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스킬 강탈 (3)
* * *
얼마 후.
황야에서 메인 보스와 마주친 강후는 곧바로 한바탕 교전을 벌였다.
말이 좋아 교전이지, 미친 듯이 쏟아지는 상대의 공격을 대응하며 피하기 바빴다.
“그냥 미쳤군.”
강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림자 흑마법사, 알리샤.
여성형이지만 목소리만 놓고 보면 중성에 가까운, 묘한 보이스를 가진 보스 몬스터였다.
물론 특징은 그게 아니다.
김목현의 실력도 하찮게 느껴질 정도로 전투에 특화된 실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시작부터 퍼붓기 시작한 흑마법의 맹공 때문에 강후는 한 번도 그녀에게 접근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 까다로운 것은.
알리샤가 전면의 방어는 강후를 노리는 공격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방향으로의 방어는 몸을 중심으로 순환하는 원형의 스킬로 대응한다는 점이었다.
보통 수호 마법이라 부른다. 몸을 중심으로 계속 회전하며 접근하는 적을 노리기 때문이다.
‘저것 때문에 도약이랑 횡 이동은 사실상 봉인이나 다름없는 상태고.’
횡 이동을 하면 알리샤의 후방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위치가 딱 수호 마법의 테두리였다.
무슨 말이냐면, 횡 이동을 성공시켜도 수호 마법에 당하면서 곧바로 은신이 풀린다는 얘기다.
당연히 수호 마법 자체의 대미지에 노출,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하고 난타전을 하자니, 알리샤의 보스 스킬인 혈화가 마음에 걸렸다.
상처가 어느 정도 누적되면, 그녀는 혈화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면 강후가 입은 상처와 흐르는 피가 하나의 기폭제가 되어, 폭발을 일으킬 터.
가뜩이나 낮은 체력으로 고생하는 비루한 이 몸뚱이라면, 혈화에 즉사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강후만 알리샤를 까다롭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알리샤 역시, 전투 시작 이래로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상황이 불만족스러웠다.
공략으로 던전이 리셋되어 다시 등장해도 과거의 데이터를 공유하는 것이 메인 보스의 특징.
그래서 알리샤도 다양한 전투에 대한 데이터를 갖고 있었다.
한데 강후처럼 초반의 전투에서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시키지 못한 케이스는 없었다.
강후의 접근을 막기는 했지만, 사실 그뿐이었던 것이다.
방어의 측면에서는 성공일지 몰라도, 공격의 측면에서는 성과 없이 마나만 소모한 셈이 됐다.
게다가 강후가 도약 스킬만 활용해서 손쉽게 피했기에 그의 스킬 구성에 대한 판단도 부족했다.
알리샤가 강후를 매섭게 노려보며 다른 빈틈을 찾고 있는 사이.
강후 역시 그녀를 끊임없이 응시하며, 지금의 전투에 의미를 더해 주고 있었다.
‘까다롭지만, 그래서 더 좋다.’
전투의 모든 과정이 아슬아슬하고, 또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이쯤은 되어야 승리했을 때, 극복하고 성장하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솔직히 레벨 수준에 맞게 다니면 편하긴 편할 것이다. 한두 방이면 다 죽을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성장도 정체되고, 특히 쓸만한 강탈 스킬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 강후가 다른 헌터와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쭉쭉 성장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한참 상위 수준의 던전을 도전하면서 경험치를 독식하니, 성장을 못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길드 차원에서 전력을 다해 밀어줘도 최소 보름 이상은 잡아야 했다.
그것도 최소로 잡았을 때고, 적당히 쉬고 대기하는 시간까지 더하면 한 달에 가까워진다.
“흠······.”
좀처럼 소리를 잘 내지 않는 강후가 오랜만에 침음성을 냈다.
벌써 씹어 넘긴 솔라키움의 개수만 2개였다.
제대로 된 전면전도 없이, 서로 탐색전만 한 수준인데 말이다.
