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울산행 (1)
【스킬북 - 후방 공격】
【특이 사항 : 암살자 전용】
【타깃을 뒤에서 공격할 경우, 기존 공격보다 대미지가 33% 증폭된 상태로 적용됩니다.】
패시브 스킬이다.
생각하면서 쓸 필요도 없고, 별도로 마나를 소진하지도 않아 마나 과민증을 자극하지도 않는다.
애초에 횡 이동 덕분에 후방 공격을 할 일이 잦은 강후였다.
그런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시너지를 가져다줄 수 있는 스킬북이 나타났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바로 학습했다.
당장 다음 전투부터 효과를 볼 수 있고, 효율 측면에서는 자신을 배신할 일 없는 스킬이기에.
【그림자 걸음】
【스킬 숙련도 : Lv. Max】
【다섯 개의 그림자를 만들어 움직인 후, 하나의 그림자를 지정해 순간적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는 반경 100m 밖으로 나가거나, 물리적인 피해를 입으면 그 즉시 사라집니다.】
【무의식이 반영된 그림자는 주인의 움직임을 모방, 저마다 다른 방법으로 움직입니다.】
그림자 걸음에 대한 확인도 마쳤다.
숙련도 최대로 넘어온 덕분인지 잔영이 사용하던 그림자 걸음보다 훨씬 더 업그레이드됐다.
“레벨도 올랐고.”
한편 레벨도 33이 됐다.
늘 그랬듯, 보너스 포인트는 체력에 투자. 그리고 한동안 무심했던 전체 스탯 확인도 했다.
【신강후 Lv.33】
【클래스 : 암살자】
【고유 재능 : 제법 우수한 주력 /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근력 70】【민첩 60】
【체력 198】【마나 20】
【항마 45】【맷집 70】
청명 수용소를 탈출하기 전과 비교했을 때, 확실히 환골탈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달라져 있었다.
레벨 10, 체력 10이었던 약골의 몸은 이제 운동선수가 부럽지 않을 체력이 됐다.
물론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면, 3분의 카운트다운이 걸리는 빌어먹을 몸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시간을 버틸 수 있는 기반이 생긴 것이다.
예전에 바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던 때와는 그림이 달랐다.
마나는 저 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마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다른 헌터에 비해 월등히 높으므로, 수급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람 구실은 하게 됐다뿐이지, 아직 갈 길은 멀지.”
마냥 기뻐하진 않았다. 그런 생각도 사실 안 들고.
강후는 전보다는 확실하게 버틸 만 해졌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초소형 던전인 이곳에서 곧 메인 보스를 만날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보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이름을 알아내는 것은 너무 쉬웠다.
왜냐하면…….
“신강후.”
또 다른 내가 이 던전의 메인 보스이기 때문이다.
* * *
같은 시각.
대뜸 자신의 집무실에 찾아와 연신 독한 위스키를 들이키고 있는 채관형을 바라보는 남자.
바로 채관형마저도 상관으로 모시는 사람.
정화 길드의 주인이자 설립자인 장시환이었다.
두 사람은 상하 관계를 초월한 막역한 친구 사이였기에.
자신을 찾아와 아무 말도 안 하고 술만 연신 들이키는 무례함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장시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긴 머리가 흩날렸다.
어깨까지 쭉 내려오는 그의 긴 흑발은 너무 고와서, 윤기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를 정도였다.
장시환이 채관형에게 물었다.
“무슨 일인데 그래?”
“내가 즐겨 쓰던 괜찮은 도구 하나가 부서졌어. 그리고 안영호에 대한 연구 건도 무산됐고.”
“그런 일, 흔하지 않았어?”
씩씩거리는 채관형과 달리 장시환은 오히려 씨익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지만 채관형은 그렇게 사람이 태평할 수 있냐는 듯이 장시환을 흘겨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것만큼 엿 같은 기분이 없단 말이다.”
“관형아. 사소한 실패나 뒷걸음 정도는 우리에게 별것 아니야. 밝은 미래가 이미 펼쳐져 있다고.”
“뭐가 밝은데! X발.”
