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폭풍의 언덕 (2)
* * *
용산역에서 내린 강후에게 여유 시간이 생겼다.
이전과 달리 사람의 발길이 뜸해진 탓에 가평 방면으로 향하는 기차가 줄었기 때문이다.
강후가 먼저 들른 곳은 용산역 내에 위치한 헌터 마켓이었다.
헌터 치안청에서 직접 운영하는 마켓이라 그런지 규모도 크고, 내부에서 다루는 품목도 많았다.
가진 돈은 총 2억 원.
금액을 최대한으로 쓰는 범위에서 가장 좋은 아이템을 찾으러 돌아다녔고, 성과는 있었다.
【창공의 환희 - 무기】
【등급 : 5등급】
【근력 +50】
【30분 이상의 비전투 상태 지속 시, 체력 회복 속도가 5배 증가합니다.】
자거나 푹 쉴 때, 체력 회복에 도움이 꽤 될 수 있을 아이템이었다.
물론 조건부로 만능은 아니다. 비전투 상태는 마나를 조금도 쓰지 않고 있는 것이니까.
항상 주변을 경계하면서 조심해야 하는 수도권 밖 영역에서는 이럴 일이 흔하지 않다.
그래도 근력이 대폭 올랐다.
근력을 겨우 1 올려주던 연습용 단검을 버리고 무기를 갈아치우니, 극적으로 느낌이 달라졌다.
강후가 역 앞의 화단에서 주워들은 돌멩이 하나를 꽉 움켜쥐고는 힘을 주었다.
우드드드득. 우드득.
평소 같았으면 으스러뜨릴 엄두도 나지 않았을 돌멩이가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 근력은 이런 거지.’
스킬의 가공할 만한 위력 덕분에 그간 뒤로 미뤄둔 부분이 없지 않기는 했지만.
사실 모든 힘의 근간이 되는 근력은 한 번도 중요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암살자 클래스라고 해서 무조건 빠르게 움직이는 민첩함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순간적으로 육신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려, 적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원초적인 힘도 중요하다.
‘마나 과민증이 전투를 치를 때마다 신경을 잔뜩 쓰이게 만드는 것은 맞지만······.’
강후가 습관적으로 이마를 손끝으로 훑으면서 스스로 평가했다.
마나 과민증에는 분명 일장일단이 있지만, 단점보다는 장점이 압도적으로 많다.
클럽 하데스에서 벌어졌던 전투만 해도 그랬다.
부작용은 차치하고 마나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강후는 아낌없이 스킬을 퍼부을 수 있었다.
마나 고갈을 걱정해야 하는 다른 헌터와는 결이 아예 달랐던 것이다.
오죽하면 윤상미가 몇 번이고 ‘마나 안 부족해요?’하고 물어봤을까.
이해가 안 돼서였을 터다.
그때.
꽈르르르륵!
참고 참았던 배에서 천둥이 치는 소리가 났다. 생각해 보니 새벽부터 먹은 것이 없었다.
“간만에 서울 물가 체험이나 좀 해 봐야겠군.”
비싼 것은 알지만, 아무것도 안 먹고 던전 공략을 준비할 수는 없는 법.
음식점으로 향했다.
그리고.
“갈비탕. 한 그릇에 15만 원.”
서울의 물가와 마주쳤다.
음식값에 평화와 목숨의 숭고한 가치가 담겨 있는 서울의 물가는 가히 살인적이었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자신에게도 예외를 줄 수밖에 없었다.
15만 원짜리 갈비탕 한 그릇을 국물 하나, 후춧가루 하나까지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 먹은 뒤, 역 근처의 거리를 따라 걸었다.
분명 대전역과 똑같이 하늘은 흐린데, 이상하게 따스하고 온화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탓일 것이다.
여기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겠지.
“꺄악! 저기야! 저쪽으로 왔대! 오다가 차를 돌렸나 봐! 얼른 가 보자!”
“아, 진짜? 왜 이리 오빠들 얼굴 보기 힘든 거냐고!”
“빨리 뛰어! 늦으면 사진도 못 찍는단 말이야!”
그때, 서른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성들이 앞을 다퉈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연예인이 왔나 싶을 정도의 열광과 환호였다.
강후가 본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고, 다른 쪽에서도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설마.’