‘일단 공격 레퍼토리는 다 파악한 것 같군. 내 쪽에서 공개한 스킬은 도약이 전부고.’
강후는 상황은 열세지만, 전략적 판세로는 우세에 있다고 판단했다. 근거는 충분히 있었다.
승부수를 던질 때가 된 듯했다.
‘수비의 달인, 이런 건 개 짖는 소리지. 무승부는 절대 승리가 아냐. 실력 없는 자의 변명일 뿐.’
파앗!
강후의 몸이 앞으로 쭉 쏠리며, 지금까지 내디딘 적 없는 전방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알리샤의 공격을 좌우, 혹은 후방 도약을 활용해 멋지게 피해냈지만.
이제는 돌진하는 가운데 앞으로 피해야 한다. 상당한 고난도 작업이지만, 해내야 할 것이기도 했다.
나중에 알리샤보다 더 강한 보스 혹은 헌터를 상대하면, 밥 먹듯이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누가 보아도 뻔한 루트인 좌우, 후방 회피를 선택하면 그때는 노림수 한 번에 바로 죽는다.
‘보여. 잘 보인다.’
강후의 고유 재능인 제법 우수한 주력과 대단히 뛰어난 동체 시력이 빛을 발했다.
알리샤가 자신에게 퍼붓는 흑마법의 경로가 빠르긴 해도, 분명히 예측할 수 있을 만큼은 보였다.
파앗!
첫 번째로 날아온 진보라 불꽃은 바로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진보라 불꽃의 구체가 초저공의 비행은 불가능하다 보니, 몸을 바짝 낮추는 것으로 회피가 됐다.
알리샤도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그 시점에 두 번째 마법인 바람 화살이 이번에는 지면에 낮게 깔린 채로 날아오고 있었다.
방금까지의 노림수와는 전혀 다른 성격의 공격이다. 바람 화살은 초저공 비행이 가능했다.
“후!”
강후가 숨을 토해내며, 몸을 훌쩍 날렸다. 이럴 때는 공중 도약이 가장 적절하다.
‘역시.’
이미 타이밍을 맞춰서 허공에 몸을 띄운 알리샤가 강후에게 다음 공격을 연계하고 있었다.
과연 메인 보스다웠다.
중간에 공격 흐름이 비는 구간이 없다. 일전의 디펜더 3인조와 비교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다.
강후도 알리샤의 빈틈없는 노림수만큼 다음 대응 수단을 미리 생각해 둔 후였다.
【환영술】
스파앙!
강후의 몸이 흩어졌다.
환영술 자체가 추진력을 부여해주는 효과가 있다 보니, 공중에서 강후의 방향이 살짝 꺾였다.
굳이 다른 방향으로 기동하려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동선이 비틀어진 것이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알리샤의 다음 마법이 옆으로 지나가고, 이번에는 강후의 턴이 왔다.
볼 것도 없이 강후가 바로 납치 스킬을 썼다.
마법사는 어떻게든 끌고 와 가까이서 패야 한다!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대명제이기도 했다.
다음 순간.
“꺄악!”
시종일관 강후처럼 묵묵히 전투에 임하던 알리샤에게서 하이 톤의 비명이 들려왔다.
강후의 뜻대로 상황이 꼬여버렸음을 깨달은 메인 보스의 확실한 자각이었다.
‘미친.’
끌려오는 와중에도 알리샤는 악으로 깡으로 양손에 마법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대책 없이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발악이었다.
메인 보스로서 박수를 보낼 만한 근성인 셈이다.
이대로 붙으면 강후도 그녀에게 일격을 먹이겠지만, 반대로도 호되게 한 방 먹을 상황이었다.
오드득!
강후가 아껴 씹으려던 솔라키움을 아예 입 안에 넣은 채로 우적우적 씹었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나 과민증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것 같아서였다.
알리샤와 충돌하기 직전.
강후가 횡 이동을 전개하며, 그녀의 뒤로 돌아갔다.
