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스킬 강탈 (4)
* * *
글라스에 채워진 와인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채워지기를 몇 차례.
주변 안전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집 안에서, 두 여자가 마음 편히 와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따금 삐, 하고 경보음이 울리기도 했지만 지나가던 길고양이가 남긴 흔적이라 개의치 않았다.
“언니, 요즘 정말 보기 힘들어!”
“남이사. 너도 바쁜 건 마찬가지 아니야? 그런데 어쩐 일로 대전에 왔어?”
“뭐, 용병이 다 그렇잖아? 일감이 어딨나 싶어서 돌아다니다 보면 대전도 가고, 부산도 가고.”
“끝까지 내가 보고 싶어서 왔다는 얘기는 안 하네?”
“언니야 항상 보고 싶지! 근데 나를 만나줘야 말이지? 이렇게 만난 것도 신기할 정도인데?”
“내가 한 전화의 10%만 잘 받았어도 진즉에 만났을걸? 남자 만나는 중인지 받지도 않더만?”
“이렇게 서로 폭로전으로 가는 거야? 호호호.”
“어쨌든 만나니까 좋다, 상미야. 요즘 좀 외롭기도 했거든.”
와인 삼매경에 푹 빠진 윤상미와 한서연.
둘은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언니 동생 사이이자, 둘도 없는 친구 사이기도 했다.
다만 헌터가 된 이후로는 서로가 추구하는 바가 달라서 성장의 방향성이 달라지게 되었다.
윤상미는 떠돌이 용병이 됐고.
한서연은 해어화 길드에 간 것이다. 해어화 길드는 정화 길드의 위성 길드로 대전 지부격이었다.
“언니.”
“응?”
“나 신기한 헌터 한 명을 만났어. 오산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동행을 하게 됐는데.”
“얘! 초면인 헌터랑 그렇게 쉽게 동행을 해? 어디 소속일지 알고 그렇게 물렁하게 굴어?”
“에헤이. 내가 이런 일 한두 번 하나? 다 스스로 지킬 자신이 있으니까 그러는 거지.”
“흠······. 좋아. 어쨌든, 그래서?”
“이름은 정선규. 물론 가명이겠지만 동행으로 대전역에 오게 됐거든. 그리고 알다시피.”
“알아. 클럽 하데스에서 벌어진 그 사건. 네가 거기서 탈출했다 했잖아?”
“어! 그때 그 사람이 나 대신 앞길을 뚫어줬는데 말이야. 정말 공격이 간결하고 파괴적이더라.”
“짜게 평가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운할 윤‘소금’ 씨가 이런 극찬을 한다고?”
“언니. 난 칭찬할 만하면 무조건 해. 그간 그럴 만한 헌터들이 없었을 뿐이지!”
“클래스가 뭐였는데?”
“암살자 클래스. 어지간한 헌터는 일격에 제압하거나, 바로 빈틈을 찾아내 공략하더라고.”
“특이점은?”
“각 스킬마다 완성도가 정말 높아. 숙련도가 엄청 높은 거겠지. 레벨이 꽤 높은 것 같았어.”
“정선규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가명으로도 생소한 이름인걸?”
“그러니까 말이야. 활동한 지는 얼마 안 된 듯했어. 이예린이랑도 두 번째 거래였다고 하더라고.”
“두 번째?”
“응!”
이 시기에 공교롭게 두 번째 거래를 할 만한 사람이 문득 한서연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물론 이예린을 찾아와서 의뢰를 받는 용병이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하루에도 몇십 명은 온다.
하지만 최근에 자신이 직접 이예린을 소개시켜줬던 강후가 떠올라 흠칫했다.
첫 의뢰를 잘 수행했다면, 지금쯤 딱 두 번째 의뢰를 요청할 때가 됐을 테니까.
하지만 청명 수용소에서 막 탈출한 강후가 윤상미의 극찬을 들을 실력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그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면 진즉에 수용소를 탈출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언니 예전 남친. 그분은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언니에게 연락했었다며?”
“맞아. 강후 씨.”
“어떻게 된 거래?”
“이클립스 놈들에게 납치를 당해서 청명 수용소로 끌려갔었던 것 같아. 마석 광산으로.”
“그럼······ 거기서 탈출을 한 거야?”
“응. 그것만 들었어. 어떻게 탈출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얘기해주지 않더라.”