“우리의 꿈은 무조건 실현될 거야. 그 꿈을 막는 놈은 당연히 적이 되고, 한 줌의 재가 되겠지.”
“장시환. 너무 낙관만 하지 마. 무조건이 무조건이 아니게 될 수 있단 말이다.”
“저런 잔챙이 한둘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의 미래가 바뀌진 않는다고. 알겠어?”
순간 표정이 확 변해버린 장시환에게서는 죽은 허정태와 사라진 안영호에 대한 멸시가 묻어났다.
그까짓 ‘하찮은’ 놈 한둘 사라지고 놓쳤다고 해서, 뭐 그리 의미를 부여하냐는 눈빛이었다.
장시환이 말을 이어갔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잖아. 내가 정의고, 내가 선이고, 내가 길이야. 어떤 것도 우릴 막을 순 없으니, 혼자 심각해지지 마.”
“……네가 세상의 주인공이라도 된다는 거냐.”
채관형은 친구이자 라이벌이기도 한 장시환에게 날 선 한 마디를 뱉어냈다.
그러자 장시환은 평소처럼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내가 주인공이야.”
* * *
전투의 최고조에 다다른 강후는 ‘또 다른 나’와의 전투에서 더 깊은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난이도 자체는 오히려 앞서 상대했던 잔영보다 낮았다. 자신과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생각도 같고, 노림수도 같은 또 다른 신강후는 그런 의미에서 예측이 너무 쉬운 적이었다.
과거의 나이지 않은가?
지금보다 발전한 미래의 자신이 아닌 발전하기 전의 과거와 싸우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방금, 막 즉흥적으로 떠올린 연계 공격에는 또 다른 내가 오히려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강후야. 난 단검만 쓰진 않거든. 세컨드, 써드 플랜이 늘 있어. 근데 너에게는 없는 듯하다.”
강후가 비틀거리는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격려라기보다는 곧 녀석에게 찾아올 최후를 암시하는 일종의 세리머니 성격이 강했다.
아니나 다를까.
“쿨럭!”
강후가 막 고안해 낸 연계 공격을 한 차례도 막지 못한 녀석은 검은 피를 토하고 숨이 끊어졌다.
당연한 얘기이겠지만, 자기 자신을 보스로 상대했기에 강탈할 수 있는 새로운 스킬이 없었다.
그래서 시스템 메시지는 예상했던 대로, 다른 형태의 변화구를 던져주었다.
원작에서 장시환도 얻었던 보상이다.
【스킬 강화(1회)】
숙련도 최대의 스킬에 한정해서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기회.
스킬 강화다.
강후의 경우, 성좌 효과 덕분에 모든 스킬이 숙련도 최대인 만큼 제한이 될 스킬은 없었다.
‘궁극기’의 용도로 활용이 가능해지는 만큼, 어떤 스킬을 업그레이드해도 파괴적이다.
이런 스킬 강화 보상은 던전에서도 정말 희귀하게 얻는 보상이었다.
확률이라는 숫자놀음으로 말하자면, 0.001% 미만이라는 통계를 쉽게 붙일 수 있을 정도.
그뿐만 아니라, 이 효과를 보려면 무조건 숙련도 최대의 스킬이 필요하다.
그런 스킬을 미리 가지고 있는 것도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요조건이 까다로운 셈이다.
“일단 보류.”
강후가 우선은 기회를 소진하지 않고 남겨두기로 했다.
후보로 떠오르는 스킬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아직 확신이 들지는 않아서다.
어차피 마음만 먹으면, 그 순간에 즉시 강화가 가능하므로 급할 것도 없었다.
바로 그때.
【적요석 – 특수 재료】
“이거, 횡재했네.”
죽은 ‘자신’에게서 전리품 하나가 추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앞서 잔영에게 스킬북을 얻었을 때도 횡재했다고 생각했는데.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다.
적요석은 정말 귀하다.
아이템 등급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숨겨진 옵션을 풀기 위해, 꼭 필요한 재료이기 때문이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설령 살 수 있다고 해도 가격에 제한이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다.
그 부름은 몇억, 몇십억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갈 수도 있다.
