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허정태 (1)
“악취미가 있네. 어지간한 취향은 존중하는데, 여장하는 재주는 좀 그렇지 않나.”
“어디서 왔냐고 묻잖아.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내가 사는 곳까지 알고 있냐고.”
“대답하면?”
“뭐가 대답하면이야. 새끼야. 내가 묻는 거 안 들려?”
“됐고. 덤벼라. 콩밥 쳐 먹이러 온 거니까, 둘 중 하나가 뻗어야 상황이 끝날 거다.”
강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살살 약을 올리자, 허정태가 쓰고 있던 긴 머리의 가발을 벗었다.
그러자 밤톨이라는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릴 정도로 반삭으로 밀어버린 머리가 드러났다.
머리 한쪽에는 ‘땜빵’까지 있는 것이 영락없는 까까머리 모습, 그 자체였다.
【어둠의 사제】
【악성향의 성좌. 중립, 선 성향의 성좌를 모시는 헌터를 상대로 전투 능력이 25% 상승합니다.】
‘뜻하지 않은 버프를 줬네.’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차원 강탈자는 풍기는 느낌에서 악성향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실상은 중립 성향이다.
어찌 보면 ‘신강후’와 구원자의 운명을 함께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선 성향에 더 가까워진다.
선이든 중립이든, 악성향인 어둠의 사제와는 결이 다르니 허정태는 버프를 얻는 셈이다.
원작에선 허정태에 대해 이렇게 디테일한 설정을 잡아주진 않았다. 외모 묘사나 사는 곳에 대한 정보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데 붙은 성좌를 보니 빌런에 알맞게 조형이 된 모양이다.
또한 이런 성좌의 능력 덕분에 원작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늘 실력이 좋게 느껴졌던 것일지도.
“지금이라도 갈 길 가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거야. 난 헌터 죽이는 거, 신경 안 쓰거든.”
“난 아닐 거 같냐?”
강후가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여기 움켜쥐었던 단검으로 많은 헌터의 목숨을 끊었다.
물론 다 죽을 만한 놈들이었고, 그것에 대해서 동정이나 연민 같은 감정은 없었다.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험악한 세상. 그곳이 바로 원작이 만들어낸 삭막한 지금의 세계다.
“그래. 그럼 이젠 죽는 느낌도 한번 경험해 보라고!”
촤악!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옷소매 속에서 손가락 한 뼘 크기의 뭔가를 꺼낸 허정태가 그것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마나를 불어넣자, 순식간에 길이가 쭉 늘어나며 장창의 모습으로 변했다.
‘강격의 장창.’
어떤 아이템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일종의 여의봉이랄까. 물론 대책 없이 늘릴 수는 없지만, 휴대하기 좋게 줄이는 건 수월하다.
타탓!
이윽고 허정태가 장창을 깊숙하게 내지르며, 강후의 동선을 제한하기 위한 흐름으로 들어왔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꺾이는 사선의 형태로 공격을 했기에, 어설프게는 정면 돌진이 되지 않았다.
깡!
강후가 파고든 장창을 단검인 창공의 환희로 쳐냈다.
길이는 장창에 비해서 압도적으로 짧지만, 어차피 쳐낼 면이 넓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납치 스킬은 아꼈다.
이런 눈치 빠른 놈은 한 번 스킬을 꺼냈다가 실패하면, 다신 노림수를 갖기가 어렵다.
일종의 필살기 개념으로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승부는 결국 한 방 싸움에서 끝나니까.
스읏, 쾅!
허정태가 장창을 그대로 지면에 내리쳤다. 강후의 위치와 관계없이, 의도된 내리침이었다.
우우웅!
그러자 지면 위로, 발생한 충격파가 저공비행으로 날아오며 순식간에 강후를 덮쳤다.
“……!”
한 방 먹었다.
단순 충격파가 아니라, 상대를 위로 쳐올리는 탄성을 가진 파장이었다.
상승 탄력에 휘말린 강후의 몸이 붕 떠올랐고, 이에 연계해 허정태가 다음 공격을 이어 나갔다.
