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진실의 눈, 안영호 (1)
* * *
“정말 본 적 없는 거죠?”
“없어. 그리고 있다고 해도 내가 왜 네게 말해줘야 하지? 그럴 의무 같은 건 없잖아?”
“우리 이클립스에게 협조해서 나쁠 건 없을 텐데요. 뒤통수에 눈 몇 개 단 걸로는 부족했나 보죠?”
“눈만 붙여놓고 방아쇠 하나 당기는 놈이 없던데. 왜? 우리 용병단이랑 한 판 붙을까 봐 쫄려?”
“쫄리긴요. 동현 님만 나오셔도 그쪽은 바로 정리되는 데 그럴 리가?”
“그럼 나오라고 하던가. 매번 방구석 파이터처럼 의자에만 앉아있는 주제에 허세는…….”
“어쨌든 못 본 겁니다? 나중에 본 적이 있는 걸로 밝혀지면 그냥은 안 넘어가요.”
“꺼져, 좀. 그냥.”
차소희가 대전역 인근에서 용병 스팟만 찾아다니며 강후에 대해서 조사를 하고 있는 탓에.
그녀의 조사가 데스크를 열고서 용병단 지원자를 받고 있던 이예린에게까지 닿았다.
이예린의 용병단인 청안(靑眼)과 이클립스는 오래전부터 앙숙 같은 사이였다.
둘 다 대전 권역에 뿌리를 두고 있는 데다가, 이권 문제로 이미 충돌 중인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클립스가 청안을 진즉에 쓸어버리지 못한 것은 이예린이 주변 인맥을 착실하게 잘 쌓아둬서였다.
특히 청안처럼 이클립스와 반목하고 있는 범죄 조직 흑사자와 이예린이 손을 잡았다.
마치 삼국지연의의 위, 촉, 오를 보듯이 서로 견제하는 동맹이 결성된 것이다.
어쨌든 아슬아슬하게 힘의 균형이 맞고 있는 상황이다보니, 어느 곳도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불철주야 고생하세요.”
“꺼지라 했다.”
“흥.”
차소희가 끝까지 이예린의 속을 긁고는 유유히 현장을 떠났다.
“미친년.”
이예린이 그녀의 뒤에 들으라고 시원하게 욕지거리를 박아주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클립스에서 사냥개를 보내서 강후 씨에 대해 조사할 정도면, 무척 관심이 크다는 얘기인데.’
강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생포가 목적인 듯했다.
죽일 거였으면 이렇게 묻고 다니지 않는다. 소리소문없이 추적을 하다가 목을 날려버리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사냥개를 보낸 사람 즉, 강동현이 강후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실력을 가졌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예린 역시 강후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고 있었기에, 그 관심이 이해가 안 되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과 같은 생각을 다른 누구도 같이 하고 있고, 그게 이클립스라는 점이 마음에 안 들었다.
‘적당히 꼬장 정도는 피워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훗.’
차소희가 강후를 찾기 어렵도록 방해하기는 쉽다.
그녀의 뒤에 적당히 눈을 붙이면 되니까. 동선만 파악해 둬도, 강후와 만날 일을 줄일 수 있다.
물론 강후에게 위치를 통보해주면서 말이다.
강후에게 깊은 인연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강후가 이클립스에 연줄이 생기는 것도 원하지 않는 만큼.
이예린은 자신의 의뢰꾼 – 용병단에서 의뢰만 받는 헌터 – 인 강후의 안전을 조금 더 신경 써주기로 했다.
장기적으로는 의뢰꾼이 아닌 용병단원으로 강후를 영입하고 싶은 마음도 있는, 그녀의 욕심이었다.
“창현아.”
“네, 단장님.”
“교선이 불러. 간만에 일 좀 시켜야겠어.”
“네, 알겠습니다.”
이예린이 자신의 ‘눈’을 불렀다.
* * *
강후는 한 잔 더 채운 솔라키움 버스트와 함께, 차소희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쥐 죽은 듯이 지내는 것이 아니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은 기정사실과도 같았으니까.
혹시 싶어 이클립스가 인수, 운영하고 있는 헌터 커뮤니티나 공식 홈페이지를 살펴봤지만.
그들 차원에서의 공개적인 수배는 없었다. 그 말은 자신을 죽이는 것이 목적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문제는 차소희를 만나게 되면, 그때 가서 고민을 해도 될 듯했다. 의중을 떠봐야 할 문제다.