“전 남친 분도 언니랑 연락 두절되기 전에 막 헌터가 됐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렇지. 그 상태에서 수용소에 갇혀 지냈으니, 성장을 제대로 하진 못했을 텐데······.”
한서연도 이제 와 생각하니 의문스러운 부분은 있었다.
강후에게 있어서 레벨이나 스탯 같은 요소가 달라진 것은 없을 텐데.
그래도 나름 실력 있는 간수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수용소를 어떻게 탈출한 걸까?
“언니, 전 남친 분에게 미련 많았잖아. 좀 더 세게 붙잡지 그랬어? 헤어지고 힘들어했잖아.”
“알잖아. 강후 씨, 성격. 한 번 아니면 끝까지 아닌 사람이야. 나 몰래 걱정은 해 주더라도······.”
“언니는 너무 과거에 살아서 탈이야.”
“헤어지기 전에 네가 했던 말을 강후 씨가 똑같이 내게 해 주더라. 사람 생각은 다 똑같은 거겠지?”
“에이, 모르겠다! 와인이나 더 마시자, 짠!”
둘이 한 사람을 두고 한 얘기지만, 그들은 공통 키워드에 강후가 있다는 사실은 짐작도 못 했다.
가명이 수시로 바뀌는 세상에서 누군가를 ‘이름’으로 기억하는 것은 정말 의미 없는 일이었다.
* * *
“수지맞았네.”
강후가 초록색 마석을 집어 들었다. 개당 1억 원쯤 하는 마석이다.
파란색 마석이 천만 원 정도 하니, 색상이 한 등급만 올라도 가격이 확 뛰는 셈이다.
보통 보스 몬스터에게서 초록색 마석을 획득할 확률은 10%로 본다. 알리샤 정도의 수준을 전제로.
얻기 쉬운 마석은 분명 아닌 셈이다.
미신이기는 하지만 보스 몬스터를 빨리 처치하면, 보상이 좋다는 얘기도 있긴 했었다.
원작에서도 소위 ‘카더라’였기에 검증된 데이터는 없지만, 어쨌든 확실히 빨리 잡기는 했다.
‘마나 과민증에 대한 적당한 긴장이 내게는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강후는 그렇게 생각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이 부담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 심리를 만드는 역할도 같이 한다고 보는 것이다.
깔끔하게 계산된 공격을 시도하지 않으면, 과민증의 영향으로 수세에 몰릴 가능성이 있어서다.
물론 이건 긍정적으로 생각했을 때의 얘기고, 뒤집어 생각하면 항상 부담을 갖는다는 뜻도 된다.
알리샤의 죽음과 함께 전리품으로 남은 것은 두 개.
하나는 4등급의 아이템 반지고, 다른 하나는 스킬북이었다.
강후가 반지부터 먼저 확인했다.
【핏빛 탐식 - 반지】
【등급 : 4등급】
【모든 스탯 +15】
【출혈 상태가 대상에게 적용되고 있을 때, 출혈 상태를 50% 더 악화시킵니다.】
“출혈 찌르기의 짝을 이렇게 찾네. 하긴, 혈화와 잘 어울리는 특성이기도 하니까.”
알리샤의 스킬에 궁합을 맞추기 위해 만들어졌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강후를 위한 아이템이 됐다.
바로 착용 등록을 마쳤다.
아이템 등급도 등급이고.
구성에서 무엇 하나 빠질 것이 없는 완벽한 반지였다. 모든 스탯 15는 무조건 이득일 수밖에 없다.
【체력 : 146】
체력 스탯을 보았다.
다른 스탯은 여전히 갈 길이 멀어 딱히 봐둘 게 없지만, 체력은 정말 중요했다.
처음 수용소에서 눈을 떴을 때의 체력이 10이었다.
지금 정도의 체력 스탯이면, 운동선수와 비교될 수준은 한참을 뛰어넘는다. 지구력이 상당히 늘었다는 얘기다.
물론 이것은 평상시 경우고, 마나를 집중적으로 활용하는 ‘전투’ 시기가 되면 계산이 달라진다.
일단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부작용이 본격적으로 발동되면.
그때부터는 극심한 두통, 구역감과 함께 초당 1의 체력이 빠지게 된다.
과거와 비교하면 마나 과민증이 발동되더라도, 참고 얼마간은 버틸 맷집이 만들어진 셈이다.