쿠아앙!
그것은 장창을 허공에 반달 모양으로 휘저으며 날리는, 일종의 바람 공격이었다.
정확히는 날카로움을 담고 있는 바람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칼과 같은 바람이랄까?
어쨌거나 무방비로 허공에 떠버린 상태.
도약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즉시 활용하기 어렵기에, 다른 수를 썼다.
위이이잉!
바로 보호 방벽이었다.
쿠웅!
칼바람이 보호 방벽을 때렸지만, 듬직한 내구성으로 어렵지 않게 방어를 해냈다.
쿠아앙! 쿠앙!
허정태가 두 차례 더 칼바람을 날렸지만, 강후는 보호 방벽의 뒤로 이동하며 쉽게 회피했다.
“어디 소속이냐?”
“없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런 스킬은 길드에서 밀어주지 않으면 안 나올 텐데?”
“칭찬은 고맙게 듣지.”
때아닌 허정태의 인정에 강후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전문적으로 육성 과정을 밟은 것 같단 말이겠지. 길드 차원에서 컨설팅도 해 주고 말이다.
그것은 애초에 암살자 클래스가 방어에 관련된 스킬과 거리가 멀다는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다.
강후는 이런 스킬을 억지로 학습한 것이 아니라, 강탈하여 페널티가 없는 자신의 스킬로 만들었다.
완성도가 높다 보니, 상대하는 입장에서는 오랜 시간 전문적으로 훈련한 스킬처럼 느껴질 수밖에.
강후가 단검을 고쳐 쥐었다.
보호 방벽은 이제 노출이 됐으니, 녀석의 계산에 이 스킬은 무조건 들어갈 것이다.
임기응변으로 한 차례의 위기는 넘겼지만, 다음 카드가 넉넉하게 있는 건 아니다.
‘한 번 볼까.’
파상공세로 몰아붙이려던 강후가 즉석에서 전략을 수정했다.
전략적으로 소모전을 하기로.
무의미한 소모전이 아니다.
강후의 고유 재능 중에 하나인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은 상대의 습관을 캐치하기 매우 좋다.
만약 어떤 특정한 공격이나 노림수 전에 습관처럼 보여주는 사전 동작이 있다면?
예리하고도 정확한 눈썰미를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강후가 몸을 낮추고, 방어를 우선시 할 수 있도록 단검을 역수(逆手)로 쥐었다.
공격보다 더 어려운, 하지만 그래서 적의 수를 꼼꼼하게 살필 수 있는 방어전이 시작됐다.
* * *
근 5분에 가까운 시간을 강후는 방어로만 일관했다.
단 1초에도 한두 차례의 공격이 연이어 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5분은 정말 길었다.
‘항마 능력은 뛰어나군.’
그 과정에서 강후는 얕은 혼돈이 아예 걸리지 않는 허정태의 능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시야 강탈은 유사한 스킬에 당한 사례가 많은지, 장창으로 시야를 가려 영리하게 피했다.
도약은 장창을 쭉 뻗는 거리 견제에 쉽게 각이 보이지 않았고.
횡 이동은 강후가 시야에서 사라지면, 허정태가 등 뒤편으로 먼저 창을 뻗기에 껄끄러웠다.
강후는 허정태의 기세가 제법 높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실상 허정태의 속내는 정반대였다.
모든 공격 수단을 다 써봤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강후가 뚫리지 않았다.
보호 방벽이 너무 껄끄러웠다.
거기에 강후가 후방으로 도약하거나, 지형지물을 바탕으로 횡 이동을 하며 은신을 해대는 바람에 나름 노림수랍시고 펼친 공격들이 죄다 실패로 돌아갔다.
강후에게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지금껏 이렇게 상대를 ‘깨끗하게’ 두어 본 적이 없는 허정태로서는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래서일까.
허정태는 강후의 레벨을 110인 자신보다 훨씬 높은 160, 170 정도로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완벽한 착각이었지만, 그만큼의 완성도를 느낀 것이 사실이었다.
게다가 암살자 계열 외 스킬을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전문 육성된 ‘킬러’의 냄새도 맡았다.