물론 이걸 판다고 한다면 정직한 구매자보다, 눈이 뒤집힌 범죄자들이 몰릴 확률이 99.9%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판매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았다.
“장시환의 손에 들어갔다면 배가 아플 뻔했네.”
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즉흥적인 면이 있었지만, 어쨌든 기억을 떠올린 덕분에 잘 왔고 이득을 많이 봤다.
그림자 걸음.
스킬 강화.
적요석.
어느 것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스킬이자, 누군가에게는 평생이 걸려도 얻지 못할 기회다.
볼일은 끝났다.
일단은 이예린에게 돌아갈 생각이었다.
그라운드 제로에 갔다 와 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아직까지는 조금 실력이 부족한 느낌이다.
그곳은 적정 수준, 권장 레벨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온갖 변수의 결정체나 다름없는 곳이다.
한 마디로 헌터들의 야생.
그렇기에 어설픈 도전 정신만으로 달려들기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대신 이예린에게 좀 더 비싼 의뢰를 뜯어내고, 이것으로 더 괜찮은 아이템을 구할 계획을 세웠다.
레벨업만큼, 기본 아이템 세팅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같은 레벨이어도 어떤 아이템을 세팅했느냐에 따라, 체감되는 힘이 십수 배 차이도 날 수 있기에 구성은 정말 중요했다.
* * *
다음 날, 아침.
강후는 전날 이예린과 미리 조율한 장소에 도착해서 그녀를 만났다.
늘 그랬던 대로라면 접선 장소는 대전역이겠지만, 오늘 만남은 평택역에서 이뤄졌다.
그래서 강후를 보자마자 이예린이 운을 띄운 내용도, 바뀐 장소에 대한 화제였다.
“장소가 좀 의외죠?”
“매번 대전역이면 그게 더 이상하죠.”
“하긴. 맞는 말이네요.”
“허정태는 잘 인계했습니다.”
“안 그래도 연락받았어요. 저희 쪽 의뢰라고 말씀해 주셨다면서요? 호호, 그건 부탁 안 드렸는데.”
강후가 고개만 끄덕였다.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사실 이런 게 비즈니스다.
자신이 의뢰꾼으로 있는 용병단의 이름을 살짝 언급해주면서, 그 격을 높여주면…….
당연히 용병단에서도 의뢰꾼에게 더 좋은, 더 쓸만한 의뢰를 물어다 주는 것이다.
“다음 의뢰 얘기를 하기 이전에 꼭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차소희, 알아요?”
“알고 있습니다. 뒤를 밟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고.”
“서연이가 알려주던가요?”
“네.”
“맞아요. 이클립스에서 쫓는 것 같은데, 제가 선규 씨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서 눈을 붙여뒀어요.”
“음.”
“차소희의 위치 보고가 들어오면, 계속 선규 씨에게 제가 보안 문자를 보낼게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뭐, 비싼 인력 쓰는 것도 아닌걸요. 이런 미행을 좋아하는 녀석이 제 밑에 있다 보니. 호호.”
강후가 적당한 감사만 전했다.
자신이 요청한 것도 아니고, 이예린이 먼저 호의를 베풀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감사는 하지만 저자세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신경을 쓸 만큼, 이예린이 자신을 매력적으로 생각한다는 해석이 됐다.
충분한 대화가 됐다고 생각했는지 이예린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원래 선규 씨에게 의뢰하려고 했던 것은 ‘잠입’이었어요. 하지만 ‘암살’로 바꿔야 할 듯해요.”
“암살이라.”
돈이 된다면 못 할 것은 없다.
그리고 보통 암살 의뢰는 죽어 마땅한 이유를 가진 녀석을 타깃으로 들어온다.
이예린이 회색 영역에 있는 사람인 것은 맞지만, 아무나 죽이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다.
그녀 차원에서 한 번 필터링해서 의뢰를 받았을 가능성이 매우 컸다.
그러니 이번 타깃도 죽일 만한 놈일 터다.
“한 번 보세요.”
이예린이 서류를 쓱 내밀었다.
그리고 첫 페이지를 보는 순간, 강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울산의 도살자?”
익숙한 이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