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허정태 (3)
* * *
경의중앙선을 탈 요량으로 양평역에 도착했을 즈음.
한 무리의 헌터들이 역에서 나와, 정확히 허정태의 집이 있는 문성 빌라 쪽으로 뛰었다.
“문성 빌라라고! 뛰어!”
“현장 CCTV는 제가 확보하겠습니다!”
“비용이 얼마든 상관없으니, 무조건 달라고 해!”
“예!”
옷깃을 흩날리며 열심히 달리는 그들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정화 길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CCTV를 운운할 만큼, 현장에서 자료를 확보해야 할 이슈는 강후와 허정태의 일밖에 없어서다.
‘정말 빠르군.’
허정태와의 전투가 조금만 길어졌어도, 신고가 조금만 늦어졌어도 저 얼굴들을 볼 뻔했다.
언젠가는 정화 길드와 공식적으로 접점이 생길 일이 있기는 있겠지만…….
굳이 지금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 강후의 생각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강후는 원작과 다르게 허정태가 헌터 치안청에 체포된 이후의 미래를 생각해 보았다.
분명히 허정태의 미래는 달라질 것이다.
일단 채관형이 그를 다시 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채관형의 충실한 도구로서 활약하던 헌터 살인마, 허정태도 나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혀 다른 형태로 살인마의 길을 걷게 될 수 있지만, 정화 길드와 손발을 맞출 일은 없겠지.
‘이렇게 싹을 자르는 거다.’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 변화는 아주 큰 변화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거대한 나비효과가 되어 미래를 뒤집을 것이다.
장시환과 그 일당들이 당연하게 취해야 할 기연을 빼앗고, 하수인을 하나씩 잘라내 버린다면?
그만큼 미래의 그들에게는 있어야 할 힘이 사라질 터.
반대로 그 힘만큼 강후는 그들을 따라잡게 될 거다.
‘재밌어.’
강후가 웃었다.
지금 경의중앙선을 타고 향하려는 곳은 방금 즉흥적으로 떠올린 목적지인 ‘양수역’이었다.
원작에서 장시환이 기연으로 재미를 본 던전이 바로 양수역에 있기 때문이다.
장시환의 ‘마나 부족’을 해결해 주기 위해, 원작자로서 마련한 터닝 포인트였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 덕분에 강후는 마나 부족에 대한 갈증은 전혀 없었다.
부작용이 심한 증세이기는 하지만, 순기능만 생각하면 사실 마나 무한이나 다름없어서다.
강후가 양수역의 던전에 주목한 이유는 마나가 아니었다.
미들 보스와 메인 보스가 누구냐였다.
던전과 몬스터 레벨은 75 수준이기에 강후에게 딱히 부담은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가운데 두 보스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이 바로.
【그림자 걸음】
【스킬 강화(1회)】
이렇게 두 가지였다.
특히 메인 보스에게 얻을 수 있는 스킬 강화는 ‘궁극기’라고 불리는 스킬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
숙련도가 최대인 스킬만 궁극기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기에 정말 귀한 기회이기도 하다.
-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멀어지는 기차의 창밖을 따라서 더 멀어져가는 정화 길드 헌터들의 뒤통수가 보였다.
현장의 CCTV를 확인해도 아마 자신의 뒷모습밖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허정태와 싸울 때, 그것까지 고려하고 짜놨던 판이고 동선이기 때문이다.
물론 머리 스타일이나 옷이 드러났을 수는 있지만, 그거야 적당히 바꾸면 그만이다.
‘어쨌든 장시환이 오기 전에.’
이득을 볼 것들은 남김없이 선점한다.
강후는 대전제를 항상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시환의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요소들은 자신이 반드시 차지한다.
그것이 기연이든, 사람 사이의 인연이든, 혹은 숨겨진 히든 피스든 말이다.
다 빼앗아야 한다.
* * *
양수역에서 내려서 쭉 이동하다 보면 멀지 않은 곳에 부용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나온다.
해발은 썩 높지 않지만, 인적이 무척 드물다 보니 사실상 무인 지대나 다름없는 산이기도 했다.
헌터의 시대가 열리기 이전에도 양수역 인근은 수도권에 비해서는 매우 조용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제 치안까지 불안정해진 지금, 이곳에 사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에 터를 잡고 거의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만이 작은 텃밭 정도만 일구며 살아갈 뿐이었다.