“한잔 더.”
“마지막입니다, 손님. 저희가 솔라키움 재고가 다 떨어져서…….”
“괜찮아요. 마지막 잔으로 할 거니까.”
다음 잔을 기다리며, 강후는 생각에 잠겼다.
허정태에 대한 건까지 처리하고 나면, 그다음을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계획이었다.
이예린에게 새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다른 루트는 없을까 싶었던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그라운드 제로였다.
과거 비무장지대로 불리던 DMZ부터 시작해서 ‘옛’ 북한의 땅으로 쭉 이어지는 구역.
사는 사람 없이, 몬스터만 가득한 이 영역을 헌터들은 그라운드 제로라고 불렀다.
서쪽으로는 사리원, 동쪽으로는 원산까지의 광활한 땅이 전부 그라운드 제로였다.
이곳은 별도의 허가 없이 출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출입자의 안전은 스스로가 챙겨야 한다.
‘레벨업 측면에서도 괜찮고, 무엇보다 매드 솔라키움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니까.’
매드 솔라키움.
솔라키움의 농축 버전이다.
좀 더 강력한 진정 효과를 가진 녀석으로 섭취 시에는 약 30분 동안 마나 과민증에서 ‘해방’된다.
물론 이후에 큰 후폭풍이 오긴 하지만, 어쨌든 전투에 확실한 도움은 되는 셈이다.
매드 솔라키움은 자라나는 곳도 대중이 없고, 애초에 얻기가 힘들어 시장에서 팔지도 않았다.
얻으려면 직접 그라운드 제로를 뒤지면서 발품을 팔 수밖에 없다.
‘애초에 내가 짠 공간이지.’
그라운드 제로는 원작에서 ‘신강후’가 열세 개의 별 중에 둘을 끌어들여 처치했던 곳이다.
원작자로서 지형도까지 세세하게 그리며 짰던 공간이라, 쓸만한 포인트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전부 다 꿰뚫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필드 보스 몇 마리와 매드 솔라키움 몇 줄기는 찾아낼 자신이 있었다.
“솔라키움 버스트입니다.”
안경을 쓴 무뚝뚝한 남성 바텐더가 강후에게 마지막 솔라키움 버스트를 건넸다.
옆에 쭉 쌓인 다섯 개의 칵테일 잔이 강후의 뚝심 있는 취향을 짐작게 했다.
바로 그때.
3층에 위치한 모던 바의 유일한 출입문이 흔들리더니,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가 막 잔을 입에 대기 시작한 강후를 보고는.
“형! 너무 내가 오래 기다리게 했지? 삼촌이 보낸 사람들이 아직 안 와서 말이야!”
능청스럽게 손을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다만 행동과 달리, 눈빛은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후가 별 대꾸 없이 그를 쳐다보며 슬쩍 어깨 뒤를 살폈다.
그러자 사복을 갖춰 입은 – 그래서 사복 같지 않은 – 남자 둘이 문밖에서 안을 살폈다.
그들의 시선은 번갈아서 남자와 강후를 훑었고, 이내 강후와 시선이 마주치자 사라졌다.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남자는 강후가 홀로 앉아있던 테이블 맞은 편에 앉아서는 말을 이었다.
이제 눈빛은 안정을 찾았는데, 반대로 테이블 위에 올려둔 두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 잘 지냈지?”
“붙은 눈은 일단 떨어졌어.”
“아…….”
덤덤하게 미행자 둘이 일단 시야에서 사라졌음을 말하는 강후를 보며 남자가 흠칫했다.
“상황은 알겠는데, 애꿎은 사람을 끌어들이는 건 질색이야.”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강후의 냉랭한 지적에 그가 풀이 죽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때, 강후는 남자에게서 확인되는 성좌 정보를 보고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실의 천리안】
【중립 성향의 성좌. 원하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진실을 말하게 하지만, 자신 역시 항상 진실만을 말해야 합니다.】
‘진실의 눈, 안영호.’
바로 그의 이름이 떠올랐다.
원작에서 신강후와 더불어 정화 길드의 대척점에 서게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기 전까지 정화 길드를 혐오했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최후는 정화 길드의 서열 3위였던 신태석을 끌어안고 함께 죽은 폭사였다. 그만큼 뿌리 깊은 원한을 갖고 있었다.