원래는 끌려온 그녀를 바로 단검으로 손볼 요량이었지만, 전략적으로 포기했다.
동시에 보호 방벽을 펼쳤다.
지금까지 전략적으로 노출을 아껴왔던 스킬을 한 번에 대방출한 것이다.
카드드득!
보호 방벽이 알리샤의 수호 방패와 맞물리면서, 격렬한 반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불판 두 개를 서로 겹쳐놓고, 누가 더 뜨거운가를 시험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수호 방패를 보호 방벽이 받아내 주면서, 강후에게는 완벽한 프리딜 타임이 생겼다.
안타깝게도 이쯤에 몸을 조금이라도 돌리고 있었어야 할 알리샤의 반응은 반 박자 늦었다.
아마 수호 방패의 힘을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암살자가 이런 방어 스킬이 있을까 싶었겠지.
덕분에 ‘반 박자’의 이점을 얻었다.
본능적으로 우위를 읽어낸 몸이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고, 손은 이미 앞으로 쭉 뻗어져 있었다.
푸욱!
“꺄아아······!”
왼쪽 등을 뚫고 들어간 단검이 깊숙한 곳까지 쭉 파고들며, 그녀에게 고통을 선사했다.
【화염 속성 부여】
이어 강후가 바로 들고 있던 단검에 화염 속성을 부여했다.
상처를 더 깊게 만들고,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을 열기에 화염보다 더 좋은 속성은 없다.
마나를 있는 힘껏 불어넣자, 단검이 급격하게 달아오르며 용광로에서 막 꺼낸 듯한 느낌이 됐다.
“X미.”
참았던 욕이 터져 나왔다.
뒤가 없다는 생각만으로 마나를 전부 쏟아 넣었더니, 마나만큼 뇌도 같이 쏟아지는 느낌이었다.
몸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중이지만, 또렷한 정신은 그 몸을 기어이 알리샤의 앞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너만 악바리인 건 아냐!”
강후가 양손으로 힘껏 단검을 움켜쥔 채로 전력을 다해 그녀의 가슴 위쪽에서 날 끝을 내리찍었다.
그것은 마치 녹아내리기 직전의 뜨거운 금속이 뼈와 살을 태우며, 뚫고 내려가는 것과 같았다.
“······!”
제법 강인한 육신을 가진, 명색이 메인 보스인 그녀도 이 단검은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평범하게 날붙이로 찔러대는 것이 아니라, 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붓는 느낌이었으니까.
피부가 녹고, 살이 녹고.
이어서 뼈가 녹아내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나약한 심장은 당연히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지금까지 상대한 수많은 적 – 헌터 – 들이 알리샤의 머릿속에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느꼈다.
메인 보스의 목숨이 때로는 이렇게 하찮게, 형편없이 죽을 때도 있구나······하고.
적이 아닌 아군이었다면 감탄을 마지않았을 만큼.
시작부터 끝까지 강후의 대응과 노림수는 깔끔했다.
전략적으로 스킬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까지, 모두 말이다.
쿠웅!
그렇게 쓰러진 알리샤는 부릅뜬 눈과는 달리, 끊어진 숨을 다시 되살리지는 못했다.
【레벨이 대폭 올라 32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단번에 세 계단이 뛰었다.
동시에 암살자의 30레벨 기본 스킬인 ‘가속’이 자동으로 추가됐다.
공격 가속, 움직임 가속과 같이 다양한 가속이 필요해질 강후에게 가장 유용한 스킬이었다.
게다가 최대 숙련도가 바로 적용되는 만큼, 가속의 범위와 확장성도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강탈이 활성화된 대상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스킬은 다음과 같습니다.】
【혈화】
그리고 처음부터 기대하고 있었던 보스 스킬 ‘혈화’도 얻었다.
다른 헌터에게서는 유사한 형태를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는 스킬이다.
활용 가치는 무궁무진했다.
전투 초반에 확실한 상처 하나를 만드는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