한편.
‘일단 한 가지는 확실해. 힘이 실린 공격을 할 때는 무조건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비튼다.’
강후는 방어 일변도로 일관했던 시간 속에서 유의미한 단서 하나를 얻었다.
허정태의 일격에 관련된 사전 동작.
바로 허리 비틀기였다.
본인이 아는 습관이라고 하기에는 비트는 폭이 매우 적었다. 작정하고 보니 겨우 보이는 것이다.
물론 자신의 습관을 역이용해서 상대를 끌어들이는 케이스도 있지만, 그 수준은 아니라고 봤다.
사실 간 보기 차원에서 한 번 역공을 취하려는 모션도 보여줬었기 때문이다.
낚시성으로 보여준 습관이었다면, 그런 모션을 취했을 때 다른 반응이 나왔을 거다.
‘그렇다면.’
계산이 끝난 강후가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예 보란 듯이 허정태를 향해 시야 강탈 스킬을 썼다.
막힐 것을 계산하고 사용한 스킬이기에 명중에 대한 욕심은 티끌만큼도 없었다.
“…….”
입술을 굳게 다문 허정태가 장창을 수평으로 들어 시야 강탈 스킬의 영향을 막아냈다.
그 시간만큼, 강후는 허정태에게 더 가까이 접근했다.
바로 그때.
‘지금이다.’
허정태가 허리를 왼쪽으로 살짝 비트는 동작이 보였다. 힘을 실어 공격하기 전의 사전 동작이다.
그것은 즉, 지금 스킬을 회피하는 동작에서 바로 공세로 전환할 것임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신속한 공수 전환의 예고편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강후가 우직하게 돌진했다.
그리고 단검을 앞으로 쭉 겨누며, 허정태의 복부를 노릴 것임을 대놓고 암시했다.
아무 생각 없이 달려드는 거라면, 이대로 반격을 제대로 맞고서 쓰러지는 그림이 되겠지만.
사전 동작을 확인했을 때 맞춘 다음의 계획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파앗!
공중 도약이었다.
“아?”
강후의 노림수를 읽은 뒤, 나름 멋진 회피에 이은 역공을 펼치려고 했던 계산이 어그러졌다.
장창이 앞으로 쭉 뻗어져 나간 시점에 강후는 정확히 허정태의 머리 위를 지나고 있었다.
허를 찔려도 제대로 찔렸다.
허정태의 양쪽 어깨도 순식간에 여러 군데를 찔렸다.
푹푹푹, 하는 소리와 함께 양쪽 어깨 위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고통이 전신으로 뻗어져 나갔다.
단검이 정확히 세 번을 어깨 위를 찍고 지나간 것이다. 그것도 제법 깊숙하게 말이다.
‘아직 부족해.’
혈화를 쓰기는 조금 이르고, 또 상처가 부족하다. 강후가 한 타이밍을 더 가기로 했다.
허정태를 죽일 생각이었으면 방금 정수리를 찔렀을 것이다. 그럼 이미 상황은 종료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목적은 ‘생포’였던 만큼, 전투 능력의 무력화가 중요했다.
강후가 다시 쇄도했다.
방어자가 된 허정태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게도, 아까와 공격 방식이 또 같았다.
먼저 시야 강탈을 던지고, 이를 막으려는 허정태의 복부를 또 한 번 노리는 ‘척’하는 식이었다.
양자택일의 선택지에 걸렸다.
강후는 실감했다.
지금의 허정태는 풋내기라고.
왜냐면 양자택일 선택지를 강요받는다는 것은 무조건 방어자에게 불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씨…….”
허정태의 찌푸린 미간 사이로 짙게 발라뒀던 파우더가 땀에 섞여 흘러내렸다.
허정태는 배를 막았다.
앞서 쓴 레퍼토리를 또 쓸 리는 없다는, 누가 그런 뻔한 수작질을 하겠냐는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그 뻔한 수작질이 한 번 더 나왔다. 이번에도 강후의 몸은 공중을 날고 있었다.
푹푹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