어쨌든 작중 안영호의 등장 시점은 지금으로부터 3년 후.
게다가 국내가 아닌 일본이 주 무대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의 외삼촌이 일본 굴지의 길드 중 하나인 리코우 길드의 부 마스터라서다.
굳이 좋은 빽을 둘 수 있는 일본을 두고, 국내에서 위험하게 활동할 필요가 없었던 셈.
그런데 왜 국내에 있는 걸까?
‘그럼 정화 길드를 혐오하게 된 계기가 국내에서 활동하다가 꼬인 탓인 건가?’
원작에는 없던 부분이지만, 배드 엔딩과 맞물려 재구성된 과거에는 어울리겠단 생각이 들었다.
예상이긴 하지만, 미행자 둘이 정화 길드의 사람일 수도 있다.
안영호는 중요한 인물이다.
일본의 리코우 길드가 든든하게 뒷배가 되어주는 인물이다 보니, 이용할 가치도 많다.
지금 시점이면 한없이 약한 때일 터.
더군다나 힐러라서 전투는 더욱 젬병일 때겠지.
그러니 미행자들과 싸우거나 따돌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여기까지 떠밀려 온 것일 터다.
처량하게 뒷모습을 남기고 떠난 안영호의 빈자리에 찬바람이 머물렀다 지나갔다.
탁!
강후가 남은 솔라키움 버스트를 한 번에 들이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이제 막 반층 정도를 내려간 안영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예?”
“상황을 요약해 봐. 짧게.”
“정화 길드에 있다가 탈퇴했는데, 그 뒤로 미행이 붙었어요. 그런데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상이 맞았다.
원래의 흐름대로면 안영호는 여기서 정화 길드에 ‘납치’를 당하게 되는 거겠지.
이후 그의 삶도 원작의 신강후처럼 완전히 꼬이고, 그들에 대한 혐오를 키워가는 것일 터다.
“대기.”
강후가 안영호를 멈춰 세우고는 그를 타깃으로 삼아, 횡 이동으로 은신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층을 더 내려와 유리 창문 밖으로 아래를 살피니, 이질적인 광경이 보였다.
일단 입구에는 아까 봤던 미행자 둘이 연초를 태우며 서 있다.
주변에 사람은 없고, 미행자 둘의 바로 옆에는 정체불명의 검은 밴 하나가 있다.
‘이건 너무 허술하지.’
입구만 막았을 리 없다.
건물의 출구는 엄밀하게 따지면 아래도 있지만, 위도 있다.
오히려 보란 듯이 입구를 막고 있는 것을 보면, 대놓고 옥상으로 가도록 그림을 짠 듯하다.
‘하여간 나쁜 짓에서는 더 체계적인 놈들이야. 이게 다 채관형의 입김이겠지.’
일단은 안영호를 구하는 것으로 계획이 섰다.
어설픈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안영호의 이용 가치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일과 감정에 진심인 안영호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 되어준다면?
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보답하고 은혜를 갚으려 할 것이다.
성격이 애초에 그렇다.
원작에서도 정화 길드의 입장에서야 빌런이었지, 리코우 길드에게는 천사 같은 사람이었다.
“기다려. 내가 옥상으로 길을 뚫지.”
“예?”
“위에 있는 놈들을 처리하겠다는 뜻이야. 당신은 그다음에 올라오면 되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 인사는 상황이 다 정리되면 듣자고. 일단 4층 계단에서 기다려. 5층 다음이 옥상이니.”
“네. 알겠습니다.”
팟.
강후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횡 이동으로 은신 상태에 돌입하며 사라졌다.
안영호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강후의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그사이.
강후는 열려 있던 창문 밖으로 몸을 걸친 뒤, 도약을 이용해 한 층씩 위로 올라갔다.
모든 체중을 고스란히 두 팔로 감당해야 했지만, 늘어난 근력과 체력이 이를 충분히 가능하게 해줬다.
게다가 아직 주변에 헌터도 없고, 공격 스킬을 활용 중이지 않았기에 은신도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3층에서 4층, 4층에서 5층, 그리고 난간까지 강후가 도착하는 동안.
1층의 두 미행자도, 옥상에 미리 자리를 잡고 있었던 두 헌터도 강후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순간.
난간에서 몸을 훌쩍 날린 강후가 옥상으로 들어오는 철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헌터를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