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클럽 하데스 (1)
* * *
강후는 윤상미와 계약한 성좌에 대한 정보를 보고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질풍 검제】
【중립 성향의 성좌. 검을 이용한 모든 공격에 바람의 힘을 활용할 수 있게 지원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검풍을 일으키는 검사다.
판타지 소설 속, 오러 블레이드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검을 활용한 공격 외에도 바람을 일으키면서 상대방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강후가 호기심을 가진 건, 질풍 검제 성좌가 생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작자로 살았던 시절에 스치듯 떠올렸던 아이디어 중 하나였다. 이런 성좌가 있었으면 하고.
그렇다면 자신의 무의식이 세계의 어딘가에 자연스럽게 반영이 된 것이 분명했다.
강후가 말없이 전장을 다시 살피고 있자, 윤상미가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바스타드가 밀리겠네요.”
“아냐. 저건 일부러 바스타드가 평정에게 공간을 내준 거야. 유인이야.”
서로의 형세 판단이 엇갈렸다.
사실 누가 이겨도 나쁜 놈이 승리자가 된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어느 정도 전세가 결정된 것 같은 느낌에 확 불타올랐던 관심도 식었다.
윤상미도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강후에게 물었다.
“꼭 무슨 영화 속에 나오는 미남 뱀파이어 같아요. 엄청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아파요?”
미남까지는 모르겠지만, 창백하다는 생각은 늘 했다. 선천성 마나 과민증의 영향이 클 것이다.
“항상 아프다고 봐야지.”
부정은 하지 않았다.
원작에서도 선천성 마나 과민증을 해결할 치료 방법은 엔딩이 나는 시점까지 찾지 못했다.
물론 다른 의미로 해결되기는 했다.
신강후가 죽었으니까. 해결이라기보다는 해방이랄까.
“이제 어디로 가요?”
“대전역.”
“······오! 정말요? 저도 가려던 참이었는데.”
“반응이 한 박자 늦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 목적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에요. 가깝잖아. 갈 생각이었어요. 우연히 이렇게 동행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특이한 캐릭터다.
헌터들끼리는 오랜 시간 신뢰가 형성된 것이 아니면, 보통 친근하게 굴지 않는다.
흉흉한 세상이다 보니 동행이나 동승도 당연히 꺼리는 편. 하지만 윤상미는 아니었다.
‘자기 실력에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자기 몸 확실하게 간수 할 자신이 있으면, 사실 좀 열린 마음으로 다녀도 문제는 없다.
보통 상대를 믿었다가 뒤통수 맞고 죽거나 납치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
하지만 힘이 있으면 상관없다.
“그럼 안전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걸로. 역 쪽은 마음에 걸리네.”
강후가 바스타드의 유인책에 말려 오산역으로 패퇴하기 시작하는 평정의 헌터들을 가리켰다.
꼬락서니가 지하철의 구조물을 엄폐물로 삼아 전투를 장기전으로 질질 끌고 갈 모양새인 듯하다.
안전 버스는 다수의 무장 헌터, 그것도 마탄을 다루는 헌터가 직접 가드(Guard)를 서는 버스다.
비싼 운임만큼 이동 중의 안전은 보장할 수 있다.
강후는 편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 * *
달리는 버스 안.
옆에 앉은 윤상미는 대검을 곰 인형처럼 꼭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종종 꺾인 목이 강후의 어깨에 닿곤 했지만, 강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물론 밀쳐내지도 않았다.
한정적으로 주어진 여유.
강후는 김목현을 죽이고 얻었던 아이템을 살폈다.
착용은 했지만, 구성을 확인하진 못했던 것들.
【몰리스 마니체 - 장갑】
【등급 : 5등급】
【한 손 면장갑 아이템으로 5m 내에 위치한 ‘인식 무기’ 하나를 바로 회수할 수 있습니다.】
【착용 즉시 손의 색깔, 모양과 동화되어 외부에서는 쉽게 장갑의 형태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단검에 연동하는 게 가장 최상일 것 같은데.’
