이윽고 버스도 출발했다.
추적의 시작이었다.
* * *
‘버틸 만하네.’
그간 착실히 체력을 높여온 탓인지, 연속적인 스킬 사용에도 몸이 제법 버텨줬다.
버스가 속도를 바짝 높이는 구간에서는 덩달아 도약 스킬 활용의 빈도도 늘어났지만.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어도 버틸 체력이 있다 보니, 고통 경감 효과와 맞물려 지구력이 생겼다.
게다가 버스가 정지 신호에 걸리면, 강후에게도 쉴 시간이 주어지는 만큼 회복의 여유도 있었다.
얼마 후.
공태수의 무리가 버스에서 내린 것은 던전으로부터 약 1k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였다.
처음에는 현장에서 적당히 거리를 두기 위해서 내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살짝 시간이 흐르고 나니, 다른 목적이 드러났다.
‘여기가 집결 포인트였군.’
강후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여러 개의 빌딩과 건물에 각기 흩어져 있던 헌터들의 등장이었다.
전부 사복 차림이지만, 그들의 눈빛에서 살기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공태수의 부하들이었다.
가짜가 던전에서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용병들을 뒤에서 덮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가짜 – 용병 – 진짜.
이런 구조로 전선이 짜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후방에서 기습을 당할 용병들은 속수무책이 된다.
어림짐작으로도 100명은 됐다.
비단 여기에만 공태수가 자신의 부하들을 배치하진 않았을 터.
다른 곳에도 비슷한 규모가 있을 듯했다.
팔뚝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공태수는 어떤 기분일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용병을 한 번에 일망타진할 생각에 희열을 느낄까?
그럴 것이다.
아마 곱게 살려두지도 않겠지.
놈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낄 만큼, 용병들에게 지옥을 선물할 가능성이 크다.
‘인내심 싸움이군, 이제.’
아직 가짜 공태수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다.
그때까지 진짜 공태수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는 가장 최적의 타이밍을 노릴 것이다.
강후 역시, 그늘과 어둠 속으로 모습을 숨기고 끝까지 기다릴 생각이었다.
아무리 전투에 자신이 있다 해도, 저 거대한 무리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미친 짓이다.
‘마법계니까 조심하겠지.’
강후는 공태수가 마법사 클래스 특성상, 주요 전장에서는 거리를 둘 것으로 확신했다.
마법사들은 무리가 한 번 작정하고 달라붙기 시작하면, 떼어내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히 부하들을 보내놓고, 전선과 전황을 조율하는 거리 두기를 할 가능성이 컸다.
강후는 스스로 공태수가 홀로 남거나, 소수의 호위 인원만 남길 시점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때.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공태수의 시선이 강후가 방금까지 있었던 위치로 향했다.
“…….”
하지만 이미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돌입한 강후를 볼 수는 없었다.
공태수도 자신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던 거라 생각하고는 이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가 다시 모습을 숨길 시간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
달조차 구름에 가려져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시간이 찾아왔을 때.
“공태수가 나왔다! 죽여! 죽여버리자고!”
숨죽여 때를 기다리던 용병들이 던전 공략을 마치고 나온 가짜 공태수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자 방금까지만 해도 간간이 지나가는 차 소리만 들리던 던전 주변이 시끄러워졌다.
편의점, 호텔, 식당, 그리고 골목.
장소를 가릴 것 없이 숨어 있던 용병들이 나타난 것이다.
“대장을 지켜라!”
“뒤로! 뒤로 후퇴해!”
미리 공태수가 뿌려둔 ‘미끼’들이 적절하게 역할을 수행했다.
당황한 모습이 역력한 가짜 공태수는 부하들과 함께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강후는 주요 전장이 될 방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저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을 뿐이다.
공태수가 판을 짜놓은 이상, 어지간한 용병들은 여기서 다 죽어 나갈 것이다.
그나마 실력 좀 있는 용병들만이 살길을 찾거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겠지.
강후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딱 한 번, 시선을 돌렸다.
윤상미도 용병 무리에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무리에 껴 있다고 해서 구하러 갈 생각은 없었다.
바로 그때.
스스스슷!
진짜 공태수의 손짓과 함께.
적당히 거리를 두고,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붉은 피 조직원들이 도로를 따라 움직였다.
본격적인 포위전이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용병들에게는 최악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상황이다.
강후는 공태수에게만 시선을 집중했다.
어차피 의뢰 대상은 그 하나뿐이다. 다른 놈에게 목숨값이 걸려 있는 것도 아니고.
팔 하나만 잘라가도 25억 원이다.
그 순간을 위해 모든 생각과 정신을 집중하는 것은 강후에게 너무 쉬운 일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흐르고.
역으로 포위망에 갇힌 용병들이 절규하며 죽음을 향해서 질주하기 시작했을 때.
강후는 공태수의 주변을 지키던 호위들이 하나둘씩 전장으로 향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완벽한 섬멸을 위해서 공태수가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이다. 충분히 전략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먹잇감이 홀로 되는 순간을 위해, 숨소리도 참아가며 수 시간을 기다려왔던 강후에게는.
“…….”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사냥을 시작할 맹수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