짚이는 바가 있었다.
강후도 빠르게 그 인파에 섞여 뛰었다. 인파 사이에 남자들도 제법 있기는 했다.
사람들이 몰려든 자리에 도착하자, 이 폭발적인 반응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역시······.’
이동 경로를 확보한 한 무리의 헌터들이 대오를 맞춰, 용산역 남부의 던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바로 정화 길드의 헌터들이다.
장시환을 마스터로 둔 국내 명실상부한 1위 길드이자, 서울 내의 ‘유일한’ 길드이기도 하다.
서울의 헌터 구성에서 치안청을 빼고, 정화 길드를 빼면 0명이 될 것이라는 말은······.
농담이 아닌 진짜였다.
정화 길드가 서울 내 길드를 모두 흡수하거나, 교묘하게 죄를 뒤집어씌워 해체시켰기 때문이다.
【장시환이 절대 악이라고 믿었던 헌터와 조직에 대한 생각은 놀라우리만치 왜곡이 많았다.
그의 망상 속에서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때로는 거짓이 진실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정화 길드만이 절대 선이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모든 생각을 자신의 망상에 맞춰버렸다.
그래서 마왕이 강림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엄청난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다시 곱씹어봐도 이야기의 최후반부에 왜 저런 내용으로 ‘급발진’을 했나 싶을 정도의 내용 전개.
명색이 주인공이라는 놈이 사실은 망상과 꿈속에서 살았다는 것이 에필로그 내용의 일부였다.
이러니 연재한 플랫폼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별점 테러를 당할 수밖에.
어쨌든 정화 길드가 서울 내의 유일한 길드고,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다 보니, 핵심 구성원에 대한 팬덤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꺄아악! 관형 오빠!”
“관형 오빠! 이쪽 한 번만 봐주세요! 제발요! 사진 한 번만!”
특히 여성 팬들이 열광한 사람은 채관형이었다.
바이올렛 색깔의 머리카락이 유독 잘 어울리는 그는 환한 미소와 함께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세상의 모든 어둠과 슬픔을 담은 것처럼 무표정하고 깊은 강후의 눈빛과는 완벽히 반대다.
‘어지간히 저 녀석한테도 퍼줬군. 성좌가 도대체 몇이 붙어있는 거지.’
강후가 채관형의 머리 위쪽에서 쉴 새 없이 점멸을 반복하는 붉은 점의 성좌 정보를 훑었다.
최소 열 이상이었다.
그나마 정보창에 전부 출력되지도 않아 [...] 표시까지 달고, 내용이 접히기까지 했다.
물론.
수용소 탈출 이후 급성장을 거듭하는 훗날의 신강후를 생각하면 ‘적당히’ 퍼준 수준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후의 신강후는 세상의 온갖 기연과 행운이 모여드는 존재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3년을 아무 생각 없이 보낼 생각은 없다.
청명 수용소를 탈출하고, 원작에 없던 일이 생겨난 시점에서 이미 내용은 조금씩 비틀리고 있다.
‘그래, 내가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어. 내게 주어진 것만 생각하다 보니 지나쳐 버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 이후로도 장시환과 채관형은 여러 갈래의 기연과 독식을 거듭해가며 성장한다.
주인공과 그 동료에게 자연스럽게 허락되는 소설 속 장치다.
강후는 그 요소에 개입해,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정보는 충분하니까.
아이템부터 시작해서 다른 성좌와의 인연, 그리고 훗날 꼭 필요한 사람과의 인연까지.
중요한 게 많다.
아직 저들은 모르는 미래의 혜택을 가로챌 수 있는 기회가 충분히 있다.
다만.
‘레벨이 문제군.’
모든 요소를 고려했을 때.
적어도 레벨 50은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줄이고 줄여서 겨우 맞춰본 수치고, 느슨하게 생각을 하면 100까지도 봐야 한다.
‘일단, 오십.’
강후가 단기 목표를 잡았다.
다음 생각은 전부 다 집어치우고, 우직하게 레벨 50까지 달리는 것이다.
이후에 다음을 고민한다.
정신없이 현실 적응에 뛰어드느라 간과했던 부분 하나를 깨달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실 가장 맛있는 것이 남이 먹던 것을 빼앗아 먹는 것이기도 하고.