단검 투척에 대한 부담감을 낮춰주는 아이템이다.
투척으로 적을 견제하고 떨어지거나 박힌 단검을 직접 손으로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손짓으로 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기 회수에서의 동선 낭비를 극적으로 줄여준다.
【아수라의 혜안 - 흉갑】
【등급 : 5등급】
【마나 +50】
【단, 변환 옵션을 활용해 체력 +50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스위칭 대기 시간은 24시간.】
‘믿는 구석이 있었군.’
김목현이 전투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마나 스탯 보조를 50이나 받았으니.
만약 변환 옵션이 없었다면 강후에게는 큰 감흥이 없었을 거다. 마나에 대한 갈증은 적으니까.
하지만 변환 옵션이 있는 것으로 아수라의 혜안에 대한 가치는 달라졌다.
최고의 구성품이다.
내친김에 바로 변환을 마쳤다.
자세히 안 살폈으면 체력을 손해 볼 뻔했다.
이제 남은 하나.
【무신의 유희 - 반지】
【등급 : 5등급】
【맷집 +50】
【특수 재료인 적요석을 활용해서 한 등급 위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합니다.】
물리적인 공격에 대한 방어력을 대폭 높이는 맷집.
무조건 다다익선이기에 가치는 높았다.
게다가 열 손가락에 끼는 반지라서 착용에 대한 부담도 덜한 편이다.
그 외에 마력을 올려주는 두 개의 아이템은 중복 부위에 필요 없는 스탯인 만큼 팔기로 했다.
“······.”
확인을 마친 강후가 주변을 보니, 버스에 탄 몇몇 헌터들도 잠들어 있었다.
가드들은 계속 창문 밖을 살피고 있었는데, 바스타드 인장을 단 오토바이 몇 대가 쓱 왔다 갔다.
하지만 가드를 잘못 건드렸다가 이마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는 도로에서 멀어졌다.
‘서울을 가야 하나.’
문득 서울이 떠올랐다.
던전이나 레벨업에 대한 욕심을 모두 배제하고 보면, 사실 서울만큼 안전한 곳이 없다.
거기서는 가다가 지갑을 떨어뜨려도, 누구도 건드리지 않을 정도다.
건드린다면 주인을 찾아주려는 손길이 전부다. 혹은 헌터 치안청의 사람들이거나.
하지만 얇은 콜라 캔 하나에 2만 원이 넘어가는 살인적인 물가가 문제다.
안전에 대한 대가다.
‘그래도 야생의 맹수 새끼가 동물원의 맹수보다는 나은 법이지.’
강후가 생각을 정리했다.
피 냄새도 맡아본 놈이 더 잘 맡고, 싸움도 해 본 놈이 한 번을 더 찌르는 법이다.
열세 개의 별.
간교한 마왕의 부역자들을 모두 뛰어넘을 실력을 갖추려면, 일분일초의 무의미한 평화는 아깝다.
쿠쿵!
“헛! 츄릅!”
방지턱에 버스가 한 번 들썩이자, 곤한 잠에 빠져 있던 윤상미가 황급히 입 아래를 훔쳤다.
잠깐이라도 안전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으면 마음 놓고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마는······.
이 세계를 사는 헌터들의 현실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생명의 가치가 떨어진 세상.
* * *
대전역에 도착한 강후는 윤상미와 함께 이예린을 만날 생각이었지만.
밤이 너무 늦었고, 이예린도 외부 업무를 보는 중이었기에 타이밍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으로 약속이 밀렸고, 자연스럽게 밤 시간이 비었다.
대전역 인근에 제법 이름이 알려진 바에 들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오늘은 휴점이었다.
“괜히 방황하지들 마시고, 저희 파이트 클럽에서 칵테일 한잔하면서 기분 전환이나 하시지요?”
덕분에 그 근처에서 호객 행위를 하던 삐끼가 강후와 윤상미를 낚았다.
마침 술 한 잔이 마시고 싶었던 참이고, 유사시에 자기 몸 정도는 간수할 자신도 있었기에.