게다가 전신에 과부하가 걸리는 시점도 예전에는 스킬 두세 개를 연타로 사용했을 때라면.
지금은 네다섯 번까지는 충분히 버틸 정도가 됐다.
전투에서 스킬 한두 번을 더 쓰고 안 쓰고의 차이는 매우 크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기에.
‘조금 사람다워지기는 했군. 적어도 평상시에는 말이야.’
강후가 어색한, 하지만 그래도 충분한 만족감이 담긴 미소와 함께 다른 전리품을 확인했다.
스킬북이다.
【스킬북 – 대참수】
【특이 사항 : 검사 전용】
【체력과 마나를 일정량 소모하여 대상을 일격에 거세게 내려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대로 학습해서는 클래스의 페널티로 효과를 10%밖에 볼 수 없었다.
암살자 클래스인 강후에게는 약간 내리친 정도의 수준으로만 스킬이 발현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페널티를 걷어내는 것만 가능하다면, 얼마든지 일격필살의 용도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이건 좀 고단수의 꼼수가 필요하니까, 일단 킵 해 두기로.’
당장 스킬을 체득할 수 있는 방법은 없기에, 며칠간 보류해 두기로 결정했다.
다른 방식을 써서 페널티 없이 학습할 수 있는 만큼, 굳이 팔 이유는 없었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
가평역 인근의 번화가로 들어온 강후가 바에 들러, 전투로 달아올랐던 머리를 식혔다.
이곳은 나름 안전지역이었다.
길목 중간에 가드(Guard)들도 있고, 가평 헌터 치안청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았다.
모던 바인 이 바에 다행히 솔라키움 버스트가 있었고, 강후는 취향대로 한 잔을 시킬 수 있었다.
‘하데스에서부터 못내 아쉬웠던 한 잔을 이제 마시네.’
강후가 무뚝뚝한 남성 바텐더에게서 받은 솔라키움 버스트를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먼 길을 돌아온 한 잔이다.
보상심리일까?
“솔라키움 버스트, 두 잔 더.”
더 주문했다.
베니가 말했던 솔라키움 버스트 특유의 맛에 대한 이야기도 새록새록 떠오르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른 법인데, 나한테만 맛있으면 그만 아닌가.
두 번째 잔을 들이키던 강후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봤다.
확실히 근육이 좀 붙었다.
체력도 늘었고.
알코올이 좀 들어가도 몸이 대책 없이 늘어지는 느낌보다, 적당하게 이완만 되는 느낌이 난다.
일단 하루 정도는 푹 쉰 다음에 허정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설정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닌 이상, 허정태가 어디에 살고 있을지는 계산이 됐다.
다만 허정태와 관련된 일을 처리하고 나서, 그다음에 무엇을 할지가 고민이 됐다.
휴식은 중간중간에 쉼표로만 끝날 일이고, 이 몸뚱이는 꾸준하게 성장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모든 특권을 독식하고 있을 장시환을 생각하면, 몇 걸음은 더 앞서 뛰어야 했다.
‘그라운드 제로에 다녀오는 일을 조금 더 일찍······.’
강후의 생각이 좀 더 깊어지려던 그때.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다.
한서연, 그리고 이예린.
【한서연】
【해어화 길드의 한서연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발신자 이름을 보니 무미건조하게 표시된 세 글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아울러 발신자의 설정으로 추가된 인사말도 보였다.
“······.”
한서연이 정화 길드의 위성 길드에 들어가 있을 줄이야. 유쾌한 일은 분명 아니다.
뭐, 이것은 지금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그녀와 충돌할 일이 없을 수도 있고.
강후가 전화를 받았다.
“응.”
- 오빠, 미안해. 잠깐 통화 괜찮아? 보안 전화야. 도청은 안 되니까 안심해.
“괜찮아. 무슨 일이지?”
- 대전역에 차소희가 왔어. 방금 아는 동생과 와인을 좀 더 사려고 나왔다가 차소희를 봤는데.
“차소희?”
모를 수 없는 이름이다.
이클립스의 3인자이며, 강동현의 둘도 없는 심복이니까.
강동현의 ‘사냥개’로도 불린다.
- 용병들이 모인 핫스팟만 돌아다니면서 오빠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어. 오빠 본명과 함께.
“핵심은 차소희가 날 쫓고 있다, 그거지.”
- 응, 맞아. 오빠, 조심해.
“고마워. 끊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