범죄 조직의 헌터들도 노인들은 이래저래 가치가 떨어져, 굳이 그들을 해코지하려 하진 않았다.
‘부용 황주 농원으로부터 반경 100m 안. 늑대의 옆모습을 빼닮은 바위가 표지판처럼 있는 곳.’
기억을 되짚으며 이동했다.
던전에서 흘러나오는 마나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마나 추적으로는 찾을 수 없는 던전이었다.
애초에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던전인 것이다. 찾아 들어가면 첫 방문자가 되는 셈이다.
제초는 당연히 되지 않은, 온갖 수풀과 잡초가 무성한 공간을 한참 들어가야 했다.
그래도 단서가 될 만한 내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탓에 오래 헤매지는 않았다.
게다가 부용 황주 농원은 저녁에도 부지런히 사람 손길이 닿는 곳이라 주변 조명도 제법 있었다.
‘찾았다.’
30분 정도의 시간을 투자한 끝에 던전 입구를 찾아냈다.
던전 입구는 바위와 바위틈새에 있어서 정말 작정하고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면 찾을 수 없을 장소였다.
“좋아.”
강후가 단검을 다시 움켜쥐었고, 언제든 예비로 꺼낼 수 있도록 장창도 준비했다.
허정태에게 빼앗은 ‘강격의 장창’은 앞으로 쓰임새가 많을 것이다. 임기응변용으로도 좋다.
스르륵.
이윽고 들어간 던전.
처음 ‘방문자’를 맞이하는 던전의 하늘이 회백색 구름의 음침함으로 시작을 열었다.
그리고 암살계열로 구성된 미들 보스 특성에 맞게 던전 내의 기본 몬스터들도 특징을 드러냈다.
바로 검은 복면인.
무협 소설이나 영화에서 볼법한 무인들이 얼굴의 절반 이상을 가린 채, 그렇게 모습을 드러냈다.
“재밌겠군.”
강후가 자세를 낮췄다.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놈들이 알아서 다가올 듯했다.
파팟. 팟. 파팟.
열 명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저마다 주변 바위와 나무 따위를 디딤대로 삼아 접근했다.
이리저리 현란하게 움직이면서 좌우로 몸을 비트는 것이 꽤 잔재주처럼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강후의 뛰어난 동체 시력은 한 명의 누락도 없이 완벽하게 복면인의 움직임을 쫓았다.
그리고 복면인 몇이 선두의 복면인을 방패 삼아, 허공으로 훌쩍 몸을 날렸을 때.
퍼억!
“크헉!”
강후가 기습적으로 허리에서 꺼낸 강격의 장창을 쭉 늘려서는 복면인을 후려쳤다.
무한정으로 늘어나지는 않지만, 원래 길이까지는 순식간에 쭉 늘릴 수 있는 장창인 만큼.
복면인이 단검을 든 팔을 뻗으며 접근하기 전에 우선적인 경로 차단이 가능했던 것이다.
단지 후려쳤다, 라고만 생각했는데 공격을 당한 복면인은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었다.
일격에 골로 간 것이다.
“암살계가 다 그렇지. 깃털처럼 가벼워서 부서지기도 좋아.”
강후가 자신의 몸을 슬쩍 훑었다.
동병상련이다. 제법 근육이 붙긴 했어도 암살자 특유의 부족한 내구성은 어쩔 수 없다.
“극단적인 거리두기를 가장 싫어하기도 하고.”
후웅! 후웅!
장창을 휘둘렀다.
퍼억!
그 와중에 몸을 낮춰 접근을 시도하던 복면인 하나가 장창에 정수리를 내리 찍혀 고꾸라졌다.
움직임을 쫓지 못한다면 장창을 통한 견제가 의미 없지만, 지금은 경우가 전혀 다른 것이다.
눈을 통해 움직임이 보이니, 길이가 긴 장창을 이용해서 미리 경로를 차단하는 것이 쉽다.
단검과 장창, 그 절대적인 길이의 차이만큼 복면인들은 고스란히 손해를 보고 있었다.
파앗!
단숨에 둘을 제압한 강후가 이번에는 기습적으로 도약을 활용하며 그들에게로 붙었다.
무리 사이로 강후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복면인들이 당황하는 사이.
푸슉! 푹! 푸욱!
강후의 단검이 아주 약간의 힘만 들여서는 세 복면인의 목젖을 가볍게 찌르고 갔다.
‘가볍게’ 찔렀지만, 그들에게는 ‘무겁게’ 죽음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한 방이었다.
