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진실의 눈, 안영호 (2)
* * *
“와…….”
강후를 따라, 옥상에 도착한 안영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에 은신한 상태에서 창틀을 따라, 은밀히 올라간 것부터가 신기했다.
게다가 미행이랍시고 보냈으면, 최소한 레벨 7, 80은 족히 넘을 헌터 둘을 단번에 제압한 것이 믿기지 않았다.
한 번에 처리하지 못했다면, 누군가는 비명을 지르든 동료를 부르든 했을 터.
하지만 일격에 목숨을 잃은 탓인지, 1층 입구의 미행자들은 여전히 주변만 살피고 있었다.
“일단 빠져나가자고.”
강후가 손을 뻗었다.
남자 손을 잡는 취미는 없지만, 일단 이 건물에서 벗어나야 했다.
다행히 건물들마다 높낮이 차이가 크게 없고, 직선거리가 짧다.
그래서 강후가 절반 수준의 효율로 떨어지는 2인 도약으로도 충분히 뛰어넘는 것이 가능했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도약으로 위치를 옮길 건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뛰고 또 뛰었다.
그렇게 충분히 모던 바가 있던 건물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쉴 새 없던 도약도 끝이 났다.
중간중간 쉬는 타이밍을 잡아가며 도약을 쓴 덕분에 강후도 딱히 과민증을 자극받지는 않았다.
“후아. 후아. 후아.”
고생을 한 것은 강후인데, 벌러덩 뒤로 누운 것은 안영호였다.
아직 실력 있는 헌터로 성장하기 전의 모습이라 그런지, 안영호에게는 어설픈 구석이 참 많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꼼짝없이 납치당할 판이었는데, 이렇게 목숨 걸고 저를 구해주셔서…….”
안영호가 눈물을 글썽였다.
사실 목숨까지 걸고 구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 준다면 바로잡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맨입으로 도운 건 아냐.”
“물론 저도! 저도 아무 대가 없이 이 은혜를 갚으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안영호가 바짝 몸을 숙이면서까지 강후에게 최대한 예를 갖췄다.
진실밖에 말할 수 없는 헌터, 안영호.
그의 말에는 허풍이나 겉치레가 전혀 없다. 모든 것이 진심이다.
“저는 안영호입니다! 올해 스물셋입니다. 가명이라도 좋으니 은인의 이름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정선규. 올해 스물아홉. 본명은 아니지.”
“선규 형님! 너무 감사합니다!”
안영호의 성좌 특성에 맞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아니, 진실을 말하게 됐다.
말을 하지 않으면 진실을 숨길 수 있지만.
일단 입을 열게 되면 진실을 말해야 한다.
안영호가 가명에 형님이라는 호칭까지 얹어 부르니 참 어색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이도 알게 된 만큼, 강후가 편하게 말을 놓았다.
“왜 정화 길드가 널 쫓지?”
“모르겠어요. 자력으로 국내에서 성장해 보고 싶었고, 그래서 외삼촌의 후원도 뿌리치고 온 건데.”
“외삼촌이라면?”
“아, 저희 외삼촌이 일본 관서권에서 1위 길드 자리를 공고히 유지하고 있는…….”
“리코우 길드.”
“네, 맞아요! 아세요?”
“리코우 길드가 우리나라로 따지면 정화 길드 같은 곳인데 모를 리가.”
“네! 그 리코우 길드의 부 길드 마스터를 하고 계세요. 길드 마스터는 외삼촌의 둘도 없는 친구죠.”
“든든한 지원군을 두고도 굳이 국내로 온 모양이군.”
“네. 삼촌 덕 본다는 얘기는 듣기 싫었거든요. 그리고 전 한국이 더 익숙하기도 하고요.”
“음.”
“스즈키 후미야. 제 외삼촌이에요.”
익숙한 이름이다.
강후가 기억하는 원작의 내용과 안영호의 말에 아주 작은 불일치도 없었다.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어쨌든 제가 생각한 것과 길드의 운영이 맞지 않아 탈퇴를 했어요. 기간 계약이었던 것도 아니라서 문제 될 게 없었는데…….”
“어떤 부분이 맞지 않았지?”
“길드 소속이 아닌 소속 불명의 헌터를 치료하는 일이 꽤 많이 있었어요. 분명 국내 헌터는 아닌.”