강후는 윤상미와 함께, 인근의 지하 파이트 클럽으로 향했다.
클럽의 이름은 하데스(Hades)였다.
지하 3층부터 입구가 시작되는 클럽 하데스에는 생각한 것보다 사람이 많았다.
이미 중앙에 만들어진 특설 무대에서는 헌터들의 ‘파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설치된 대형 모니터에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고, 그 아래에 돈의 단위가 갱신되는 것을 보니 데스 매치인 모양이었다.
죽은 헌터에게 걸린 판돈을 이긴 헌터와 그 배팅자들이 가져가는 구조인 것이다.
“춤 좀 춰도 돼요?”
“뭘 하든.”
강후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녀와 동행만 한 것일 뿐, 완벽한 일행은 아니니까.
그녀가 스테이지로 이동해 댄스 삼매경에 빠질 즈음.
강후는 특설 칵테일 바에서,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마시고 싶었던 칵테일을 시켰다.
“솔라키움 버스트.”
“오호? 이걸 마신다구요?”
“마시라고 만든 거 아닌가?”
“사실 구색용에 가까워서요. 솔라키움이 워낙 맛이 좀······. 그렇잖아요? 큭큭.”
스모키 메이크업이 인상적인 붉은 머리의 바텐더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솔라키움의 맛은 분명히 대놓고 비유하기에 난감한 구석이 있기는 했다. 어른만 아는 맛이랄까.
“괜찮아. 좋아하니까.”
강후가 원래 가격보다 10만 원을 더 얹어서 그녀에게 내밀었다.
팁이다.
이런 음성적인 파이트 클럽에서는 바텐더들이 꽤 쓸만한 정보를 파는 경우가 많다.
물론 로또성이 짙다.
바텐더가 아는 것이 적으면, 그저 신변잡기 정도 수준의 쓸모없는 정보가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 복권을 긁는다는 생각으로 부담 없이 팁을 주고 이야기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가 묻는다.
“우리 초면이죠?”
끄덕. 무언의 대답.
“저는 베니라고 해요.”
베니. 흔하게 쓰이는 가명이라, 며칠 지나면 까먹을 것 같은 이름이다.
베니가 열심히 레시피에 따라서 칵테일을 만들며, 강후에게 좀 더 고개를 숙였다.
워낙에 노출이 많은 복장이라서 몸을 숙이는 것만으로도 꽤 아찔한 광경이 연출됐지만.
강후는 놀라우리만치 베니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눈길을 돌릴 이유를 못 느낀 것처럼.
베니가 살짝 어이없는 듯한 헛웃음을 지었지만, 뭐, 무성욕자도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쨌든 팁값은 할 시간이다.
“파이트 클럽의 지하, 그러니까 외부에는 알려지지 않은 지하 7층에 던전 입구가 있다는 얘기가 있어요. 들어간 사람은 있는데 나온 적은 없다나?”
건물은 분명 지하 6층까지 있었다. 로비에서의 이정표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봐도 그랬고.
던전은 곧 이권이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 던전이 누구나 수시로 출입 가능한 ‘오픈형 던전’이라 비밀에 붙였을 수도 있다.
항상 열려 있으니, 유입을 차단할 수 있어야 필요할 때 던전 내부를 컨트롤 할 수 있어서다.
강후는 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고 했느냐고 물으려다가 말을 삼켰다.
바텐더의 말은 십중팔구는 허풍이나 뜬소문인 경우가 많다. 적당히 걸러 들으면 된다.
“그리고 블루문이 곧 이클립스에 합병된다는 얘기가 있어요. 근데 그렇게 되면······.”
바로 그때.
와장창창! 쨍그랑!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서 잔과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클러버로 가득한 인파 사이에서 제법 규모가 되는 남자 무리가 옷소매를 드러냈다.
세 자루의 칼이 사선으로 늘어서 있는 모양을 인장으로 만든 조직. 바로 이클립스(Eclipse)였다.
“음.”
어떤 상황인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여긴 상대적으로 온건 세력으로 불리는 블루문 조직이 운영하는 파이트 클럽이다.