그렇게 거리를 좁히자마자, 또 장창을 활용해 후려치기 시작하니 손을 쓸 길이 없었다.
열 명의 복면인은 그렇게 강후의 옷깃 한 번 제대로 그어보지 못하고 모조리 죽어버렸다.
“시시하군.”
강후가 코웃음을 쳤다.
레벨 75 수준의 일반 몬스터는 이제 상대하기가 전혀 어렵지 않다.
이 정도면 던전에 대한 눈높이를 100으로 상향해도, 전혀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승승장구.
강후가 앞길을 가로막는 복면인을 계속 제압하며, 던전 중반 지점까지 빠르게 나아갔다.
애초에 초소형 던전이다 보니까 진행이 빨랐다. 그만큼 몬스터가 많지도 않고.
장시환의 기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설계된 던전이라는 티가 팍팍 나는 장소인 셈이다.
그렇게 입장한 지,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미들 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름은 잔영.
평범한 모델링을 복사 붙여넣기를 한 듯했던 복면인들과 달리.
길게 늘어뜨린 흑발에 붉게 빛나는 눈, 우수에 잠긴 눈빛까지 담긴…… 나름 멋진 녀석이었다.
“그림자 걸음.”
강후가 잔영에게 강탈할 수 있는 스킬에 대해 다시 주의를 환기했다.
잔영이 가진 그림자 걸음 스킬은 미들 보스의 스킬이라고 하기에는 무척 사기적이다.
그게 문제 될 것도 없었던 것이 아무리 사기적이어도, 결국은 잔영만 쓸 수 있는 스킬이기 때문.
하지만 강후의 강탈로 인해, 언제든지 빼앗아 갈 수 있는 최고의 스킬이 됐다.
‘그게 나, 신강후의 밥줄이지.’
강후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이 강해질 가장 빠른 방법은 잔영처럼, 존재 그 자체만으로 사기적인 스킬을 빼앗는 것이다.
특히 남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스킬 구성을 늘려가면, 모든 것이 무기가 된다.
전투의 수 싸움에서 써먹을 패가 쉴 새 없이 늘어나는 셈이다.
“…….”
강후가 잔영이 먼저 접근하기를 기다렸다.
녀석과 공방전을 치르며 제압하는 그림도 괜찮지만, 오래 힘 빼고 싶진 않았다.
사실 잔영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메인 보스라서다. 쉽게 계산이 서지 않기도 하고.
“후후.”
강후가 자신을 보고도 적극적인 모션을 보이지 않자, 잔영이 이유 모를 웃음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쿠아아!
거대화한 잔영의 그림자가 하늘 높이 솟구치더니, 이내 세 갈래로 흩어졌다.
그림자 걸음이었다.
세 개의 그림자를 원하는 방향으로 흩어지게 하되, 그림자의 위치로 이동할 수도 있는 스킬이다.
그림자의 속도가 워낙 빠르고, 어둠 속에서는 그림자 자체도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정말 까다로운 스킬 중 하나였다.
파앙!
강후 역시 즉각 대응했다.
환영술!
세 그림자보다 개수로는 2개가 더 많은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는 스킬이다.
그렇게 잔영에게 혼선을 준 사이, 잔영도 그림자 하나를 선택했다. 이동하기 위해서다.
찰나의 순간.
잔영이 미리 이동하려고 결정했던 그림자에게서 보인 약간의 일렁임을 강후가 잡아냈다.
깔끔한 환영술의 대응으로 말미암아 생긴 시각적 교란이, 짧지만 분명한 흔들림을 만든 것이다.
파아앗!
강후가 망설임 없이 잔영의 그림자 하나를 정해서는 덮쳤다.
만약 잘못 선택한 것이라면 후방을 고스란히 빈틈으로 내어 주게 되는 최악의 선택이지만.
‘내 눈에는 보인다니까.’
강후에게는 아니었다.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
그리고 잔영 같은 몬스터를 원작자로 ‘직접’ 설계하면서, 자연스레 숙지하게 된 공략법은.
깔끔하게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100%의 전략적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니 틀릴 일은 없었다.
푸우우욱!
강후가 뒤도 안 돌아보고 지른 단검이 잔영의 이마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갔다.
손잡이를 뺀 모든 부위가 파고 들어가, 굳이 결과를 따져볼 필요도 없는 완벽한 치명타였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자 걸음】
“잘 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