“그리고?”
“지하 훈련장에서 패턴 분석을 이유로 같은 스킬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미 숙련도 최대라서 굳이 더 올릴 것도 없는 스킬을 말이죠.”
“패턴 분석이라고 했다고?”
“네. 분명히 그랬어요. 채관형 님이 그리 말하더군요. 헌터에게 가장 중요한 분석이라고.”
“…….”
짚이는 점이 있어, 강후의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유청화.
열세 개의 별 중.
다른 헌터에 대한 스킬 분석, 패턴 숙지를 바탕으로 흉내 낼 줄 아는 중국인 헌터가 존재한다.
강후의 스킬 강탈처럼 완벽하게 사용법을 인지하고, 최대 숙련도로 활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효율의 1, 2할 정도는 볼 수 있을 만큼의 하위 버전으로 카피가 가능한 것이다.
물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희생양’으로 하여금 계속 반복하게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데.
안영호가 말한 흐름이 유청화의 전형적인 스킬 카피 루트랑 거의 비슷했다.
부역자 엔딩 때문에 이미 지금 열세 개의 별은 거대한 흑막이 되어 있는 상태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 그들 사이에 이런 커넥션이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국적을 초월하는 연대감을 가진 열세 개의 별이니, 쓸만한 스킬을 학습하게 도와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이게 이렇게 흘러가나.’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정화 길드는 그 자체가 거대한 위선의 길드다.
심지어 자기 의지로 길드를 탈퇴한 사람의 뒤를 쫓아 납치를 시도하다니.
물론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은 헌터를 썼을 것이다. 꼬리가 밟혀도 언제든 자를 수 있는 헌터.
“일단 제 잔고에 있는 3억 원. 바로 드릴 수 있어요. 이건 아주 작은 사례일 뿐이고요.”
“사양 않고 받겠어. 사실 목숨값치고는 싼 것일 수도 있고.”
“맞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부탁해서 길드 차원에서도 꼭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에 오시면 제 소유와 명의로 된 던전에 대해서는 언제든 공략 가능하시게 해드릴 게요.”
“금수저군.”
“하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물론 그것과 별개로 오늘 형편없이 신세를 지긴 했지만요…….”
“데리러 올 사람은?”
“10분 내로 올 듯해요. 오는 길에 도로에서 조직 간의 전투가 있었나 봅니다. 막혔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정화 길드의 미행에 방치된 시간이 있었던 거군.”
“일이 꼬일려니까 한도 끝도 없이 꼬여버린 거죠. 어쨌든 계좌부터 알려주시면 바로.”
강후가 바로 계좌번호를 알려 주었다.
안영호의 말대로 그는 금수저가 맞다. 그래서 빨대를 좀 꽂아도 티는 전혀 안 날 것이다.
이후.
상황 정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안영호에게서 먼저 3억 원의 ‘성의 표시’를 받았고.
그다음, 강후는 안영호를 통해서 그의 외삼촌인 스즈키 후미야와도 통화를 마쳤다.
신강후에게는 없지만, 원작자로서는 가졌었던 5개 국어 능력을 활용한 막힘 없는 대화였다.
통화 내용은 간단했다.
길드 차원에서 조카를 구출해준 것에 감사를 표하며, 원한다면 대외 공고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강후는 허례허식은 전부 생략하고, 향후 일본에서의 활동에서 도움을 받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이 모든 대화 내용을 전부 문서화해서 보증하고 말이다.
전자 계약이 활성화된 지금, 거리에 상관없이 보증을 받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스즈키 후미야로부터 공식 약속을 받아낸 것은 리코우 길드 소유의 던전 공략 라이센스를 10차례 발급받기로 한 것이었다.
일본도 국내만큼이나 쓸만한 던전이 많은 만큼, 알차게 쓸 수 있는 카드 열 장을 갖게 된 셈이다.
“형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알려주신 연락처는 꼭 저만 알고 있겠습니다.”
“그쯤 했으면 가. 아까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몇 번을 하는 건지. 공짜로 도운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정말 감사합니다!”
끝까지 감사하다는 인사를 입에 달고 있던 안영호.
그렇게 그와의 짧은 만남은 끝이 났다.
강후로서는 생각지도 않게, 일본 쪽에 인연의 끈이 닿은 셈이었다.