지금 하는 생각이 딱 그렇다.
촤악.
강후가 쌀쌀한 날씨에 챙겨 입은 코트를 여미며, 용산역사 안으로 다시 방향을 돌렸다.
그때.
“저 오빠······도 왠지 잘생긴 것 같지 않아?”
“어, 진짜. 나인 보이즈의 민호 닮았어! 아니, 민호보다 훨씬 예쁜데?”
“누구지?”
인파 속에 조용히 묻혀 있던 강후의 외모를 알아본 여성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이긴 해도, 그 안에 숨겨진 미모를 감출 수는 없었다.
오히려 묘하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구석까지 있었다.
하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초면의 남자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강후는 유유히 용산역을 떠났다.
단기 목표를 확실히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용산역에서 먹은 15만 원의 갈비탕은 의미가 있었다.
* * *
저녁 무렵.
약속한 시간에 가평역에 도착한 강후는 마스터 케이가 보낸 퀵 배송을 바로 수령했다.
마치 현금을 금고에 채우는 것처럼, 솔라키움 열 개를 속주머니에 넣으니까 세상을 가진 것처럼 기뻤다.
“너무 조용한데.”
평일 밤, 그것도 서울 안이 아닌 밖의 영역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그래도 용산에서 막차를 탄 사람이 많았을 것 같은데, 내려 보니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착용한 아이템과 비상식량, 약품, 솔라키움까지 다시 확인을 마쳤다.
이로써 던전에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사전에 공유받은 던전 내 정보에 대한 숙지도 됐고, 남은 것은 입장 시간을 기다리는 것뿐.
그런데.
- 제발요! 가진 건 다 드릴 테니까 보내주세요! 제발 부탁드릴게요, 제발!
근원지가 가깝지는 않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거리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질 나쁜 범죄와 연관되었을 내용이 들리고 있었다.
- 가진 건 다 필요 없어. 그냥 네 몸만 잠깐 주면 돼. 빌려주면 된다니까?
- 이제 막차도 지나갔고, 주변에는 치안청도 없어. 소리 질러 봤자니까 그냥 포기해.
- 백마 탄 왕자라도 나타날 것 같아? 미안하지만 그런 새끼들은 우리가 그간 목을 다 따버렸거든.
- 킬킬킬!
최소 네 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론 말을 안 한 녀석이 있을 수도 있으니, 최소값이 4다.
애초에 이동 경로이기도 했기에 강후가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가평역 1번 출구에서 쭉 북쪽으로 가는 루트라서 그런지, 유독 사람이 더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는 편의점은 해가 지기도 전에 폐점한 상태였다.
“······.”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 안에서 네 남자에게 희롱당하는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양옆으로 3층까지 건물이 있긴 했지만, 오래전에 사람이 떠난 텅 빈 건물이었다.
“도와주세요! 제발!”
강후와 눈이 마주친 여자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동시에 패거리의 시선도 강후에게 향했다.
“야. 무슨 소설도 아니고 주인공처럼 나서서 구해줄 것 같냐? 어이, 갈 길 그냥 가지?”
“심장에 칼빵 맞기 싫으면 가던 길 가라. 어?”
앞의 두 놈이 빙빙 돌리는 단검을 따라 마나의 흔적이 느껴졌다.
헌터다.
그러니 기세등등할 수밖에.
강후가 별말 없이 고개를 돌려서는 현장을 벗어났다. 일말의 미련도 없어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봐라! 클클! 세상이 그렇게 소설 같지 않다니까? 얌전히 벗자. 그럼 부드럽게 다뤄줄게.”
“으히히히!”
강후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네 놈들이 앞을 다퉈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재미를 보려고 할 즈음.
프슷!
제법 소리를 잘 듣는 헌터 하나가 어디선가 들려온 바람 소리에 내리던 바지를 멈췄다.
바로 그때.
푸욱!
“커헉!”
홀연히 강후가 나타나 한 놈의 ‘그곳’을 짧게 찌르고 지나갔다.
스치듯이 지나간 공격이었지만, 그 공격 한 번에 사타구니 사이가 온통 피투성이가 됐다.
강후가 사라진 남쪽 길목이 아닌, 무인 지대였던 북쪽 길목에서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