일이 잘 풀리려는 모양이다.
* * *
적당한 모텔을 잡아 푹 잠이 들었던 강후가 눈을 뜬 것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이후로 경춘선과 경의중앙선을 번갈아 타며 양평역으로 향하자, 오후 4시 30분 즈음 도착했다.
적당히 초저녁을 앞둔 시간.
일에 착수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그때, 이예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 아니, 어제 뭔 던전을 혼자서 그렇게 빨리 돌았어요? 애초에 솔플도 쉬운 던전이 아닌데!
“딱히 시간 계산은 안 했는데.”
- 제가 생각한 것보다 선규 씨가 훨씬 빨리 나와서, 가드 계약 시간이 한참 남았다고요!
“하긴, 시간 계약일 테니.”
- 어쨌든 뭐, 깜짝 놀랐단 얘기예요. 던전이야 일분일초라도 빨리 돌려주면 좋긴 하지만요.
이예린은 칭찬을 마치 혼내듯이 쏟아부은 뒤, 멋쩍은 듯 목소리 톤을 낮췄다.
곱씹어보면 빨리 공략해 줘서 고맙고 대단하다는 뜻으로, 이예린식 버럭 버전이었다.
강후가 별말 없자, 이예린이 바로 빈 오디오를 채웠다.
- 허정태 건에 대한 보상은 알고 있죠? 다시 확인차.
“물론.”
- 다음 의뢰도 세팅되어 있어요. 이번은 잠입 의뢰인데…… 보수는 세지만 정말 어려울 거예요.
“어디 의뢰입니까?”
- 정화 길드예요.
“…….”
운명은 계속 이렇게 장난을 치는 모양이다. 물론 정화 길드의 의뢰라고 못할 것은 없지만.
- 어때요? 구미가 당겨요?
“보상만 확실하다면.”
- 최우선으로 봐 달라고 한, 던전 공략 라이센스 대여 위주로 알아보고 있어요. 더 알아볼게요.
“허정태를 처리하면 연락하죠.”
- 알겠어요. 파이팅!
“…….”
응원 멘트가 뜬금없기는 했지만, 별생각 없이 전화를 끊었다.
당분간은 어떤 의뢰를 하든 간에 최우선 순위는 ‘던전’이다. 즉, 레벨업을 무조건 우선시한다.
허정태 생포 의뢰도 던전 임대권이 없었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다.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강후가 시계를 봤다.
너무 밝은 시간도 별로고, 그렇다고 완전히 해가 진 이후도 별로다.
허정태가 레벨이 높은 만큼, 강후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서 굴릴 생각이었다.
어설프게 밝은 시간.
그 시간이 허정태 같은 돌격형 캐릭터의 시야를 교란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간이다.
천천히.
강후가 허정태의 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평역 인근에는 사람이 붐볐지만, 어느 누구도 강후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 * *
오후 6시.
서쪽 하늘로 충분히 넘어간 해가 붉은 노을을 만들어내며, 은근한 땅거미를 드리우기 전.
허정태가 집을 나섰다.
분명 그는 남자지만, 겉으로 봤을 때는 영락없는 여자였다. 여장을 한 것이다.
긴 머리에 대격변에 가까운 수준급의 메이크업, 여기에 보정 속옷의 힘까지 더해지자…….
천생 여자였다.
다리도 적당히 가늘어, 더 남자임을 짐작할 수 없게 했다.
허정태는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부터 한 남자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정화 길드의 채관형이다.
- 약속대로 이영민의 삼촌을 죽이면 남은 2억을 주지. 어때?
“저야 뭐, 챙겨주시면 다 합니다.”
목소리만큼은 숨길 수 없는 남자지만, 밖에선 입을 다물면 끝이다.
- 그래, 수고해.
“한 가지만 여쭤보겠습니다. 이영민의 삼촌이 죽으면, 이영민은 정화에 충성하게 되는 겁니까?”
- 그렇지. 우리가 길드 차원에서 삼촌을 죽인 범인이 ‘붉은 눈’이라고 할 거거든.
“역시…….”
- 그러면 갈 곳 없는 이영민은 우리 길드에 충성을 다할 수밖에 없게 되겠지.
“치밀하십니다.”
- 어쨌든 끝나는 대로 연락해. 보수는 바로 지급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